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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본적을 경기도에서 전라도로 옮긴 사연
  • 전순란
  • 등록 2018-01-17 10:25:25
  • 수정 2018-01-17 11: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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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5일 월요일, 맑음


눈이라도 내리면 떠날 길이 어려울까 뜰에 나가 살폈다. 시나브로 내리는 비에 이미 내렸던 눈이 촉촉이 녹아들고 있다. 디딤돌에 얼어있던 얼음도 저절로 녹아서 사라지고 화산석의 까맣고 단단한 겨울이 거기 웅크리고 있다. 집을 놓아두고 가는 마음은 편치 않다. 2층은 13도로 맞추고 아래층은 화분들이 있어 17도로 해 놓았다. 지리산 휴천재는 진이 엄마에게 집안을 20도로 해달라고 부탁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집사가 미처 입주하지 않은 서울 집은 그냥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마당을 지나 나오면서 성모님께 “집 좀 봐 주세요.”라고 부탁드렸기에 염려도 거기 두고 대문을 닫는다.



집을 나서며 골목끝에 붙여둔 ‘빵기네 집’ 문패 앞에서 어제 있던 일이 생각난다. 길에서 사진이 스무 개 넘게 담긴 봉지를 주웠다. 고등학생 쯤의 독사진 같은데 사진마다 머리색과 옷이 달라 ‘이 사진 뽐내며 찍느라 돈 깨나 썼겠다’ 싶어, “사진 주인 찾아 가시오!”라고 써 붙였는데 오후가 되도록 찾아갈 기미가 안보였다. 


때마침 골목으로 지나던, 목하 연애중인, 효문고 학생으로 보이는 둘에게서 이 동네에 산다는 대답을 듣고서 “그럼 이 사진 학교에 가져가 주인 좀 찾아 주라” 했다. 둘의 대답이 “얘, 연예인이예요!” “헐~” 그래서 사진을 뜯어내 여자애에게 내밀며 “참 잘 생겼지, 너 가져.” 여자애는 난감해하며 남자친구 눈치를 보며 “됐어요”란다. ‘그렇지 막 시작한 연애에 이 할메가 초칠 일 있나’ 싶어 남자애에게 “그럼 너 가질래?” 했더니만 “아뇨.” ‘그렇지 라이벌 될 수도 있는데 사진을 가져갈 리 없지’ 싶어 “맞아, 네가 훨~ 났다, 얘보다. 그럼 사진은 나나 가져야지, 울 냄편 질투는 안 하겠지! 너네들 헤어지지 말고 끝까지 잘 지내!” 사진을 뜯어내며 셋이 한참 웃었다, 연예인을 구분 못하는 할메와 두 청춘이!



11시에 ‘작은 안나의 집’에 계신 방상복 신부님과 새해 인사를 나누러 찾아갔다. 집안의 재산을 종자돈으로 하여 ‘유무상통 실버타운’과 ‘작은 안나의 집’, ‘베드로의 집’ 등 무려 10여 개의 노인복지재단을 만들고, 때가 되자 모든 사업을 교구에 인계하고 서둘러 은퇴하고서 당신도 장애 등급을 판정받아 (파푸아뉴기니아에 선교사로 가셨다가 말라리아로 인해 청각 기능을 잃었다.) 지금은 당신이 만든 ‘작은 안내의 집’ 식구로 거주하신다. 


교구로부터 일체 지원 없이, 아니, 오히려 방해를 받으면서(그런 구박을 받을 적에 보스코가 개입한 적 있다) 집안 재산과 개인 노력으로 평생 일궈놓은 사업체들을 선선이 교구에 내어놓고 당신 말씀대로 ‘다른 치매노인들처럼’ 순박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가톨릭사제로서의 증거가 되고 남는다. 개신교에서는 명성교회처럼 아들에게 세습하려는 아버지 목사님의 욕심에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우리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신부님이 옛날부터 잘 아는 신안나라는 분을 오라고 했단다. 좋은 분이라고, 나와 나이가 엇비슷하니 좋은 친구로 맺어주고 싶으셨단다. 온 김에 며칠 전 개통한, 문막 간현관광지 소금산의 ‘출렁다리’를 구경가자신다.


안나씨의 차량으로 한 시간쯤 달려가 유원지 주차장으로 들어갔는데 월요일인데도 차를 세울 자리가 없어 길가에 아담한 장소에 다소곳이 주차를 하고 데크 계단을 10여분 올라가 출렁다리를 건넜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40mm 특수 도금 케이블 8겹’으로 만들어져 70kg 몸무게의 성인 1285명이 동시에 통행할 수 있다!‘는 광고에 그냥 건너기로 했다. 


산봉우리까지 올라간 신부님은 허약한 심장에 무리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드는지 우리만 건너갔다 오란다. 젊어서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도 딴 분이니 이 정도 출렁다리 건너기가 무슨 대수겠는가만 건강을 조심해야 할 처지가 되셨다.




오가는 찻길에 당신이 전라도로 본적을 옮긴 사연을 들려주신다. 옛날 당신 지인이 삼성에 근무하다 높은 자리까지 올랐는데 하도 전라도 푸대접을 받아 본적을 파 옮기고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서 우리나라 고질적 지역감정에 치가 떨리더란다. 그래서 방신부님은 부친이 돌아가시자 ‘방상복’이라는 이름을 ‘방구들장’으로 개명하고 본적을 경기도에서 ‘전남 장흥’으로 옮긴 일화를 들려주셨다. 




빵기가 자랄 때 “네 고향은 광주다. 네가 ‘빛고을’ 광주의 아들임을 잊지 말고 자랑스러워하라!”고 가르쳤던 일이 기억난다. 우리 친정에서도 나 어렸을 적에 "전라도 것들은 씨를 말려야!"라는 말이 예사로 나왔고, 내가 보스코와 결혼하여 호적상 ‘전라도여자’가 되자 주변에서 쏟아지던 엄청난 푸대접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사회정의를 위한 보스코의 모든 노력이 교회 안에서마저 “전라도 사람이어서…”라고 비난받던 상황에서 저 지역감정을 당신 본적을 옮겨서라도 바로 잡아보려 했던 한 사제가 참 돋보인다. 


작은안나의 집에 돌아와 저녁을 얻어먹고서 유무상통에 도착하니 문들은 닫히고 불들은 꺼지고 그야말로 한 밤중이다. 저녁 7시밖에 안되었는데… 노인들의 시간은 일찍 어두워진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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