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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웅배] 노동자의 수호자, 사회정의의 수호자 ‘성 요셉’
  • 김웅배
  • 등록 2017-03-27 13:00:21
  • 수정 2017-03-29 09:3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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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은 성 요셉 성월이고 지난 3월 19일은 성 요셉 대축일이었다. 그리고 요셉을 곤혹스럽게 만든 마리아의 예수님 탄생 예고 대축일(성모영보대축일)도 3월 25일이다. 


3월은 또한 사순 기간이기도 하다. 금년 3월 10일은 건국 이후 최초의 대통령 파면이라는 큰일을 저질렀다. 아마도 내년부터는 삼일절 다음으로 기념일(?)이 한 개 더 추가될 것 같다.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은 우리나라 수호성인일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사드 문제로 원치 않는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중국도 성 요셉이 수호성인이고, 일본과 베트남의 수호성인도 성 요셉이다.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수호성인의 남발은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 요셉의 엄청난 인기가 성모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더구나 요셉은 교회 전체의 수호자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활동과 인간사에 명멸하는 모든 이의 수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러 분야의 수호자다. 그런 면에서 우리 인류는 요셉 성인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러함에도 요셉 성인은 천상에서 넉넉한 침묵의 미소로 우리를 내려다보시고 있다. 오죽하면 요셉 성인을 회의에 빠진 자, 유혹당할 때와 머물 곳이 없을 때의 수호자로까지 모셨을까?

 

성경을 보면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요셉이 알고 그 복잡한 심경에 대해 약간의 묘사가 있지만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선 말이 없다. 또한 요셉에 대한 마리아의 리액션에 대해서도 전혀 없다. 


그런데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디테일에 더 관심이 많다. 요셉은 언제 어떻게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았고 마리아는 요셉에게 들켰을 때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도 알고 싶어한다. 성경에 있어서 모순이나 합리적이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 때 대개 성경의 해석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불필요한 디테일에 대해서는 거론을 안 한다”라고.

 

복음서를 보면 예수를 가리키며 동네 사람들이 저 사람은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면서 서로 수군거리며 대화하는 장면이 한 두 군데 나온다.



요셉의 직업이 목수라고 하지만 당시 나자렛에는 목조 건물이 없었고 석재가 많은 지방이라서 집들도 거의 돌을 쌓아지었다고 해서 요셉이 목수가 아니고 석공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유명한 건축가 한 분은 당시에는 분야가 세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의미로 따진다면 요셉은 전체 건물을 짓는 건축자로 표현하는 게 어색하지 않다고 한다. 그 이론에 따르면 요셉은 석공, 또 일부 창틀이나 가구는 목재로 했을 테니 목수, 벽을 쌓았을 테니 벽돌공, 담벼락을 흙으로 발랐을 테니 미장이, 또 일부 쇠붙이도 다루었을 테니 대장장이 등 일인 다역을 했을 수가 있다고 본다.


성 요셉의 직업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그가 가톨릭 교회에서 노동자의 주보성인(노동자의 수호자란 칭호는 베네딕도 15세에 의해)으로 모셔졌기 때문이다. 노동에 관한 모든 직업군이 이렇게 한 사람을 통해 한 번에 정리되기는 쉽지 않다. 당시에 배관공이나 전기공은 없었을 터이니 현대를 사는 그분들은 좀 섭섭하기도 하겠다. 하기야 회사 사무실에서 펜대를 굴리는 사람도 월급을 받고 일하니까 노동자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음 교황인 비오 11세는 요셉을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자들’의 주보로 정했다는 사실이다.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자들’의 정체(유신론적 자본주의자?)가 누구인지 대충은 알겠지만 소비에트 공산 혁명으로 노동자 중심의 과격한 이념에 밀린 서구 유럽의 공포감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겠다. 여하간 어떻게 보면 요셉은 국가적 집산주의를 부르짖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자유 시장 경제를 주장하는 ‘하느님을 믿는 자본주의자들의 수호자’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어 다음 교황 비오 12세는 3월 19일을 노동자의 수호자 성 요셉의 축일로 공포했다. 


지금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파업만 하면 근거도 없는 종북좌파로 몰려 운신의 폭이 좁은데 가톨릭교회는 벌써 노동 기층민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공산 혁명에 대해 날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런 사실에 입각하면 바티칸은 기회주의자처럼 줏대가 없어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천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거침없는 행보는 좌우라는 이념 대립이 허구로 보일 정도다.


▲ ⓒ 가톨릭프레스DB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님은, 이분이 없었다면 다윗의 후손은커녕 뿌리 없는 사람이 될 뻔했다.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유다인들의 믿음이 이루어지기 위해 예수님은 당연히 다윗의 후손이어야 했다. 또 이때 다윗의 법적 후손인 요셉이 결단을 내려 마리아와 엮이지 않았다면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지루하고 기나긴 족보도 없었을 것이다.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 마리아의 동정론에 집착하다 보니 요셉은 나이 많은 사람이 되어버렸고 요셉의 입장이 점차 애매해진 바람에 너무하달 정도로 요셉의 역할이 미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감 받은 복음 사가는 아래의 이 한 문장으로 요셉 성인의 성격 태도 가치관까지 한칼에 정리한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태 1, 19)


그는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지만 법 없이도 살만큼 유순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마리아의 불륜(?)을 눈치채고도 그냥 덮고자 했다. 그는 휴머니스트였다. 당시 합법적이었던 이혼 절차를 밟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잘 따랐으므로 의인이란 칭호를 받은 것이다. 성경 텍스트에 의인이라고 언명되었을 때는 실제로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의인으로 존경받았음을 뜻한다.


우리가 살면서 남을 평할 때 자주 쓰는 어법에 “000는 훌륭해. 그런데 말야…”라면서 에둘러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라는 구절 뒤에는 군더더기가 전혀 붙지 않는다. 성 요셉의 의로움 때문에 비오 11세는 그를 사회정의의 수호자로 선포한다. 사회정의의 수호자! 이 얼마나 영광된 호칭인가!  


교회가 요셉을 사회 정의의 수호자로 선포한 내력을 달리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지만 단순 명료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라는 이 한 마디가 오히려 ‘요셉의 의로움’을 더욱 의심할 수 없는 말이 되게 하였다. 


사회정의의 수호자로서의 성 요셉은 노동자로서 대변되는 기층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동어반복이지만 노동자의 수호성인으로 목수 성 요셉이야말로 사회 정의의 수호자로서 최적격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고약한 유다 실정법을 넘어 임신한 마리아를 받아들이고 예수의 양부를 자처한 그다운 일이 아닌가!


▲ ⓒ 최진


자, 그런데 요셉의 실제 입장은 어떠했을까? 그는 현실적인 방법으로 마리아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며 당사자들끼리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 아무튼 마리아와 약혼하고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임신 사실을 접하고 요셉은 얼마나 혼자서 끙끙거렸을 것인가! 꿈이란 것이 생리적, 심리적 세계의 일부이지만 구약의 꿈쟁이, 이집트의 총리대신으로 출세한 요셉처럼 이 요셉에게도 꿈이 없었다면 삶의 끝이 어땠을지 짐작조차 못 하겠다. 다행히 천사가 꿈에 나타나 요셉의 마음을 돌려놓기는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헤로데의 영아학살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허둥지둥 이집트로 피난을 가기도 했으며 다시 돌아와서도 안전하다고 여긴 나자렛으로 피신을 갔다. 그야말로 난민으로서 가족을 위하여 동분서주 헌신하였다. 성가정의 보호자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어느 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소년 예수를 잃고 혼비백산한 경험도 했다. 요셉의 성 가정은 말이 성 가정이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지구상의 다른 많은 가정에 비해 요셉의 가정은 좀 곡절이 많긴 했다.


사실 요셉의 생업은 목수로서 노동 일을 하였다. 다윗의 자손이라지만 이미 흘러간 물이었고 로마의 압제하에 이리저리 뒹구는 기층민에 불과했다. 요셉은 복음서에서 보면 일방적으로 지시만 받고 행동으로 옮기기만 한다. 천사가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온다. 4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웬만한 제자들도 대사가 한마디쯤 있는데 유독 요셉 성인만은 아무 말이 없다. 자신의 개성을 전혀 나타낸 적이 없다. 그는 복음 사가의 서술 속에서만 존재한다.


요셉은 침묵의 성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노동자는 요셉이다. 이 세상에서 자본에 압박을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억울한 요셉은 무수히 존재한다. 침묵의 성 요셉은 세상에 모든 노동자를 수호하고 세상에 세워야 할 사회 정의의 수호자이다. 가톨릭 교회가 추앙하는 성인들 중에 수호의 의미와 가장 부합되는 성인이 성 요셉인 것 같다.


▲ 2015년 8월, `쌍용차 사태의 조속한 해결과 이땅의 해고 노동자들을 위한 미사`가 쌍용차동차 평택공장 앞에서 봉헌됐다. ⓒ 최진


기층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을 살피는 일이 공동선이며 소위 교회가 보살펴야 할 우선순위 넘버 원이다. 현재 이 나라는 맘몬의 사주를 받은 괴이한 여인이 국가 최고 권력과 결탁하여 엄청난 일을 벌였다. 이들의 행각은 노동자 성 요셉의 행로와는 완전히 반대로 가고 말았다. 남북 분단의 비극을 이용해서 기득권을 보호하는데 급급했던 권력자들은 교황인 비오 11세가 요셉을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자들’의 주보로 정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리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가 신자유주의의 처참한 약육강식을 변호하는 모양새가 된 것도 아이러니다.


이 모든 모순과 합리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을 아우르는 사도좌의 깊은 고뇌에 대해 침묵의 성 요셉은 어떤 해답을 제시하고 있나?


교황 요한 23세는 성 요셉을 가톨릭 교회의 환골탈태를 촉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수호성인으로도 세웠다(1961년).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 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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