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카 21,5-6)
군사 독재의 악령과 맞서 우리가 쌓아올린 민주화의 거탑이 이제 허물어지려고 한다. 그동안 쌓아 올렸다고 생각했던 민주 공화 정신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권력에 빌붙은 재벌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눈속임으로 서민 경제를 어지럽히고, 더 나아가 국가 권력은 서민의 세금으로 사인의 부를 축적해 준다. 휘황찬란한 것처럼 보였던 국가적 창조 경제의 허울이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고 온갖 부정과 부패 그리고 사상누각의 저열한 가치관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썩은 냄새는 토할 지경으로 온 천지를 진동하고 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천부의 인권, 생명의 소중함은 차치하고 기본적 생존권까지, 놓아기른 말처럼 방약무인하고 치졸한 무리들에 의해 무너져 내리면서 민초들은 그 밑에 속절없이 깔린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루카 21,7-8)
처음부터 사기와 기만으로 세상을 속이는 무리가 정치인의 탈을 쓰고 백주 대낮에 메시아임을 자처하며 ‘종북타파’만이 살길이라고 협박을 해왔다. 그 협박에 넘어간 민중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권력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우리 민초보다야 낫겠지. 아무렴 그렇게까지 하겠어?” 우리는 그저 따라가고만 있었다. 한번이라도 서서 “이건 아니지 않는가?”라고 되뇌어 본적이 있었던가? 이명박스런 부패도 모자라 막판에는 주술스런 한 ‘인간’의 출현으로 국정 시스템이 마비되었다. 이 나라의 ‘양심을 대변’한다는 무수한 종교 지도자들은 저 유대 나라의 ‘대사제들’처럼 자신들의 위선과 거짓을 감추기에 급급하면서 그저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다. 그들의 뒤를 어느 누가 따라 가겠는가?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루카 21,9)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를 북한의 위협과 동일시하며 말도 안되는 테러방지법을 만들어 민초들의 사소한 대화까지 엿듣는가 하면 국지전이 일어 난다는 둥, 전쟁의 위험이 코 앞에 닥쳤다는 둥, 할 필요도 없는 말을 되뇌이면서 온 세상을 기만하고 있다. 우리의 엄청난 국력과 빈틈없는 국방은 말없이 조용히 얼마든지 북한의 위협을 제재할 수 있다. 그 어머어마한 방산비리가 눈앞에 확 펼쳐지는 일만 없다면! 언젠가는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의 공포 앞에서 우리는 지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나?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루카 21, 10-11)
한반도 주변 정세가 우리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강국들의 엄포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같이 늑대 무리에 던져진 양같은, 국제 정세 속에서도 같은 민족끼리 앙앙불락하며 손 한번 내미는 것도 꺼리고 있다. 정권의 의도적 외면과 무능함으로 세월호 참사를 단순 교통사고로 치부해 버리고 한반도 남단의 잦은 지진과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지 모르는 취약한 핵발전소에 대해서는 속수무책, 메르스 사태와 살인 가습기 피해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한다. 모름지기 국가는 생존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약자를 제일 먼저 보듬어야 한다. 그러나 민중에 대해 한마디의 위로는 커녕 스스로의 성찰도 없다. ‘머피의 법칙’이나 ‘하인리히 법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파탄의 표징들은 오래 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루카 21, 12)
그 표징은 결국 시민을 탄압하는데서 나타난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건전한 목소리를 ‘종북으로 매도’하며 입을 틀어막고 문화예술의 첨병들은 소위 ‘불랙리스트’로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 도처에서 고소, 고발로 개인의 이유있는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고 시민이 위임한 공권력을 사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 간악무도한 정권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내리쳤다. 막장 정권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시도 때도 없이 검찰, 경찰에 불려다닌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루카 21, 13-15)
그러나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거기에 굴하지 않는다. 공동선을 추구하고 미래의 비전으로 가득찬 꿈을 꾸는 사람들은 설익은 변명이나 쓸데없는 교언을 하지 않는다. 인권의 소중함을 부르짖고 불의에 맞서는 사람들은 떳떳하기 때문에 그들 앞에 걸림돌이 있을 리 없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루카 21, 16-18)
이 재난의 시대는 소단위 가족사회까지 해체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무지한 정권은 진보와 보수, 가진 자와 못가진 자로 양극화시키고 알량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부모간의 형제간의 친척들간의 불신을 극대화시키며 계층간의 투쟁까지 선동한다. 친구가 친구를 고발하고 애비가 자식을 고발해야 하는 세태는 30년전에 끝났어야 했다.
제주 강정의 사태를 보라! 밀양 송전탑, 핵발전소 설치 그리고 국익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사드배치에 따른 지역 갈등 조장 등등 이루 필설로 다 채우지 못할 정도다. 권력자들의 ‘정의’는 우리 민초들의 ‘정의’와 다르다. 민초들이 부르짖는 정의 때문에 권력자들은 민초들을 미워한다. ‘가만히 있지 않고 왜 이 난리냐?’ 이다. 그러나 우리 민초들 누구나 실낱, 아니 머리카락같은 정도의 양심을 가지고 이 세태를 눈을 부릅뜨고 지켜 본다면 우리는 그 무도한 권력자들에게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 19)
우리 민초들은 그들의 불의함을 잘 알면서도 희망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꿈을 안고 그동안 인내로써 참고 지내왔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위임했던 우리의 ‘생명’을 되돌려 받을 때가 왔다.
공교롭게도, 아니 예언적이게도 지금까지 나열한 성경 구절은 오는 11월 13일자 주일미사의 복음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종교적 의미를 빼고 ‘정의’의 이름으로 등치시켜 보았다. 또 공교롭게도 11월 12일 토요일 저녁은 국정 파탄의 책임을 묻는 민중총궐기대회가 있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은 토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일요일 해질 때까지 주일로 본다. 또한 가톨릭 교회는, 전세계 어느 지역을 불문하고 가톨릭 공동체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같은 날 같은 복음 말씀을 동시에 공유한다.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이 지금 ‘재난의 시작’을 묵상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