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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이 그림에서 당신을 빼낸다면 그것이 내 최악의 인생”
  • 전순란
  • 등록 2016-11-09 10:57:06
  • 수정 2016-11-09 10:5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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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8일 화요일, 맑고 바람 많음


휴천강가의 바위가 내게는 새끼를 안은 수달을 떠올린다


“높이 오를수록 내려올 일을 걱정하라” “올라가서 눈부시게 보일수록 멋지게 장난하다 수직하강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라” “늘 겸손하고 그 자리를 쳐다만 보며 맘졸이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라!” 현인이 일러주던 이 말들을 절감하는 요즘이다. 아무 힘도 없는 민초들이 갖고 있는 제일 큰 힘은 분노다. 성난 파도가 되어 쓰나미가 되어 저자들이 세운 바벨탑을 허무는 장면들을 우리는 4·19, 6·10항쟁에서 우리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나?


‘혜실게이트’의 몸통일 우병우의 극에 달한 오만이 파멸을 불러오는, 쓰나미의 파도가 눈앞에 펼쳐질 날이 멀지 않다. 저걸 쓸어가면 그 다음 차례가 닥쳐 올 것이다. 사람은 아둔하여 타인의 상황을 보고도 모르고 대개는 닥쳐서야 허물어져 내린다.


그동안 많은 아픔을 겪고 이제 남은 게 무엇인가 뒤 돌아본다. 고통을 지불했지만 세월호 학생들의 죽음은 젊은이들과 국민을 눈뜨게 했고, 백남기 어르신의 죽음이 농민을 깨어나게 했다. 바람이 거칠게 불어온다. 이화씨가 보낸 풍경이 처마 끝에서 소란스럽다.


오늘 마지막으로 배추벌레를 잡으면서 두 마리 미만이면 올 가을 벌레잡이는 끝을 맺기로 했는데 오늘도 스물두 마리를 잡고는 기운이 빠진다. 그렇게 살아남겠다고 애쓰는데 내가 너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점심에는 지난번 담양에서 사온 떡갈비를 구웠다. 보스코는 김 신부님께 떡갈비를 대접하고 싶었는데 아나스타시아씨가 “1인분에 3만원이나 하는 고기를 넷이 먹으면 12만원인데... 대사님도 이제 나이 들어 벌이도 없는 처지에 과도한 지출은 말자”며 얼른 추어탕을 주문했다. 



사실 우리는 고기를 안 좋아해서 별로 마음에 걸릴 것도 없는데 신부님이 식당을 나오실 때 보니 무릎이 구부정하고 기운이 모자라 보여, “내년에는 추어탕 2인분에 떡갈비 2인분을 사드리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보니 차 조수석으로 오르는 보스코가 갑자기 늙어 보여 “내가 너무 풀만 먹여 저리 됐나?” 싶어 담양의 ‘하나로마트’에 들러 ‘죽순떡갈비’를 샀었다. 젊어서야 나가서 사람을 만나고, 서로 사고 얻어 먹기도 하지만 나이 든 지금은 내가 아니면 제바로 영양공급이 안되겠다 싶었다. 그것을 오늘에야 구워서 아이스프렌츠샐러드와 함께 밥상에 올렸다.


어제 밤에 일기를 쓰고 있는데 일찍 잠들었던 그가 서재 문을 빠끔히 열고선 내가 있는 걸 확인하고 말없이 다시 갔다. “어제 자정 넘어 왜 그 시간에 자다 말고 서재까지 왔다갔어요?”라고 아침에 물으니까 꿈꾸다 깨서였단다. 꿈속에 내가 편지 한 장(“가 봐야 알겠지만 마지막 편지라고 생각하세요... 사랑을 새로 찾아내서 떠났다고 아세요”라는 문구까지 기억한단다) 달랑 남기고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난다며 사라져 놀란 가슴에, 무슨 일 없나 서재까지 와서 내가 떠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고 안심이 되어 다시 잠 들었단다.


빨래널기는 보스코의 몫


남해 파스칼 형부께서 단감을 보내주셨다


겨울나기로 들어온 포인세티아 화분 다섯 개


어릴 적 엄마를 잃은 아픔이 나이 일흔다섯 넘어서도 그 영혼에 생채기로 다 아물지 않고 남아 아직도 꿈결에 엄마를 찾아 헤매는구나 싶어 ‘징그랍게 짠했다’. 이래서 부부는 서로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하나로 끝까지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며 살아가나보다. 남녀가 만나 사랑으로 일단 결합하고 나면 두 사람의 인생에서는 상대방을 빼면 그 그림이 최악이 되고 만다.



이 그림에서

당신을 빼낸다면

그것이 내 최악의 인생입니다. (나태주, "풍경")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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