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차를 두고 자식을 낳은 두 여인이 있었다. 그런데 둘이 같이 자다가 한아이의 어미가 실수로 자신의 아이를 깔아죽이고 옆에 있던 여자의 아이를 자신의 자식으로 둔갑시킨다. 솔로몬 왕 앞에 나간 두 여인은 그 아이가 자신의 자식이라고 우기며 바른 판결을 내달라고 간청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명한 재판의 서두 부분이면서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다 아는 지혜로운 자의 대표, 솔로몬 왕의 판결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때에 임금이 말하였다. “한 사람은 ‘살아 있는 아이가 내 아들이고 죽은 아이가 너의 아들이다’ 하고, 다른 사람은 ‘아니다. 죽은 아이가 너의 아들이고 산 아이가 내 아들이다’ 하는구나” (1열왕 3, 23)
우리의 헌법 재판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번엔 나라 대부분의 백성들이 촛불을 들고 헌법 재판소에 달려 가, 자신이 아직도 대통령이라고 우기고 있는 여자가 진짜 대통령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백성들의 주장이 틀렸다며 그 나름대로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추종자인 ‘애국시민’들을 이용하여 판을 바꾸려 한다.
재판의 내용도 내용이고 헌법 상 법리 해석이 복잡하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물론, 율사 사이에서도 견해차가 있는 만큼 그리 간단치가 않다. 여하튼 아주 단순하게 사건의 내용 만을 본다면 한쪽의 주장은 대통령이 어떤 괴상한 여인과 함께 국정을 사사로이 농단하였으므로 최고 책임자로서 처벌을 받아야한다고 하고, 한쪽은 최고 책임자로서 친한 친구에게 의견을 청취하여 자신의 정책에 반영해서 통치의 행위를 한 것이지 사사롭게 이득을 취한 것이 아니므로 전혀 잘못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임금은 “칼을 가져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시종들이 임금 앞에 칼을 내오자, 임금이 다시 말하였다. “그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쪽은 이 여자에게, 또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 그러자 산 아이의 어머니는 제 아들에 대한 모성애가 솟구쳐 올라 임금에게 아뢰었다. “저의 임금님! 산 아기를 저 여자에게 주시고 제발 그 아기를 죽이지 마십시오.” 그러자 다른 여자는 “어차피 내 아이도 너의 아이도 안 된다. 자, 나누시오!” 하고 말하였다. (1열왕 3, 24-26)
왕은 칼을 가져오라고 하고는 공평하게 아이를 둘로 갈라 두여인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령을 내린다. 깜짝 놀란 진짜 어머니는 친권을 포기하고 차라리 다른 여자에게 아이를 주라고 하지만 가짜 엄마는 내 아이도 아니고 네 아이도 아니라며 아이가 죽어도 관계없다는 듯이 둘로 갈라서 나누어 달라고 한다. 상식적이지 않은 여자의 으스스한 주장이다. 솔로몬 왕은 이미 우리가 모두 다 아는 바와 같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모성애를 저울로 삼아 지혜로운 판결을 내린다.
태극기를 앞세운 애국 세력은 대통령의 통치 행위가 무엇이 잘못이냐며 오히려 좌파들에 의해 국가가 전복된다면 더 큰일이니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주장한다. 즉, 주인이 하인들에게 계엄령이라는 칼로, 제 자식도 아닌 남의 자식인 민주주의를 차라리 죽여 달라고 청하고 있는 꼴이다. 그들은 일반적 상식적 양심 세력들도 좌파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들에게 정권을 내 주느니 차라리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계엄령을 선포해야한다는 ‘상식적’으로도 용납이 안되는 억지 주장을 편다. 하기야 이들의 기득권 선배들은 무수히 계엄령을 선포해서 시민을 통제하고 양심수를 간첩으로 조작하여 처단한 전례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들은 이미 그때 민주주의를 슬그머니 깔아죽였다.
극우보수집단의 행태가, 아이의 안위는 치지도외하고 무조건 다른 여자 손에 살아 있는 아이가 맡겨지는 것이 싫은, 남의 아이를 반쪽으로 나누라고 왕께 청하는 ‘제 아이를 이미 죽인 여자’의 행태와 무엇이 다른가? 자기 아이를 실수로 죽인 여자의 피폐된 정신 상태로는 무슨 일이라도 벌일 것 같다. 게다가 다른 여자에 대한 질투심으로 막가파식 말도 안되는 억지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그야말로 ‘혼이 비정상’이다.
이들 애국 시민들은 즉시 계엄을 선포하여 독재를 해서라도 좌파를 청산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어찌됐든간에 좌파들에게 정권을 넘길 수 없다는 오기는 시기심과 질투심에 다름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몇십년간 민주투사들이 금이야 옥이야 기른 민주주의라는 아이를 차라리 죽이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질투심이고 시기심인가. 그 질투와 시기심은 온 정신과 혼을 파괴시키고 있다.
‘종북좌파’를 없애는 것이 애국심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이 실제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생각은 다양하다는 뜻이다. 그 생각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생각이 다르다고 위해를 가할 순 없다. 헌법재판소는 그 보수의 애국심을 빌릴 것도 없이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사고만 유지하고 판결을 내리면 된다.
그때에 임금이 이렇게 분부하였다. “산 아기를 죽이지 말고 처음 여자에게 내 주어라. 저 여자가 그 아기의 어머니다” (1열왕 3, 27)
솔로몬의 명판결로 모든 백성들이 그를 칭송하고 존경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왕국은 올바른 법질서도 유지하게 되었다. 솔로몬의 재판으로 나라의 멸망과 전복을 막은 것이 아니다. 솔로몬의 정확한 분별력으로 명확한 진실을 밝혀낸 것 뿐이다. 지도자가 분별력도 없고 게다가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으로 숨기려 할 때 그의 정권은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다윗 성왕에 이어 지혜로운 솔로몬 왕이 이끈 이스라엘 왕국은 번성의 길로 들어선다.
우리가 헌재에 요청한 재판의 내용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우리나라의 헌법에 위배되는 일을 했는지 아닌지 그 진실을 상식적으로 알고 싶다는 요구일 뿐이다. 근래 대통령의 불법적 행적이 나타남에 따라 대통령의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자는 것이지 백성들 개인의 성향이나 각자의 애국심을 나타내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애국심은 애국가를 4절 다 외우고 태극기로 온몸을 감싸고 휘두르는 것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애국심은 자연 발생적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아무리 천하의 불한당도 다른 나라에서 자기 나라의 국가를 듣게 되면 가슴이 벅차 오르며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다. 나라를 팔아먹은 자도 자기나름의 애국심은 있다.
‘이게 나라냐?’ 라며 울부짖는 백성들에게 애국심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이 때에 ‘나라’는 형편없는 자들의 농단으로 어지럽혀진 정권을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일 뿐이다. 애국심은 모국에 대한 감성적 발로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애국시민’들이 억지로 내휘두르는 태극기는 이미 그 뜻을 상실했다.
기득권 층의 극심한 부패를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희석시키지 말자. ‘종북좌파’를 가른다며 태극기를 펄럭이며 허공에 휘두르는 어리석은 짓은 이제 제발 그만하자. 우리가 모두 공유하고 있는 상식적 좌파에 대한 시기심이나 질투심이라면 더더욱 멈춰야 한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단순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오히려 낫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그 질투심이나 시기심만큼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보적 성향을 ‘종북좌파’라며 일방적 낙인을 찍으려는 정신파괴집단의 광기이다. 이들은 이미 이성을 잃은지 오래 되었다. 이들의 행태가 예수를 몰아죽인 기득권층에 동조한 유다 백성들이나 유대인 학살을 내심 인정한 일부 유럽의 시민들과 무슨 차이가 있으며 ‘제 잘못으로 자식을 이미 죽인 여자’가 차라리 남의 아이도 죽여달라는 이 뻔뻔함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시민의 자유롭고 열린 정신은 나라를 풍요롭게 만든다. 사회가 최대한으로 균등한 기회를 부여하고, 최소한이라도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사회라는 인식이 들 때 소득에 관계없이 만족한 생활을 영위한다. 일인당 소득이 3만불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이젠 없다.
전 정권의 ‘부자되세요’란 말을 숱하게 들으면서 실제 부자가 된 백성들이 얼마나 될까? 블랙리스트에 의해 문화 역군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재벌들의 횡포에 속수무책이며, 권력을 가진 자들의 전횡으로 참담한 지경에 이른 이 나라 백성들에게 참된 ‘정신의 고양’과 ‘문화 창달’이라는 명제가 가당키나 한건가?
임금이 이러한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을 온 이스라엘이 들었다. 그리고 임금에게 하느님의 지혜가 있어 공정한 판결을 내린다는 것을 알고는 임금을 두려워하였다. (1열왕3, 28)
하느님의 지혜를 갖추고 하늘(민심)을 두려워하는 임금과 함께 부요하고 풍요로운 사상의 강 위에 배 띄우며 서로의 담론을 즐겨 듣고 말하는 시대는 언제쯤 오려나!
그러나 기다려 보자! 공정한 판결을!
하느님의 지혜가 있어 두려운, ‘솔로몬의 판결’이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이루어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