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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 지성용
  • 등록 2017-12-19 12:50:03
  • 수정 2017-12-19 14: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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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를 다듬은 글입니다.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매주 화요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창세기 4장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뭇 의미심장하다.


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 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 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카인이 땅의 소출을 바쳤다는 것은 정착생활을 하며 농경생활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아벨은 양떼를 운영하는 목축생활을 해 온 것으로 사료된다. 정착과 목축은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정착은 일정한 거주지를 가지며 ‘소유(having)’를 근간으로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이 형성된다. 반면 목축은 양떼들에게 풀을 뜯어 먹이며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정착이 불가능하며 거느리고 있는 가축들의 수효에 따라 이동하는 반경의 크기도 달라졌을 것이다. 곧 아벨의 삶은 ‘존재(Being)’하기 위한 삶이다.


‘소유’는 비교와 경쟁을 유발한다. 비교와 경쟁을 통해 우위를 가르고 우월하면 더 많이 소유할 수 있고, 열등하면 덜 가지게 만든다. 덜 가지게 되면 더 가진 자를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고, 그것은 미움과 원망, 분노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이것은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더 많이 가진 공동체와 적게 가진 공동체 간에 다툼과 분쟁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 가뭄과 빈곤이 생겨나면 전쟁과 약탈 폭력과 야만이 세상의 지배원리가 된다. 


반면 ‘존재’를 위한 삶은 협력과 공존을 위해 나눔과 배려의 문화를 발전시킨다. 그들은 동물들과 함께 이동하면서 광야의 삶을 살아야 했다. 광야는 밤이 되면 생존에 위협을 느낄만한 것들이 가까이 다가온다. 야생의 맹수들과 독충들과 독사들이 잠들어 있는 사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어떤 해를 가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밤이면 서로 파수를 세운다. 새벽이 되어 생명 을 위협하는 것들이 사라질 때까지 불침번을 서며 서로를 지켜주고 서로의 온기로 천막 안의 쾌적함을 유지했던 것이다. 함께 먹고 나누고 이동을 위해 필요한 물건 외에는 더 많은 짐과 소유를 만들지 않았다. 하느님은 이러한 아벨의 삶을 선택하신 것이다(R. De. Vaux).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소유냐 존재냐』 라는 저서를 통해 산업시대를 환상의 종말로 표현했다. 위대한 약속의 영광, 산업시대의 놀라운 물질적·지적 성취를 마음에 그려봄으로써 비로소 그 실현의 실패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 일으키고 있는 충격을 이해할 수 있다. 산업시대는 결국 이 위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데 실패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 『소유냐 존재냐』의 저자 에리히 프롬.



오늘날 세상에 만연한 중대한 위험이라는 소비주의처럼, 현실에 안주하려는 세상 분위기뿐만 아니라 탐욕스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황폐함과 번뇌, 가벼운 쾌락에 대한 무절제한 추구, 그리고 무디어진 양심은 현대사회의 위험 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이익과 관심에만 몰두할 때,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자리는 그의 마음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습니다. 하느님 사랑에서 오는 고요한 기쁨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습니다. 선한 일을 하려는 의지는 사라집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도 실재적인 위험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것에 걸려 넘어지고 후회하고, 분노하고 냉담해집니다. 이것은 결코 존엄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심에서 나온 성령 안에서 사는 삶도 아닙니다(2항).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귀한 사상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삶에 새로운 지평과 결정적 방향을 주는 하나의 사건, 한 사람과 만나는 것입니다.”(7항)



모든 욕망의 무한정한 충족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그것은 또한 행복에 이르는 길도 아니고 최대의 쾌락에 이르는 길도 아니다. 자기의 독립된 주인이 된다는 꿈은 우리의 사상, 감정, 취미가 정부와 산업, 그리고 이들이 지배하는 매스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조종되며, 우리는 모두 관료적 기계장치 속의 톱니바퀴가 되었다는 사실에 우리의 눈이 뜨이기 시작하면서 끝나버렸다.


경제발전은 여전히 부국에 국한되어, 풍요한 국민과 가난한 국민들 사이의 간격은 계속 벌어져 왔다. 기술발전은 생태학적 위기와 핵전쟁의 위험을 만들어냈으며, 이중 어느 하나, 혹은 이 둘이 합세하여 모든 문명, 그리고 어쩌면 모든 생명에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시대, 인류의 ‘진보’ ‘발전’이라 일컬어지는 놀라운 비약의 시대에 왜 우리는 더 큰 빈곤과 어려움을 고백하고 행복해 하지 못하고 자살과 우울에 빠져드는가? 프롬은 현대인들이 인생의 목적을 사람이 느끼는 어떤 욕망이나 주관적 욕구의 충족으로서 정의된 행복, 즉 ‘최대한의 쾌락’에 두고 있다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보고 있다. 곧 인간의 행복은 욕망의 충족이나 쾌락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행복’ 하다는 것이, 나의 욕구를 채우고 쾌락하는 것만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생활문화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 먹는 것, 노는 것, 즐기는 것에 대한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 산에 오르는 것은 무척 힘들지만 올라서 바라보는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과 환희는 저 어두컴컴한 맥줏집 담배연기 속 우울한 주제보다는 백배 행복한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또한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 그리고 탐욕의 체제가 하느님께서 만드신 조화와 평화를 깨트렸다고 본다. 카인은 ‘나’ 입장에서의 성찰이 없다. 나의 삶에 대한 성찰 없이 비교하고 아벨을 살해한다. 아벨은 나에게 그저 달갑지 않은 존재, 나의 사랑을 가로챈 경쟁자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경쟁을 근간으로 사회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일찍이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자본을 움직이는 동력이라 말한 바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사교육시장이 과열이다. 비정상적으로 과열되어 있다. 부모들의 이러한 무모한 노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쟁에서 내 자식이 지지 않고 승리하기를,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먹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생존에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그들을 기다리는 끊임없는 경쟁들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온전하게 지켜주지 못한다. 거기에서 인간성은 파괴되고 협력과 공존의 가치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불평등한 현실도 바라보아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풍요로 물질을 낭비하며 음식을 버리고, 넘쳐나는 것들을 다스리지 못하는데, 다른 한쪽 아프리카와 중동의 지구 어딘가 에서는 전쟁과 기아, 가난과 질병으로 아이들이 죽어가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니. 지구는 모순덩어리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자리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느님은 사랑이신데(1요한 4,16).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어쩌면 이러한 문제의 해답에 대한 실마리를 우리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시작 부분에서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사악한 면들은 우리의 어두운 무의식이 드러나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순과 의식을 들여다보라는 엄중한 경고임에 틀림없다. 우리 안에 있는 거짓과 교만, 이기심과 탐욕, 살인충동과 분노, 모순과 더러움을 올바로 바라 볼 수 있어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순환의 원리, 생명의 선순환과 인생에 대한 유연함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의 도움으로 우리는 내가 잘 알고 있는 마음(의식)도 있지만,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마음(무의식)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이 내 뜻대로 움직여 지지 않으니 ‘불안’과 ‘우울’이 ‘나’를 지배 한다. 우리는 어느 때 보다 더 많은 통신비를 지출하면서도 메일과 메신저, 문자메시지를 날리면 날릴수록 더욱 더 외로워지고 공허해 진다.


깨달아야 한다. (나의)적을 소멸시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적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 왜냐하면 그 적은 내 안에 있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가정 우리사회가 이렇게 병들어 있어도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잊었던 공동체의 가치, ‘하느님과의 만남’을 복원하여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숙고해야 한다. 1등도 요즘 같은 경쟁체계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다. 경쟁의 쳇바퀴에 빠진 지옥에서 우리를 건져내려면 맹목적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 기쁨이 있는 공동체를 찾아 들어가야 한다. 때로는 우리가 그러한 공동체를 건설해야 하는 사명도 가지게 된다.



풍성한 친교로 활짝 피어나는 하느님 사랑과의 만남 – 다시금 새로워진 만남 –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편협함과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인간 그 이상이 될 때, 즉 존재의 가장 온전한 진리에 닿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를 초월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을 허락할 때에, 우리는 온전하게 인간이 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복음화를 위한 모든 노력의 근원과 영감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에 의미를 주며 마음속에 머무르는 사랑을 받았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못 하겠습니까? (8항).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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