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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어느 날 문득 남편에게 내미는 A4용지 다섯 장 분량의 실수견적서
  • 전순란
  • 등록 2017-05-15 10:3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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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4일 일요일, 맑음


작년에 마당에 가득한 둥굴레를 소쿠리로 가득 캐서 영심씨에게 주어 둥굴레 차를 덖으라고 했는데, 조금씩 남아 있던 잔뿌리에서 작년만큼 많은 둥굴레 순이 돋아 올라 꽃까지 조랑조랑 피었다. 생명이란 사랑이다, 그래서 징허게 질기다. 문교수님은 시내에서 돌아와 우리집 마당 입구에서 쌍문근린공원까지 연결된 숲을 올려다보면 해방감과 동시에 자연의 품에 안긴 듯 한없이 행복하단다. 작년 가을에 심은 패랭이 꽃도 창문 밑에 자리를 잡고 유유자작 봄을 누린다.




오늘은 유무상통에 계신 엄마를 찾아뵙기로 한 날. 어디서 미사를 드릴까 궁리를 하다가 엄마네 집 가는 길에 함신부님 댁에서 11시에 가족 미사가 있다고 해서 우리 집에 임시 가족이 된 문교수님과 함께 집을 나섰다. 


네비를 찍고 가는데 네비한테 밀려 조수직을 잃은 보스코가 케케묵은 옛 버전으로 구두로 길안내를 한다. 가만히 앉아있든지 아니면 자기가 운전을 하든지 하라면 5분쯤 있다 다시 네비 방송을 시작하는데 특히 다른 사람이 동승을 하면 그 증세가 더 심하다.


우리 둘이서 ‘직진’ ‘오른쪽’ ‘왼쪽’으로 의견이 분분하게 티격거리다 보니 뒤에 앉은 문교수님이 “장가 안 가길 정말 잘했다”는 표정. 이렇게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일을 안 해봤으니 그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그는 모른다, 장가 안 가본 까닭에. 이렇게 안하고 한 10년 조용히 남편한테 눌려 지내다 어느 날 A4용지 댓 장 분량의 경고견적서(남자가 그간에 저지른 모든 과오와 잘못, 실수와 서운했던 점까지)을 내밀고 보스코에게서 백기 항복을 받고 남을 여자가 전순란이다.



함신부님 댁에 가니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데리고 두 가족이 도착하여 작은 경당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말씀을 함께 읽고 묵상을 하고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니 이런 소공체의 나눔이 얼마나 값진가 절감했다. 특히 오늘 김영준씨 딸 세희씨가 결혼한 결혼식장 옆의 무지막지하게 큰 ‘사랑의 교회’를 보니 그곳엔 절대 그리스도가 머물 자리가 없고 우선 그리스도가 필요치도 않을 성싶다.


초대교회에서 처음으로 사도들을 돕는 부제(집사)를 뽑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들으며 신부님을 돕는 문부제님을 보니 감격스러웠다. 사제직을 받겠느냐는 주례자의 질문에 33년간 답변을 가슴에 묻어 두었다가 이제야 종신부제로 살겠다고 “예”라고 대답하는 질긴 사람, 틀림없이 남은 날들도 오늘 우리 마당의 둥굴레처럼 징허게 잘 살 꺼다.


말씀의 성찬이 끝나고 우리 모두는 함신부님 단골 만두집에서 나약한 인간의 몸을 위해서까지 마련해 주신 오찬을 나눴다. 그 중 한 애기엄마는 얘기를 나누다 보니 빵기의 서강대 국제대학원 동기라고 해서 우리 아들 보는 듯 반가웠다


오후 2시 보스코의 고등학교 동창이며 보스코의 책을 다섯 권이나 출판해준 김영준씨의 딸(출판사 경세원의 실질사장) 세희씨가 드디어 결혼을 했다. 예전에 최행두씨는 딸이 시집가던 날 줄줄 울었는데 오늘은 신부 아빠는 덤덤하고 오히려 엄마가 운다. 딸이 없는 우리로서는 울 일이 없었는데 담에 만나면 그 기분을 찔러 봐야겠다.



결혼식장까지 직접 온 김경석 대사님 부부를 만나 지난 3년간 교황청 대사직을 지내고 온 경험담을 재미있게 나누었다. 보스코가 제10대 대사, 김대사님이 13대 대사님이다. 지난 연말에 직임을 마치고 귀국한 참이다. 구하기 힘든 카르쵸프(엉겅퀴꽃) 커다란 통조림을 선물 받았다.


유무상통에 오니 6시가 넘었다. 만두 참외 케이크를 내놓고, 촛불을 켜고 뒤늦은 어버이날을 기념하여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노래를 부르니 엄마도 큰 소리로 따라하신다. 엄마는 무엇을 생각하며 이 노래를 부르셨을까? 당신에게도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이나 하셨을까? 아마 모든 것을 잊으신 엄마의 머리속에는 생각이나 기억의 방문들이 모조리 굳게 잠겨 있고 열쇠마저 잃어 버렸을 게다. 그런데 오늘밤엔 엄마가 내 이부자릴 펴주신다. 어, 이건 또 뭐지? 어느 기억의 창문이 빼꼼히 열린 것일까?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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