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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웅배] 예수 부활의 4월은 잔인한 달인가?
  • 김웅배
  • 등록 2017-03-30 11:16:28
  • 수정 2017-03-30 12: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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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어트의 시 ‘황무지’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4월은 잔인한 달…’ 바로 이 구절 때문이다.


당시 4·3사건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을 때 4·19 혁명이 일어났다. 어린 학생들을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가 흉탄에 스러져 갔다. 이후에 이 시는 우리의 4월을 상징하는 시가 되었다. 엘리어트가 말하려 했던 시어의 뜻과는 좀 다르게 우리는 받아들였다. 


우리의 4월은 죽음과 연계되어 있다. 죽음이 있어야 하나의 밀알이 싹트듯, 뭔가를 살리려면 죽어야만 된다는 역설이 별로 이상스럽지 않게 다가온다. 


예수의 부활 대축일도 대개 매년 4월이다. 예수는 죽어야 했다. 예수는 인간의 모든 죄를 한아름 품에 안고 사망의 골짜기로 몸을 던졌다. 한 사람의 죽음이 부활 사건의 시초였다. 아이들은 대한민국의 적폐를 가득 채운 세월호와 함께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았다. 아이들의 죽음은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예고했다. 예수는 3일 만에 부활한다. 죽음을 이긴 자가 지금까지 없었지만 예수는 이를 이루어냈다. 세월호는 3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아니 강제로 은폐되었고 ‘가만히 가라앉아 있어야 할 진실’이 밝혀질 ‘때’가 왔다. 


그뿐만 아니다. 세월호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모든 사람들도 예수 부활에 동참할 ‘때’가 온 것이다.


▲ (사진출처=연합뉴스 / 해양경찰청)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사건은 그 동안 줄곧 하고 있던 모든 일을 오랫동안 중단할 만큼 나에겐 엄청난 큰 충격이었다. 침몰 현장의 중계방송은 살아있는 자들에게 가하는 처절하고 참담한 고문이었다. 


기울어져 가는 배 옆에 붙은 창유리를 긁어대는 어린 손들의 절규는, 무차별로 송출되는 영상매체를 보며 현대를 소비하는, 우리 무심했던 인간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온 천형이었다! 그것은 마치 십자가 상의 예수가 죽어가는 과정을 TV로 생중계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후에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은 ‘동물의 세계’만도 못한 인간의 악독함이 어느 정도 갈 수 있는가를 시범으로 보여준 예에 불과했다. 약하고 힘없는 자의 마지막 저항 수단인 단식투쟁 옆에서의 ‘폭식투쟁’ 등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의 극한 예시를 다 보여준 인면수심의 아수라장이었다.


권력의 개 노릇을 하는 부역자들과 어용 언론들은 우연히 일어난 교통사고로 치부하고 그 보상비가 얼마고, 보험료는 어쩌고 하며 한낱 있을 수 있는 사고처럼 위장하기 바빴다. 공중파에 사건 은폐 뉴스는 기승을 부렸고 그 해 4월은 올림머리하기 좋은 달이었다. 정말로 잔인한 4월이었다.


인간은 사회의 관계성에서 자신의 유불리를 떠나 인간으로서 마땅한 일을 하려는 속성이 있다고 한다. 지하철 승강장에 끼인 승객을 위해 몇 백 명의 사람들이 달려들어 열차를 밀고 구해내는 장면을 가끔 본다. 인간의 합심은 불가능이 없다. 


▲ 2005년,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에 발이 낀 시민을 구하기 위해 다 함께 지하철을 미는 시민들.


그런데! 공동선을 추구해야 할 공권력의 수행자들이 합심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게다가 제 나라 백성들을 향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무지막지한 공권력이 잡아떼기 행태까지 벌이고 있으니, 이는 유다 기득권층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내 탓이 아니라고 손을 씻는 이민족 로마인 총독 빌라도의 책임 회피성 야비한 태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짓이다.


예수의 죽음은 당시의 공권력과 기득권 집단, 어리석은 군중들에 의해 이루어진 어처구니없는 결과다. 불의를 보고도 합심해서 그냥 지나칠 때 각 개인의 잘못에 대한 책임은 군중심리에 의해 희석된다. 나 하나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양심에 가책도 덜 받는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의 상부구조와 실행을 담당하는 하부구조 모두 합심하여 의도적으로 세월호를 묻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사건 발생 3년이 지나고 결국 무능하고 괴이한 수장의 머리는 떨어졌는데도 적폐로 똘똘 뭉친 몸체만 있는 묵직한 뱀은 아직도 살아서 ‘관성의 법칙’에 의해 지금까지 꾸물거리고 있다. 어이가 없는 일이다.


하느님은 세상의 부정부패와 동거동락하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는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고 했다. 티 없고 순진한 우리 아이들은 이미 부활해서 주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은 사기꾼일수 밖에 없다. 주님께서 사기꾼이 아니시라면 분명히 아이들은 예수 오른편에 앉아 세월호 침몰과 사건 은폐에 책임 있는 자들을 심판하고 있어야 한다. 


▲ 014년 11월 2일 주보에 실린 바울로만평 ⓒ 박홍렬 작가


바로 지금 이 심판이 꿈속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히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4월 달에는 예수 부활 사건 때문에 죽음이란 단어가 감히 힘을 못 쓴다. 세월호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이제 산 자들의 몫이다. 죽은 사람들의 진정한 부활은 하느님의 몫이 아니라 죄업을 청산해야 할 우리들의 몫이다. 세월호 아이들을 통하여 우리의 벗이신 예수님께서 구원을 받으셔야 한다. 


용서와 화해는 찬란한 빛이 가득 찬 진실의 광장에서만 이루어진다. 정권의 은밀하고 밀폐된 밀실 안에서는 은폐와 조작만 난무한다. 그 어둠의 밀실 안에서 화해와 용서는 절대 나올 수가 없다. 4월은 잔인한 죽음의 달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죽음을 이겼다.


“공교롭게도 세월호 침몰 3주기인 이번 4월 16일은 ‘예수 부활 대축일’이다”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 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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