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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배)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자
  • 김웅배
  • 등록 2017-07-19 11: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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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무도한 정치권력의 작동 원리를 조직 폭력배들의 논리로 설명을 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도 조폭처럼 은근한 공포로 모든 사회 분야를 통제한다. 


따라서 공포스럽기도 한 부당한 권력 앞에서 대항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안다. 경제 권력의 갑질, 공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학계, 스포츠계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그 상위 집단의 전횡을 우리는 그동안 익히 보아왔다.


꼬.리.자.르.기


이런 상황에서 윗전의 부당하고 범죄적이기까지 한 암묵적 지시를 받은 하부 구조는 서로의 책임을 분산시키며 그 지시를 성실히 수행한다. 다행히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진행되면 그 수행 성적에 따라 논공행상이 벌어진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부당함이 탄로 나면 조직 폭력배들의 논리로 마무리 된다. 곧 꼬리 자르기다. 


▲ ⓒ 최진


아마 인간의 흑역사 안에는 모르긴 해도 이러한 디테일이 차고 넘칠 것이다. 정치적 모든 영화 드라마 소설 등에 이 디테일이 들어가지 않으면 스토리텔링이 안 될 정도다. 대다수의 액션 스릴러 영화는 잘린 꼬리가 결국은 산 머리를 끝장내는 내용으로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한껏 고조 시킨다. 드라마투르기 상 이렇게 상투적인 소재도 많지 않다.


살인 교사죄와 교사에 의한 살인죄는 법조문에 의하면 동일한 형량으로 처벌한다. 그러나 같은 형량일지라도 그 죄질은 살인 교사죄가 살인죄보다 더 클 수 있다. 살인 교사를 하는 자는 압력이든 돈이든 미끼를 걸고 제거 대상을 손봐줄 자를 고용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확실한 인과관계의 고리를 검찰이 알아낸다면 법정에서 다툼이 있을 리 없다. 문제는 교사를 했다는 증거가 확실치 않을 때 복잡한 양상이 전개된다. 교사를 하는 자가 빤히 보이는 순서대로 고용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부당한 일을 저지르려는 자들은 거의 100%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한편 꼬리를 자처하는 자들은 어떠한 구체적인 지시가 있기 전에 알아서 윗전의 심경을 읽고 죽기 살기로 그 일을 수행한다. 중간 보스는 적당히 돌아가게 윤활유만 바르면 된다. 거의 점조직이나 다름없이 운용되어 윗전의 의도가 노출이 안 되도록 주도면밀하게 움직여 아래와 위가 전혀 연결이 안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전형적인 조폭들의 생존 전략이다. 이 구차한 전략을 벤치마킹한 것이 이명박근혜 정권이었다. 우리의 대단한 정치권력은 이러다가 들킨 일들은 모두 ‘개인의 일탈’이라고 칭해 왔다.


▲ 이홍원 작가의 문신-그 이야기의 신작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이러한 인간의 행태를 일찍이 파악하신 예수님께서 가만히 계실리가 없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 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 사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불구자나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마태 18, 6-9)


인간의 신체를 두고 이러한 ‘막말’을 우리끼리 한다면 아마 모욕죄로 고소를 당할 지도 모르겠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다.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위선적 행태를 벌인 당시 사제들과 바리사이에 대한 질타인 동시에 현재를 사는 여러 형태의 ‘권력자’ 들에게도 엿을 먹이는 아주 처절한 말씀이다. 


먼저 예수님은 이러한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신다. 그러면서도 단호히 말씀하신다. ‘남을 죄짓게 하는 자’ 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자’를 선별해서 꾸짖으신다. 죄의 경중을 떠나서 ’남을 죄짓게 하는 자’는 상대적으로 누구인지 알 수 있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자’는 당연히 베일에 가려져 있어 더욱 음험하다.


대선이 끝나고, 때가 되어 가라지가 들통이 났다. 


막강한 대선 후보를 내고 국민만을 바라보며 가겠다던 당이 바로 이런 일을 저질렀다. 스스로 잘못했다고 자백하면서 확성기를 크게 틀어 놓았던 자들이 연자매를 목에 걸기는커녕 손톱 아래 끼인 가시만 빼려고 요리조리 눈치를 보고 있다. 그 행위 자체가 후안무치의 극치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라도 위기를 벗어나려 한다. 필설로 표현할 수도 없는 무지몽매한 정권을 촛불로 몰아내고 치룬 대선에서 이렇게 분탕질을 저지른 정당이 이 땅에 버젓이 있을 수 있다니!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전도 모자라 사건을 아예 조작하여 공표하는 배짱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과거 무소불위의 흉악한 정권의 비호 아래 상존하던 일이, 같이 공조해야 할 야권에서 일어났다는 자체가 정말 황당무계하고 더더욱 한심한일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자는 절대로 남에게 죄를 지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상한 얼굴과 미소로 교묘히 판을 깔아놓는다. 전부터 물고 늘어진 상황이었다. “모든 것은 완비되어 있다. 결정적인 것 한 방이면 끝난다” 그러나 절대로 한 방을 만들라고 지시할 리가 없다. 표정은 웃어도 되고 수심에 찬 얼굴로 있어도 좋다. 뭔가 지긋이 수하를 바라보는 사랑스런 눈빛만 보여도 되고 넌 참 큰일을 할 수 있는 재목인데… 라는 제스처만 취해도 된다. 그래서 결국 일이 벌어졌다.


권력의 위계 안에서 수행자들은 이러한 죄짓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죄를 질 수밖에 없는 토양 안에서 간접적인 무언의 압박에서 벗어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죄진 자들의 죄가 경감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로 인해 ‘죄지음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질책은 말씀 안에 없다. 남을 죄짓게 만드는 자들이 훨씬 사악하다는 뜻일 것이다. 


과연 ‘죄짓게 만든 토양’을 일군 윗분들은 이 마당에 머리에 재를 뿌리고 베옷을 입고 석고대죄를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 이 윗분들이 하고 있는 행태들은 또 뭔가? 남에게 뒤집어씌우기에 아주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 13, 39-43)


대선이 끝나고, 때가 되어 가라지가 들통이 났다. 그것도 스스로 ‘나는 가라지’라고 천하에 알렸다. 시퍼런 낫날이 목줄에 다가와 어쩔 수 없긴 했지만. 그 가라지의 씨는 악마가 뿌렸다. 아니 정확히는 악마의 유혹으로 뿌렸을 것이다. 세상 종말의 맥락을 예언한 예수님의 가라지 비유에서 결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자보다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을 우선적으로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라고 통렬히 비판하고 또 경고 하신다. 


▲ ⓒ 곽찬


그러나 아직 기회는 있다.


하늘나라는 결코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이고 누룩이다. 여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이며 아주 작은 겨자씨를 뿌려 큰 나무로 키워 새들도 깃들게 하는 곳이고 누룩으로 부풀려진 빵을 맛있게 구워 먹는 곳이다. 


하늘나라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도 세상 종말의 불구덩이를 우리가 자초하여 만들고 있고 그 불구덩이 속에서 울며불며 이를 갈고 있는 자들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세상에서 정치를 하는 자들에게 겨자 씨 같은 존재 혹은 누룩 같은 존재가 되라고 강요도 할 수 없지만 그들이 남에게 죄짓게 하거나 죄를 짓게 하는 일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세상 종말에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불구덩이에 던져 버리겠다는 예수님의 ‘막말’에 가까운 협박이 제발 그들에게 통했으면 좋겠다. 민초들이 짓는 죄는 자신과 주위에 한정된 영향을 주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이 남에게 죄짓게 하는 일은 그 후과가 너무 광범위하고 저열하다 못해 참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아직 기회는 있다. 만약 자신의 손발이 죄를 지었다면 그 손발을 자르듯이 거기에 상응할 만한 큰 결단을 내리면 전화위복의 호기가 될 것이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를 때이기도 하다. 그들의 문 앞에 지금 ‘불구덩이’와 ‘하늘나라’가 동시에 벨을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 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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