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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잘 지키는 모범신자로는 부족하다
  • 지성용
  • 등록 2018-03-12 10:27:27
  • 수정 2018-04-17 11: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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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17년 4월에 발간된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 가운데 일부입니다.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매 주 월요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가톨릭교회를 선택한 신자들은 타종교에 비추어 알 수 없는 종교 선택적 우월감을 가진다. ‘나는 가톨릭 신자인 것이 자랑스럽다’, ’그래도 가톨릭이 제일 깨끗하지 않느냐’라며 안심한다. 그리고 신자로서 일정액의 교무금과 감사헌금, 건축금 등을 내고 교회의 정해진 전례에 잘 참여하고,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특별히 교회법에 저촉되는 일 하지 않고, 본당에서 주어진 봉사에 열심하다면 신자로서 문제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교회를 유지하는 측면에서는 신자들이 이렇게만 한다면 모범신자 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실천한 사랑’에 대해서 심판 받게 될 것이라 예수의 대 데레사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단순히 모범신자로는 분명 부족하다.



가톨릭교회는 모든 것이 정형화, 제도화 되어 있다. 『가톨릭 기도서』에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기도해야 하는 양식과 기도문이 정해져 있다. 가령,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할 때도 기도문이 정해져 있고, 그 기도문을 읽어 내려가면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이번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예수의 삶을 의미 있게 바라보는 기회가 되었느냐가 아니라, 또 그 분과 함께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이 지금 나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주는가 보다는 성금요일 예식에 참여 했는가 아닌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절박한 생계 문제로 주일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소규모 중소상인이 늘 가슴을 치며 미사에 가지 못하는 것을 죄스러워 하는데, 성사표를 가지고 온 구역장님의 “이번에도 성사를 보지 않으면 냉담자 처리가 된다”는 싸늘한 말에 또 한 번 마음이 무너진다. ‘먹고사는 문제’가 절박하여 냉담자로 분류되고 신앙을 포기하는 신자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주일에 성당에 나와 하는 모임들은 동네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이다. 여기에라도 나가지 않으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신자들에게 사회 안에 있다는 안전장치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의 입장에서 ‘무임승차’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정해진 규칙에 충실하지 않은 이들, 주일미사에 참여하지 않고, 교회에 시간이나 물질로 기여하지도 않는데 우리와 같은 혜택을 누리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서서히 판단과 심판을 가해 공동체의 희생양을 만들기도 한다. 


마음속에 있는 존재의 불안과 해결되지 않는 감정들을 투사할 대상을 찾아(흔히 공동체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든다) 뒷담화를 시작한다. 가톨릭교회 뿐 아니라 유독 한국사회는 일명, 이웃사촌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 그것은 그들의 삶의 어려움이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한 이스가리옷 유다처럼 나의 행복과 안전에 대한 바로미터로써 타인을 바라보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왜 한국인들은 연예인들의 뒷얘기에 이리도 흥분할까? 왜 유명인들의 개인 생활에 지독히도 관심을 가질까? 왜 사제들에게 이리도 많은 의존과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은 어떻게 흐르고 있는 것일까? 한국인들은 관계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나치게 현세에 집착 한다. 그리고 무심한듯하지만 자신이 베푼 것에 대한 보상을 틀림없이 기대한다.


아는 이에게는 각별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각박한 집단의식을 기반으로 한 관계주의의 원형은 혈연중심의 친족주의, 자기 식구를 우선시하는 가족주의로 응축되어 우리 사회 도처에 재현되고 있었다. 끈끈한 가족애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출생의 비밀을 소재로 한 드라마의 성행, 인사청문회에서 늘 문제가 되는 위장전입, 재산상속, 부동산 투기, 자녀들의 병역문제 등은 가족과 친족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단편들이다. 그러나 산업화의 급진전에 따른 친족 공동체의 해체나 약화, 도시화, 개인화되는 주거환경과 문화 등은 우리가 친지나 가족이 아니어도 같이 어울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한 다. 직장과 학연, 성당에서의 여러 단체 활동 등으로 만들어진 인간관계의 그물망이 크고 작은 친소관계로 구성되었다.


유교가 고도의 사회윤리 체계로 간주되어 오랜 기간 삶의 원리로 작용해 온 동북아시아 지역의 한국사회에서 ‘지금 여기’라는 시간의 한정성과 공간의 제약은 현세주의를 출산한다. ‘죽고 나면 끝나버린다’ 라는 한정적 시간관은 그리스도교의 죽음 이후의 부활신앙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한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도 실리를 추구하고 이러한 사고는 종교인들을 포함하여 정치인이나 지식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다 제 잇속 차리기에 바쁜 존재라는 속물형인간관을 확산시키고, 사회적 신뢰나 자존감 상실과 같은 부작용을 초래한다. 거세개탁(擧世皆濁) 즉, “온 세상이 모두 탁해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바르지 않아 홀로 깨어 있기 어렵다”라는 말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인과응보’, 뿌린 데로 거둔다는 이치를 근간으로 하는 보상의식은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등의 종교원리로 작용한다. 인간은 모든 삶의 고난에 대해 보상 받기를 갈망한다. 높은 자살률과 ‘묻지마 범죄’ 등은 사회적으로 피해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보상의식이 한계점을 넘어 파국에 치닫게 되는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복’은 친한 사람들끼리 한평생 만복을 원 없이 누리며 살아가는 것, 사회 경제적 영역에서 심신의 안녕에 이르는 안락한 삶을 향한 지복의식이라는 생각이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다. 


한국인들의 ‘복’은 고난이나 구원을 통해 향유되는 은총과 같은 성스러운 것이 아니요,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공적 이념과도 거리가 멀다. ‘복’은 권력, 재산, 건강, 명예, 자식 등에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복음(Good News)’은 현세에서 얻어지는 권력, 재산, 건강, 명예, 자식 등에 관한 행운이라는 다분히 기복적인 성격의 복음이 될 소지가 많다. 이러한 세계관 아래서는 한, 정, 분노, 기쁨, 보람, 애환 등 만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요소들이 주체적 향유의 소재가 아니라 주어지는 것, 수동적으로 내려오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끼리끼리’(관계주의), ‘빨리빨리’(성취주의), ‘대충대충’(현세주의), ‘다다익선’(보상주의)이라는 깊은 내면의 생각들이 기복의식으로 총화 되고, 기존 사회지도층에 대한 강한 불신과 반발에서 그리고 승자독식의 경쟁적 삶의 어려움 가운데서 여러 가지 생활의 전략들이 도출되었다.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이들 중 10%에 해당되며, 이것이 본당 공동체 저변에 흐르는 무서운 패거리 문화(관계주의)와 기복적인 마리아 신앙(현세주의), 봉사자의 부족현상(보상주의)으로 나타나 공동체에 분열을 만드는 요소들, 곧 공동체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 요소들이 되고 있다.


레지오 ‘쁘레시디움’(소공동체)의 끈끈한 유대는 구역, 반의 소공동체(속지적)를 뛰어 넘어 존재한다. 단체장이나 구역의 반장들은 특별한 보상 없이 너무나 많은 노력봉사를 요구받고, 최근에는 맞벌이 부부들이 늘어나면서 아파트 거주 지역의 여성봉사자 인력은 그마저도 고갈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목회 임원들, 단체장들도 특정한 운동을 같이 한다거나, 사제들의 취향에 따라 정치색, 문화, 놀이방식 등 코드가 비슷하게 형성된다. 


여기에는 적당한 ‘처세’와 ‘융통성’이 필요한 것이지 복음이나 사랑의 실천, 사회정의 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 등은 이미 무거운 화제, 함께 있을 때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깨는 소재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음 선포는 참으로 어렵기만 하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은 연구하지만 성경은 연구하지 않는 분위기는 순전히 레지오 마리애 영성의 문제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본당에서 인원 동원력과 조직에 대한 충성도로 볼 때 레지오 없이는 여러 가지 본 당 운영에 어려움이 있으니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레지오에 모든 것을 맡길 수도 없고, 본당 사제는 끊임없이 레지오 마리애 신심과 갈등한다.


이렇게 대다수의 평신도들은 레지오 마리애, 엠이, 꾸르실료 등으로 대변되는 신심단체의 회원 ‘끼리끼리’의 인맥과 친교로 소위 영성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 성숙과 외적 성장은 별개의 문제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외적 성장에 미치지 못하는 내적 미숙성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평신도 신앙 교육활동을 소홀히 한 교회 당국의 사목 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신설본당 부지를 확보하고, 성당을 신축하고, 교회 시설,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데는 많은 비용들을 투자했지만, 정작 신앙 교육을 위한 소프트웨어 기획, 제작, 운영비용은 전혀 투자하지 않는 교구의 정책은 교육의 질(質) 저하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맹 신앙인’을 양산할 뿐이다.



우리가 길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우리에게 거짓 안도감을 주는 조직들 안에, 우리를 가혹한 심판관으로 만드는 규칙들 안에, 그리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습관들 안에 갇혀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며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우리의 문 밖에는 수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6,37)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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