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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웅배] 12월, 대림시기와 ‘독사의 자식들’
  • 김웅배
  • 등록 2016-11-24 13:51:56
  • 수정 2016-11-24 15: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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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진


역사는 반복된다. 반복된다는 의미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논외로 하고 어쨌든 인간의 망각이 역사를 반복시키나 보다. 세상을 살다보면 지겹도록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우리의 정치사 혹은 사회사는 물론 우리 개인의 가족사만 보더라도 똑같은 일의 반복이 무수히 일어난다. ‘진보’라는 단어가 쑥스러울 정도로 역사의 발전적 의미의 ‘진보’는 찾아보기가 정말 힘들다. 권력 유지를 위한 정부 정책 속임수 발표, 시대를 불문하고 민주화를 부르짖는 야당의 늘 같은 성명서, 종교 지도자들의 틀에 박힌 메시지, 세대를 초월한 부모님들의 ‘우리 땐 그러지 않았어!’ 따위의 진부한 설교(?) 등등 정말로 우리는 이 무심한 역사의 반복적 행태를 늘 곁에 두고 있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반복되는 정치·경제·사회의 난장을 제대로 수습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스스로도 민주사회의 시민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1%의 지배 계급으로 승급하려는 기회만 엿보고 있다. 개인주의적·유아독존적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배금주의가 최고의 덕목인 사회, 이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 현상이 해방 이후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백여 년 전 일제에 유린된 구한말의 역사가 세계 상위권의 국력을 가졌다는 대한민국에서 재현되고 반복될 조짐이 보인다. 주위의 초강대국 사이에서 눈치만 봐야하는 신세가 또 반복된 것이다. 이렇게 옳던 옳지 않던, 역사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잘 아는데도 우리는 또 반복된 역사를 살아간다.  


우리는 반복적 일상생활에서 달력이 필요하다. 


가톨릭교회에도 일상 달력과 비슷하게 짜여진 신자를 위한 전례력이 있다. 이 전례력 안에서 한 해 동안, 신앙생활의 시작과 끝을 정해 놓은 것이다. 일상의 달력에서 1월 달이 새해의 시작이듯 전례력에서는 대림 첫 주일이 새해의 시작이다. 대림시기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새해의 첫걸음을 예수의 강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왕의 모습도 아닌 비천한 처지의 어린 아이로 태어난다는 설정은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이다. 이래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님의 탄생을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이라고 말했다. 이런 위대한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이제 온 교회는 11월 말부터 인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한편 우리는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처지에 있는 한 사람의 퇴진 날짜를 일상의 달력에 기입하고 있는 중이다. 전례력에서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기인 지금 말이다. 선장 자격증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이상한 사람이 대한민국 호의 선장이라고 스스로 외쳐대며 키를 꽉 움켜잡은 채 선장실에 틀어박혀 농성 중이다. 우리는 지금 이 사람이 스스로 선장실에서 나오기를, 예수님을 기다리듯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승객들은 이 이상한 사람이 배의 키를 붙들고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선장 없이 물결에 저절로 흘러가게 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사람 자신은 이 도도한 물결에 홀로 키를 잡고 있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40여 년 전, 자신의 아버지가 휘두른 18년 철권통치의 세월이 무색하게, 4년도 채 안된 기간 동안에 온 나라의 국정을 ‘개인적으로 자신만이 잘 아는’ 소위 비선실세의 농단으로 철저하게 말아먹어 놓고도 말이다. 


미국의 철학자 죠지 산타야나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참담한 역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같은 참담한 역사를 반복하는 것은 저주나 다름없다. 영원히 풀릴 길이 없는….  


세상의 온 교회는 대림 시기를 거쳐 성탄을 준비한다. 그런데 교회의 메시지야말로 반복의 반복, 그 반복에 또 반복이다. 매년 같은 예수님이 태어나고 매년 우리는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희망이 현실로 다가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니 주님의 재림과 강생이 현실적이지 않다. 


언제나 그렇듯이 교회의 메시지는 공허한 울림만으로 남을 뿐이다. 서로 간에 신자인 것만 확인하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으로 끼리끼리 선물을 돌리고 시국의 엄중함에 대해서는 유체이탈적 나 몰라라다. 사회정의를 외쳐야 할 교회는 오히려 사회정의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마찬가지로 민중의 안전과 복리를 위해 공복의 역할을 다 해야 하는 청와대는, 대통령은커녕 일반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자격조차 의심받는, 한 이상한 사람에 의해 막 국민과 전쟁을 하려는 듯한 태세를 갖추고 있으니 말해 무엇 하랴!


앙드레 지드의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으나,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는 이 말이 진실이 되어가고 있다. 


교회에서 정한 대림시기와 성탄시기가 올해도 반복되려고 한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희망이 별로 안 보이는 이 중한 시절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교회의 큰 가르침을 언제쯤 받을 수 있으려나? 교회 전례력의 단순반복을 벗어나 우리는 교회의 큰 가르침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우리는 목자가 필요한 양떼들이다! 


당시 유다의 부패한 기득권 세력에 온몸으로 대항했던 영원한 예언자,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이로는 그보다 더 큰 인물은 없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어린 아이보다 작은이로 여겨지는 세례자 요한의 고함소리만큼은 오늘도 크게 들린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마태 3, 7ㄴ-8, 10. 대림 제2주일 복음말씀 중에서)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 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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