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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배)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 김웅배
  • 등록 2017-09-29 10:12:11
  • 수정 2017-09-29 14: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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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존재감 사라진 야당 국회의원이라는 자가 최근 이명박의 국정문란과 국정원 대선 개입비리에 검찰의 칼끝이 다가오자 그들의 상투적 수단인 ‘물타기’를 시전 했다. 뜬금없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정치보복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의 비리 문제로 부부가 싸움 끝에 일어난 결과라는 말을 SNS에 흘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폄훼한 것이다. 이 말을 흘린 자는 부부싸움 끝에 자살도 생각해 본 적이 자주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가볍지가 않다. 자살 충동이 일어난다고 다 자살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살을 했다하여 그의 전 인격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또한 어느 경우라도 망자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욕보이지 않는다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기본 도리다. 


▲ 지난 5월 22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8주기 추도식에 150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사진출처=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 영상 갈무리)


모든 피조물은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도 각자의 존재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식을 무시하고 스스로 자신의 품격을 깎아내리는 언사를 마구 던지는 자가 이명박 정권의 한 축을 담당했었다는 것이 우리에겐 비극이다 못해 희극이다. 그의 목불인견의 저급한 언사는 자신들의 비열한 정치 공작과 부패비리를 물타기 해서 그것을 일반적 정치 행위로 호도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이명박 정권의 전방위적 비리와 사악한 공작으로 인해 온 국민이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 사례가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솟아 나오는 상황을 어떻게든 비틀어보려고 전전긍긍하는 행태가 눈에 훤히 보인다.

 

사실 그들의 정치적 존재 이유는 지난 대선과 함께 사라졌어야 했다. 해괴한 정권만 몰아냈지 정권의 공범자와 하수인이 돼버린 국회의원을 심판 하지 못한 후과가 지금 어지러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의 여당이었던 야당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면서 비루하게 정치 생명을 잇고 있는 자신들의 주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에 대한 수사를 신중히 하라며 정치보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그는 국민의 눈과 생각을 너무 과소평가 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범법자에 대한 모든 수사는 신중해야 한다. 합법적 시위조차 불법으로 몰아 민초들을 고소 고발하고 함부로 수사해서 괴롭혔으면서, 유사 이래 가장 큰 범죄의 혐의가 짙은 이명박은 대통령을 지냈기 때문에 수사를 신중히 해야 한다는 말인가? 어느 누구도 법을 어기면 그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전두환은 자신이 죄가 없다고 지금도 강변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무죄로 판명이 났는가? 박근혜는 지금 왜 재판을 받고 있나?

 

더구나 그러한 막말에 대한 비난이 봇물처럼 터지자 해명을 한답시고 한 술 더 떠서 고인의 유언을 함부로 들먹이며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왜 원망을 하며 정치보복을 하려드냐는 투로 오히려 적반하장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어쩌다가 이런 구상유취한 궤변만 늘어놓는 비상식적 괴물이 탄생했을까? 도대체 상식과 몰상식을 구분 못하고 인륜조차 내팽개친 자의 헛소리가 왜 전파를 타야하며 우리 소시민들의 귀에까지 들려야 하는가?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는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유서 중에 한 구절이다. 그의 고뇌 섞인 이 말은 아래의 성경말씀과 꽤 흡사해 보인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38-39,43-44)



그리스도교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말이 ‘원수를 사랑하라’와 ‘오른 편 뺨을 맞으면 왼쪽 뺨도 들이대라’이다. 이 말은 서력 기원 후 전세계의 모든 인문학과 신학적 사유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옛 유다인들의 습속에 따르면 다른 뺨도 돌려대라는 말의 뜻은 때리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한다. 


맞는 사람은 피해자다. 때리고 있는 자는 가해자이며 악인이다. 그 악인이 피해자를 향하여 원망하지 말라라고 하는 말은 조폭영화 같은 데서 깡패가 피해자에게 ‘나를 원망하지 말고 네 처지를 원망해라’ 라는 말의 논리와 다름이 없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향하여 피해자의 선의를 강요하고 있으니 그의 논리는 무지몽매한 깡패의 논리 그대로이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는 말은 피해자로서 조용히 안고 가겠다는 인간적이고 수동적인 체념의 말이지 용서를 했다는 뜻도 아니다. 더군다나 그 말을 받아 가해자가 감히 피해자에게 할 수 있는 말도 절대 아니다.

 

그 가해자인 원수가 피해자인 상대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니 나에게 원수 갚을 생각일랑 하지말라고 하면 그게 타당한 상황이 될까? 우리는 어쩌면 이런 부조리한 세상만을 계속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학살의 수준으로 제나라 백성을 죽여 놓고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두눈 부릅뜨는 자가 있는가 하면 부정 축재의 원흉이 도덕적으로 살아왔다고 큰 소리를 치거나 온갖 비리를 저질러 놓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자신의 목을 내놓겠다며 종주먹을 들이대는 후안무치의 행태가 몸에 배인 나머지 이젠 아예 대놓고 피해자에게 덮어씌우고 있다.

 

죽음을 앞둔 한 자연인으로서 숙명적 전인적 통찰로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함축적인 표현을 유서에 남긴 것을 이런 식으로 전도 시키는 그 레토릭이 비열하기 짝이 없다. 누구도 원망 말라고 했으니 그렇게 하라는 이 무지막지하고 천하에 몹쓸 가해자의 말 속에는 이미 자신들의 잘못이 은연 중에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인간의 품격이 무엇인지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그 사고 자체를 포기했다.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을 자신의 저열한 수준으로 창작하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스스로 정치인이라고 여기는 작자가 공중을 상대로 한 변이라기에는 너무 허접스럽다. 어찌됐던 한 때 국가를 책임졌던 대통령의 죽음을 그런 구차스런 말로 낮추면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이 높여질 거라는 박테리아 수준의 단견을 보인 것이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다. 그들의 민낯이 국민들에게 더욱 확실하게 보였고 따라서 더 이상 그들의 상스러운 말이 지상에 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 지난 20일,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부부싸움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이 담긴 글을 SNS에 남겼다. (사진출처=정진석 의원 SNS 갈무리)


이 저열한 정치인은 어찌됐던 사회의 큰 파장을 일으켰으니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자존감과 천부적 존엄성에 대한 역린을 건드리는 큰 실수를 범하고야 말았다. 이런 자들이 보수를 참칭하고 있으니 이 나라 보수의 앞날이 까마득하다. 그는 단언컨대 정치인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다. 진정한 보수 정치인은 이렇게 얘기해야만 했다. “이명박 정권의 잘못이 밝혀진다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과거 대통령의 죽음을 원한으로 삼아 정치보복을 해선 안 된다.” 딱 여기까지만 얘기한다면 보수의 품격을 충분히 보인 것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 말은 실정법에 대한 구약시대의 근본 법정신이다. 바로 ‘동해보복(同害報復)’의 원칙이다. 이에는 이에 상응하는 처벌만 하면 된다. 과도한 처벌을 할 수 없다. 완벽한 국가체제를 이루지 못한 고대 사회에서는 아주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에 이로 갚는 대신에 아예 그 가해자를 사랑하라고까지 하신다. 이 말씀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좀 불편하고 어정쩡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 어정쩡한 틈새를 이런 통탄할 막말을 하는 자들이 기생하며 국회의원 노릇을 하고 있다. 이 당의 대표라는 자부터 민초들을 배려하는 진정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형편없는 막말로 그 스스로 인간의 품격을 포기한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다른 말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노 전 대통령의 피아를 구별하지 말고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말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처연함과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보복은 말할 것도 없고 원망조차 하지 말란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약속의 시대, 예수님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동해보복’의 원칙을 깨부쉈다. 게다가 그 누구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노 대통령보다 한 수 위이신건 분명하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토를 달아야 이해한다. 네가 행복해지려면 억지로라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그 말씀 그대로 우리가 도저히 행할 수 없다는 것도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이미 잘 아실 것이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요한 2, 25)

 

그래서,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적어도 이 자가 포함된 집단에게 만큼은 구약시대처럼 더 이상 더 이하도 아닌 그대로 ‘동해보복’의 원칙을 적용 해주십사고 예수님께 간절히 빌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 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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