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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사제, 그냥 부족한 인간으로, 우리처럼 용서받은 죄인으로 모셔들이시라”
  • 전순란
  • 등록 2017-05-08 10:32:55
  • 수정 2017-05-08 10: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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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7일 일요일, 온종일 짙은 황사


공소 미사에 오신 장 신부님의 머리가 부시시하다. 우리 보스코도 나 없으면 밖에 나갈 때 딱 저렇게 하고 나선다. 머리에 젤을 발라 가름마를 타서 단정하게 빗어주면 유치원생 같이 얌전한 표정으로 씨익 웃고 집을 나선다. 어쩌다 내가 깜빡하고 그냥 나간 날 밖에서 만난 그의 머리는 태풍 속을 가르며 달린 우편배달부 같다. 


신부님 머리를 보며 혼자 웃었다. 당신이 지리산 속에서 안식년을 지내신다고 맨 날 찾아오는 손님들한테 불 피워 삼겹살 구워주고 같이 막걸리 마셔주느라 얼마나 피곤한지 입술이 다 터졌다며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딱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하신다. 그렇다. 안사람이 있으면 뭔가 돕고 일도 나누고 지지고 볶으며 모난 성격도 다듬어지니까 (둘이 사는 어려운 점도 있지만) 함께 산다는 게 인생의 짐을 반분하는 축복이다. 


아침에 '얌전히' 공소가는 보스코 




오늘은 ‘성소주일.’ 신부님 강론대로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젊은 사제들이 많지만 이탈리아만 해도 70대 초반 사제가 ‘젊은이’라 불리고 80~90대가 대부분이다. 가톨릭이 존재하는 한 미사든 고해성사든 사제(그것도 신자들이 원하는 독신사제)가 필요하니까 신부님들 위한 기도 열심히 하라신다. 혼자 사는 것만으로도 기특하니까 ‘혼자 살아서 성질 더럽다’ 욕하지 말라신다. 사제들에게 너무 많은 덕성을 요구하지 말라, 그냥 ‘부족한 인간’으로, 우리처럼 ‘용서받은 죄인’으로 받아들이라, 그 신부한테 더 바라는 게 있거든 그분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모나고 강인한 성격이 차라리 독신사제의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걷게 하는 저력 아니겠느냐는 호소 말씀이다. 


사제나 수도자가 받는 것만 성소가 아니고 우리 모두가 지금 이 자리로 불림받았다는 의식으로 최선을 다해 살라고도 하셨다. 어느 자리든 그 자리에 충실한 모습은 믿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라는 말씀이다. 장 신부님 강론은 짧지만 듣는 이들의 맘을 움직인다, 당신의 삶에서 우러나는 말씀이어서다. 


오늘은 5월 첫 주여서 각자가 한 가지씩 음식을 해 가져오니 공소의 아침상이 푸짐하다. 초대교회의 ‘성만찬’이 바로 이렇게 가진 것을 모두 내 놓고 나눠먹는 거였으리라.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는 더 촉촉해서 마음 바닥까지 잘 스며들어 공소 교우들의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한다. “좋기도 좋을씨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원선오 신부님이 작곡하신 성가다.


잠자리, 사마귀를 모두 대나무로 만들었다!



12시에 담양 ‘죽녹원’ 앞 전남도립대학 터에서 열리는 ‘담양 대나무 축제’에 갔다. ‘성삼의 딸’ 수녀님들이 6일간이나 축제에 부스를 차리고 당신들이 만든 비누와 식품을 팔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가까운 부스에서 ‘창평 국밥’을 함께 먹고 수녀님네 부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요 몇 달간 서로 못 만난 얘기를 들었다. 때로는 어렵지만 늘 하느님이 내어주시는 섭리의 손길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오묘한 과정을 들려주는 원장수녀님의 모습이 확신에 차 있어 미더웠다.


‘메타 프로방스’라는 유원지를 걸으며 서양에서는 저런 도시풍경이 천 년 넘는 삶의 터전인데 우린 급조해 세트처럼 지어놓고 서양 분위기를 풍기며 젊은이들을 불러 모아야 하는 문화의 빈곤을 절감하기도 했다. 함양의 눈꽃빙수인 줄 알고 시켰는데 그것도 짝퉁, 그냥 팥빙수에 우유만 뿌린 것이어서 다시 실망했지만 수녀님과 나누는 얘기가 좋았다.


돌아오는 길은 국도를 택하여 메타세코이아가 우거진 담양길, 산과 들을 감싸 안고 섬진강이 흐르는 순창길, 그 다음 남원과 함양의 꼬불꼬불 산골길을 돌고 돌아 휴천재로 돌아왔다.


꽃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넘어

그 어느 산 모퉁길에 어여쁜 님 날 기다리는 듯...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들 것일레라 (박화목, “망향”)


우리가 걸어온 인생의 산모퉁이마다 그분이 기다리고 계시다 반겨주셨고, 어려운 고비마다 떼쓰고 투정부리더라도 늘 먼저 가 기다리시는 분이 계시다는 걸 알기에 저 수녀님들도 저 길을 묵묵히 걷고 우리 부부도 이 길을 꾸준히 걸어온 고마움, 인생과 역사의 굽이가 그 분 손에 달렸기에 이 참에는 이 나라에 좋은 지도자를 주십사 하는 9일 기도의 8일째 기도가 저절로 입술에서 타고 흐른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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