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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먹고사는 일이 바빠서 죄지을 시간이 없는데…’
  • 전순란
  • 등록 2018-03-12 10:4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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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11일 일요일, 맑음


공소엘 가는데, 평소에는 집을 나와 함께 내려가던 카밀라 아줌마가 집 뒤꼍에서 부산하게 움직인다. 성당 가자니까 ‘아들 친구들이 와 옻닭을 해 먹이려니 밥하느라 못 간다’는 답변. 30분이면 공소 예절이 끝나긴 하지만 정작 소중한 건 아들 사랑, 어미로서 자식에 바치는 애덕(愛德)의 봉사다. 애덕은 모든 법규를 초월하고, 오늘 공소 못 간 일이 정 맘에 걸리면 다음 주 판공성사 오시는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면 되겠지…


가톨릭에는 신자들더러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실제로는 부활절과 성탄절 두 번)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라는 교회법 규정을 두고 ‘판공성사(判功聖事)’라고 부른다. 심지어 ‘판공성사표’라는 쪽지까지 나눠주고서 고백실에 제출되는 그 표를 교적에 올리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가톨릭 게토언어로는 ‘냉담(冷淡)’이라고 한다) 따지기도 한다. 


보스코 말에 의하면 전 세계 어디에도 없고 우리나라 가톨릭 신도들에게만 통하는 종교관습이란다. 가톨릭 종주국 이탈리아에서도 내가 한국교회의 ‘판공성사표’를 얘기하자 '어디에 그런 교회가 있느냐?'며 믿기지 않는단다. 




그런데 판공성사 때 제일 많이 고백하는 죄가 ‘주일 궐(蹶)한 죄’(주일 미사에 참례하지 못한 죄)와 단식재 금육재를 지키지 않은 죄라는 게 신부님들의 장탄식이고 보면, 가톨릭신자들은 정말 죄를 안 짓고 산다. 예를 들어 금요일 밤 자정 무렵, 식구가 먹다 남긴 닭고기를 먹어 없앤 게 금육(禁肉)에 걸리는지 안 걸리는지, 성사를 봐야 하는지 안 봐도 되는지 고민한다든가… 그저 미사 중 영성체하는데 꺼림칙하게 만드는, 뭔가 부정 탄 듯한 언행에나 죄책을 갖지 타인과 사회에 저지르는 심각한 죄과는 안중에 들어오지 않게 키워진 탓이 아닐까?


몇 해 전 우리 공소신자가 겪은 일. 판공성사차 공소교우들이 본당까지 가서 고해소에 들어가긴 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은 죄가 없어 ‘고백할 죄가 생각 안 납니더’했다는 마르타 아줌마. 그러자 ‘그럼 뭐하러 들어왔어욧!?’ 하는 천둥소리가 성당을 쩌렁쩌렁 울렸단다. 이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일 외에는 죄지을 틈도 없을 아짐들은 ‘주일이라도 빠져야’ 성사 깜이라도 만들 성싶다. 숨 쉬고 사는 것 전부가 죄라는 평범한 사람들은 사실 ‘먹고사는 일이 바빠서 죄지을 시간이 없다’는 게 변이다.




실비아는 시집가자마자 절에 다니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30년간 함께 절에 다니며 효부로 소문나게 잘 살았다. 마음 한 귀퉁이에는 ‘시부모님 돌아가시면 기어이 성당으로 돌아가리라’고 마음먹었고… 그러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 마침 원주로 강의를 하러 간 우리 부부를 만난 길에 보스코한테서 최신부님을 소개받았다. 활달하고 넉넉하신 최신부님은 그니의 사연을 들은 후 그 자리에서 고백성사를 주시고 영성체까지 해 주시며 그니의 신앙생활을 회복시켜주셨다. 가족 전부가 구교우인 집안에서 컸으면서도 시집의 평화를 위해 성당을 멀리했던 그니는 지금 성가대에 성서공부까지 하며 열심히 성당을 나간다. 시집간 지 30년 만에 관면혼배라도 되게 교회법 절차를 밟아주신 신부님도 계셨단다.



오늘 공소 예절이 끝나고 다들 지난 목요일 갑자기 내린 눈에 당한 피해를 얘기한다. 소나무가 부러져 길을 막는 거야 잘라서 화목보일러 땔감으로 쓰면 되지만, 수년간 일군 블루베리 밭에 눈이 덮여 방조망을 찢고 쇠파이프를 무너뜨리면 복구하는 일이 난감하다. 진이네도 도정과 남호리 그 큰 블루베리 농장이 초토화되어 넋을 놓고 있단다. 밤 12시 까지만 해도 비가 오기에 마음 놓았는데 밤새 눈이 되어 모든 농사를 망쳤단다. 하느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겸손함이 농부의 기본 마음가짐이다. 


그날 새벽 백설의 세상을 보며 난 철없이 좋아하고 사진기만 눌러댔으니… 농부들에게 참 미안했다. 


점심 후에는 봄기운이 좋아서 휴천강가로 봄맞이 나들이를 갔다. 며칠 전 꺾어다 항아리에 꽂아둔 매화가 활짝 피고 텃밭의 매화나무도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봄눈이 제법 강물을 불려놓았고 밭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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