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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죽은 이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 전순란
  • 등록 2016-11-04 10:20:47
  • 수정 2016-11-04 10: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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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일 화요일, 맑음

 

위령의 날이다. 가톨릭에서는 ‘죽은 이들을 사랑하는 계절’이라고 한다. 실생활에 정신없이 쫓기다보면 살아있는 사람도 살피기 어려운데 죽은이들까지 챙기는 게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하루라도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하고 가능하면 ‘미사’라는 제사를 올리며 성묘라도 하는 날이니 뜻깊은 일이다.



오늘은 살레시안들에게 성묘라도 할 겸 담양천주교공인묘지로 갔다. 11시에 김 대주교님이 집전하시는 미사가 있었다. 5,6년전 이 미사에 참석했을 적에 미사 후 점심을 하는 자리에서 최창무 대주교님께서 “아들이 곧 신부가 될 터인데 아직도 가톨릭으로 입교를 않고 있어요?”라고 꾸중을 하시는 바람에 결혼 40여년만에 드디어 신교(新敎)에서 구교(舊敎)로 입교하게 된 기억이 난다. 성직자도 수도자도 내가 개신교도로 남아 있는 점에서 이질감을 느끼는 이들이 꽤 많았지만 그냥 개신교 신자로 있지 그랬느냐는 사제도 있어 가톨릭이 더 품 있어 보였다.




미사 후 살레시안 묘역으로 가서 보스코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신 마 신부님과 기 신부님, 도 신부님, 구 신부님의 묘에서 기도를 올렸다. 오 수사, 모이세 수사, 방지거 수사의 묘석도 손으로 쓸어보았다. 젊은 회원들의 묘에서도 이태석 신부님 묘석 앞에서는 교우들 한 무리가 연도를 바치고 있었다. 교구성직자 묘역에서 우리 어머님에게 임종대세를 베푸셨다는(1957년) 남동 박문규 신부님의 묘, 보스코의 중고등학교 동창 강영식 신부님의 묘도 방문하였다. 죽은이들과 만나는, 쓸쓸하지만 다정한 자리다. 



담양묘원에서 예전 구례성당에서 사무장 하던 씩씩한 여교우가 갓난아기를 안고 인사를 해 왔다. 일곱째 아이였다! 남편이 묘원관리인으로 취직하여 담양으로 이사왔단다. 남편이 하는 말에 의하면, 꿈에 이태석 신부님(이 묘원에 묻혀 계시다)이 나타나셔서 아이 이름을 ‘태석’이라고 지으라 하셔서 그렇게 짓고 세례도 요한 이름으로 주었단다. 묘원 관사에서 살고 싶었다고, 일곱 아이가 무덤 사이로 뛰어다니며 노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냥 읍내에 집을 구했단다. 다만 아이가 일곱인 부부에게는 아무도 집을 안 주어 상가건물에 세들어 산단다.


완도에 사시는 김성용 신부님도 미사를 공동집전하러 오셔서 신부님과 아나스타시아씨를 모시고 읍내에 나가 함께 점심을 하였다. 언제 뵈도 한결같으신 김 신부님은 더 이상 나를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라고 놀리실 수 없어 좀 심심하시겠지만 당신이 ‘관면’혼배를 집전하신 우리 한 쌍이 늙어가면서도 잘 살고 있어 기쁘실 게다.


저녁 7시에 함양도서관에 도착하니 윤희씨가 먼저 와 공부를 하고 있었다. 두 주간에 책 한 권을 읽다 보면 줄거리 중심으로 서둘러 읽기 쉬운데 깊이 있게 천착하면서, 밑줄 쳐가면서 읽고, 거기서 파생하는 책들까지 구입해서 읽는 습관으로 발전하고 있다. 참 바람직하다. 오늘도 제각기 사정이 있어 세 사람이나 못 왔으니 회원 추가모집이라도 해야 할까보다.


「고전(古典) 공부법」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자!”는 거다. 프로메테우스가 외치듯, “복종하는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바위에 쇠사슬로 묶인 채 까마귀에게 심장을 파먹히겠다!”는 결단,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보다 그 대신 정신적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반항아, 그저 존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는 삶을 살겠다는 자기선언을 촉구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두고 “자꾸 파서 뭐하겠느냐?”는 발언이 나오자 일제히 “끝까지 파헤쳐 잘잘못을 밝히고 응징을 해야만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지 않겠느냐?”고 반론을 펴는 모습들로 보아 역시 독서의 힘은 위대하다. 그것도 영남지방 주부들에게서!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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