시월, 바람이 분다. 한가득 가을을 머금은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무성하게 달려있는 은행잎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보다 바람만큼 자유로운 게 또 있을까 생각한다. 바람은 참 자유롭겠다. 누구나 한번쯤 꾸는 꿈이겠지만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어디서든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자유로울 수 있다면, 바람 같을 수 있다면, 바람일 수 있다면.
나는 자유롭고 싶은데,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바람처럼’ 자유롭고 싶다는 거지? 아예 바람이고 싶은 건가? 가만, 내가 욕망하는 대상은 자유인데, 나와 자유 사이를 ‘바람’이 매개하고 있네. 지라르의 삼각형처럼.
저자 김모세는 르네 지라르의 대표적인 저서 세권을 꼽으면서 그의 이론을 쉬운 말로 풀어내고 있는데, 지라르는 ‘욕망의 삼각형’과 ‘희생양’ 이론으로 널리 알려진 문학비평가요 문화연구자다.
우선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는 사람에게 자연발생적인 욕망은 없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욕망하는 주인은 내가 아니라면서, 어떤 대상에 대한 욕망은 언제나 제3의 ‘매개자’로부터 빌려온 감정이란다. 그래서 욕망하는 나와 내가 욕망하는 대상 사이의 관계는 직선이 아니라 매개자를 사이에 둔 삼각형 모양이라는 거다. 이를 ‘모방욕망’라 부르면서 인간의 욕망 중 가장 본질적인 속성이란다. 나아가 이렇게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모방하려는 욕망이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이뤄온 근간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면서 지라르는 ‘욕망’이 나의 자율적인 주체성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고 느끼는 건 환상이라면서 ‘낭만적 거짓’이라 부른다. 이에 반해 몇몇 작가들은 그런 환상을 폭로하는 위대한 작품을 썼고, 그런 작품들이 바로 ‘소설적 진실’이라는 거다(p.36-40).
예컨대 흔히 「돈키호테」를 ‘이상주의자인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자인 산초 사이의 대립’이라는 구조로 책을 읽고 있는데, 그건 낭만적 거짓에 물든 읽기란다. 지라르에 의하면 돈키호테와 산초 둘 다 어떤 모델을 추종하는 인물, 그러니까 모방욕망에 빠진 인물들로 봐야한다는 거다. 돈키호테는 전설의 기사인 아마디스를 ‘모방’하고 있단다. 그래서 아마디스의 제자가 된 돈키호테는 스승이 지시하는 대상이나 스승이 가리킨다고 여기는 대상을 향해 막무가내로 덤벼든다. 산초는 가공의 섬과 공작부인이라는 칭호를 바라고 있는데, 이는 산초가 모델로 삼고 있는 돈키호테를 매개로 해서 삼각형모양을 이룬다는 거다.
여러 면에서 나보다 우월하다고 느껴지는 모델을 따라하려는 건 일상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분에 넘치는 샤넬가방을 갖고 싶어 한다든지 멋져 보이고 싶어서 조인성이나 김하늘 같은 연예인의 옷차림 혹은 머리스타일을 따라하려 한다. 이런 따라하기는 실제로 욕망하는 대상이 절실해서라기보다는 이상적인 모델을 닮고 싶어서다. 이렇게 모방에는 현실과 별개로 어떤 ‘이상적인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이다. 그러다보니 이제 따라하기는 샤넬가방이나 조인성, 김하늘 같은 ‘매개자’가 이상적인 가치로 발전하게 된다. 명품가방을 가지면 귀족처럼 된다고 느끼고, 유명 연예인의 차림새와 머리모양을 따라하면서 멋쟁이가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조인성이나 김하늘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이 나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걸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애초부터 매개자인 모델을 경쟁자로 생각할 의도가 없는 경우를 지라르는 ‘외적매개’라 한다. 외적매개를 따라하려는 욕망은 좋아하는 연예인을 최대한 닮아 보려는 데 있다. 그들보다 더 유명해진다든가 경쟁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런데 샤넬가방은 경우가 좀 다르다. 꼭 가져야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카드할부를 하든지 빚을 내서라도 손에 넣을 수가 있다. 이를 ‘내적매개’라고 부른다. 내적매개, 그러니까 샤넬가방은 ‘역시 샤넬이야’라면서 명품인 걸 인정하면서도 그걸 갖겠다고 기를 쓰며 무리하는 내가 짜증나기도 한다. 게다가 필요하지도 않은데 친구가 가진 걸 보고 덜컥 산거라면 더하다. 명품을 가졌다는 우월감과 경멸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이런 일은 친구입장에서도 있었을 테고 말도 못하면서 은연중에 서로 경쟁심을 갖게 되었을 게다.
이렇게 모방욕망에 사로잡힌 개인들이 너나없이 모두 샤넬가방을 들고 다니게 되면, 너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어진다. 그러면 점점 더 비싼 가방을 가지려는 경쟁 속으로 끝없이 내몰리게 된다. 지라르는 이런 ‘차이 없음’이 사회에 퍼지면서 구성원들 사이에 모방경쟁이 한층 더 치열해지고 적개심과 폭력이 잠재된 불안한 사회가 된다고 지적한다. 결국에는 무모한 경쟁과 폭력의 메커니즘이 사회전체를 집어삼키는 위험에 빠지고 만다는 거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을 통해 이런 위기를 넘기고자 사회가 희생양을 고안해냈다고 말한다. 여러 신화 속에 나타나는 ‘희생양메커니즘’에서는 공동체내부와 외부 사이에 있는 경계인이면서 복수도 할 수 없는 존재를 희생양으로 만든다. 그리고는 공동체에 불안을 가져온 존재라며 죄를 덮어씌운 후 제물로 바친다. 말하자면, 해로운 폭력을 이로운 폭력으로 무마하겠다는 건데, 어쨌거나 폭력은 폭력이어서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다. 거기에 이런 메커니즘은 일시적인 효과만 있기 때문에 계속 되풀이 되어야 한다. 또, 암묵적이고 집단적으로 희생제의를 치룬 공동체는 자기네를 위기에서 구원했다며 희생양을 신성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거다.
엄밀히 말해서 이건 모두 거짓이란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일시에 희생양이 정말로 공동체에 위험을 가져왔고, 희생 후에는 진짜로 위험이 사라지게 한 존재였음을 믿어야하기 때문이다. 지라르는 희생양에 대한 이런 폭력을 ‘초석적 폭력(violence fondatrice)’이라고 표현했다(p.182).
이에 반해, 그리스도교의 성서는 공동체의 집단적인 폭력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면서, 복음서의 예수는 신화의 희생양과는 완전히 다르단다. 희생양으로 비유되곤 하는 예수를 변형시킨다거나 왜곡하지 않는다는 거다. 아예 처음부터 예수는 죄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으며, 폭력의 책임은 예수가 아니라 박해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단다.
지라르가 그리스도교를 얘기할 때는 논리에도 비약이 좀 있어 보이고 학자가 아니라 신앙인의 자세로 변하는 듯하다. 신화와 성서를 이분법으로 나누면서 신화를 통해 꼼꼼하게 알아보았던 희생양메커니즘을 단순하게 사탄이라고 정의 내려 버린다(p.239). 아무리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어떤 폭력적 상태를 ‘사탄’에 비유하고 있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예수는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복수도 보복도 하지 말라했다, 끝내 ‘사랑’하고 ‘용서’하라 했다. 지라르는 예수야 말로 희생양 같은 폭력의 메커니즘에 대항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라면서 이런 예수를 좋은 모방의 모델로 삼으란다.
내가 무엇을 ‘욕망’할 때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모방하는 게 ‘본능’이란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고 모방당하다가 ‘경쟁’과 ‘폭력’이 난무한 사회가 된단다. 그러면 폭력을 잠재우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찾게 되고. 그런데 그게 희생양처럼 감춰진 폭력이라면 나도 모르게 거기에 동조하게 된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내 안에 이미 폭력이라는 씨앗이 심겨져 있다는 말이 아닌가.
지라르처럼 독실한 신앙인은 예수를 따라 살면 아주 간단하겠다. 그렇지만 예수, 그가 너무 버거운 나 같은 사람은 대체, 이 초석적인 폭력을 어쩌면 좋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