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뭇매를 맞고 있다. 정경유착의 고리는 ‘조국 근대화’라는 허울로 독재자 박정희와 삼성 이병철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해도 잘못이 아니다. 무소불위의 군사독재는 못할 일이 없었다. 정치자금(온갖 강압적, 사적 뇌물 포함) 마련에 이보다 더 좋은 구실이 어디 있으랴! 온갖 이권과 상권, 개발권을 재벌들에게 내주고 그 대가를 엄청나게 챙긴 행태는 동네 상권을 보호한다는 미명 하에 돈을 갈취하는 조폭과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불법적으로 조폭 정권의 비호로 형성된 재벌이 지금은 국민과 국가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 어이가 없다 못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온갖 특혜와 지원을 받으며 국민의 혈세로 키워 온 재벌 그룹들이 스스로 노력해서 부를 일군 것처럼 행세 하는 꼴이 가관일 따름이다. 그런 삼성이 정치 경제 사법 문화 언론 등 각 분야에 뿌려놓은 가라지가 밀을 제치고 창대하게 자라 현재 대한민국을 삼성 비리 공화국으로 만들면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그동안 삼성과 정계 법조계 언론계 등에 음습한 거래내용이 불거져 나와 간간이 사건이 되긴 했으나 이미 공룡이 된 삼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가치관을 돈으로 환원시킨 삼성(이병철 일가)의 공로(?)는 이미 차고 넘친다. ‘뇌물 공화국’이라는 별칭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도 부정하기가 어렵다.
필자는 한때 그러한 경로로 탄생된 재벌 기업 중 한 군데에 재직을 했었다. 박정희 말년부터 전두환을 거쳐 노태우에 이르기까지의 세월을 거기에서 보냈고 한 30여 년 전 당시에는 중간 간부로 소위 ‘갑질’을 할 수 있는 부서에 있었다. 사실 정권에 아부하거나 고위 공직자들을 구워삶는 역할은 그룹 상층부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므로 중간 관리자나 하급 직원들은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그러나 소문은 돌게 마련이다. 누가 누구에게 싸들고 갔다는 둥, 회장이 누구를 만났다는 둥 사실 그리 큰 비밀도 아니었다.
정치·경제·사회적 분위기가 ‘청렴’을 말로만 내세웠지 행동으로 본 기억도 없고 그런 분위기가 실제로 돌아간 느낌도 없었다. 그야말로 공염불에 불과했다. 전두환은 자기 나라 군대로 자기 나라 국민을 향해 총질을 해대고 멀쩡하게 잘 나가던 대기업을 주저앉히고 언론이고 뭐고 쑥대밭을 만들어 놓으니 국민들 누구 할 것 없이 흉악한 놈이라는 생각만 했다. 그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가 키운 다른 대기업들 또한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하튼 회사 관련해서 사업을 하는 군소업체는 갑에 위치에 있는 우리 부서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어떤 업체는 회사와 연결된 사업을 하고 안하고 관계없이 때가 되면 뭔가 선물을 하거나 봉투를 건네기도 했다. 받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치면 오히려 더 달라는 줄 알 정도였으니 거부하기도 그리 쉽지 않았다. 다들 그랬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일반 기업이나 공직사회 분위기가 그랬었다. 일이 성사되기 전에 가져오는 봉투는 받지 않았고 나중에라도 대놓고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게 당시에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염치’라고 자부했다. 청렴이란 단어는 낯이 뜨거워 입에 올릴 생각도 없었다. 그건 적어도 공직자에게나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했고 그 시절의 공직 기강은 하품 나올 정도의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박근혜에게 중형이 선고 된 날, 자한당인지 ‘자학당’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정당에서 그것도 당 대표라는 자가 논평이랍시고 내 놓은 말이 공주를 마녀 사냥한다며 “간담 서늘해야 할 사람은 문 대통령”이라고 했다. 도대체 그따위 말을 왜 보도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박근혜에게 내린 중형에 간담이 서늘해야 할 사람들은 그 ‘자학당’(과거 차떼기 정당)에서 반성할 줄 모르고 적반하장에 갑질이나 해대면서 사사로이 청탁이나 하며 기생하는 부류들일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이제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관행’이므로 ‘난 그대로 간다’는 정통(?) 보수의 길로 내닫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요한 10, 11-13)
파란의 일생을 산 정약용(사도 요한)은 ‘목민심서(牧民心書)’라는 저서를 통해 목민관이 지켜야 할 매뉴얼을 상세히 작성해 놓았다. 목민관을 목자라는 뜻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착한 목자의 품격에 대해 천명하셨고 다산은 착한 목민관의 품세를 아주 세세히 그림 그리듯 그려 놓았다. ‘대탐필렴(大貪必廉)’은 목민심서를 대표하는 정신이다. 욕심이 큰 사람은 반드시 청렴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사자성어가 삶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라면 ‘대탐필렴’은 현실적 처세술의 비결쯤으로 여길만도 하다.
목민심서의 ‘목민’이란, 민(백성)을 잘 돌보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양을 치는 목자의 일도 목민과 다름이 없다. 목민관의 정의는 좁게 얘기하자면 지금의 기초 단체장이랄 수 있지만 넓은 의미로 따지자면 모든 단체의 지도자로도 볼 수 있다. 물론 고위 공직자를 비롯해 대통령까지도 포함되며 정치 종교계 문화계를 망라한 모든 지도자들 역시 그러하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다산 정신을 ‘공렴(公廉)’이라는 단 두 글자로 표현한다. 즉 ‘공정과 청렴’이란 뜻이다.
‘공정과 청렴’은 모든 지도자들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소양이므로 이를 지켰다고 하여 큰 상을 받을 수는 없지만 만약 이 덕목을 어겼을 경우에는 그 어떠한 다른 훌륭한 자질이 있더라도 그것을 상쇄할 수 없는 큰 대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다산은 일갈한다.
그런 다산에게 욕먹을 위인이 누구인지 온 국민이 안다. 그는 그것을 혹시 상쇄할지도 모를 다른 훌륭한(온 국민이 부자 되게 하는?) 자질도 그에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애민사상이란 눈꼽 만큼도 없는 정치인들이나 공직자에게서 우리가 무엇을 바랄 것인가! 이런 지경에 다산의 목민심서는 돼지(쥐?) 목에 진주목걸이는 아닌지 숙고하게 만든다. 실제로 부패와 무능으로 찌든 두 대통령을 배출한 자한당에서 청렴이나 반부패에 대해 어떤 메세지를 내놓았는지 전혀 들은 바가 없다. 신기한 일도 아니다.
그는 박근혜가 중형을 받은 이유를 정말 몰라서일까? 박근혜 지지자들의 인지부조화 현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훤히 밝혀진 범죄 사실도 부정하나? 아니면 자신도 저 박근혜 정도의 죄는 죄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 정말로 이번에 내린 중형 선고가 ‘정치보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쉽게 범죄자로 몰릴 수 있는 약자를 위한 ‘무죄추정의 원칙’을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에게 들이대어 자신들의 군주를 잡범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도 모자라 아무리 중죄를 지었어도 대통령을 지냈으니 정치적으로 풀어줘야 된다는 말인가?
아니 그가 몸담았던 정당과 함께 그도 정말 ‘청렴’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새누린지 신천지인지 그 당과 자한당은 전혀 다른 당인가? 아니면 유체이탈 당인가? 모순에 모순을 시전하면서도 후안무치로 일관하며 반성의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으니 이런 자가 대통령이라도 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청렴’은 말할 것도 없고 ‘염치’라는 단어조차 아예 뇌리 어느 구석에도 없고 뇌물을 강압하거나 닥치는 대로 걷어 챙기며 통치행위니 정치자금이니 하며 뇌물 공여나 수뢰를 관행으로 몰아 정당화하려는 정권이 무슨 보수 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정권을 탄생시킨 정당이 아직도 버젓이 존속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다. 생각을 해보자! 검사에게 ‘공렴’이 없다면? 판사에게 ‘공렴’이 없다면? 대통령에게 ‘공렴’이 없다면? 세상에 이런 코메디도 없다. 생각이 온통 뒤엉킬 뿐이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천재라고 했다. 유학자이며 실학자인 그는 광암 이벽을 통해 서학(천주학)에 심취했다. 충분히 가톨릭에 관한 여러 서적을 탐독했을 터이고 요한이란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기까지 한다. 그의 명민한 머리로 교리를 연구했으니 예수의 일생 또한 잘 알았을 것이고 성경도 분명히 접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착한 목자의 비유를 잘 알았을 것이라고 추정해 본다.
목민이라는 단어는 이미 중국 고래로부터 있어왔던 단어라고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의 비유’가 그의 가슴에 가장 와 닿았던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조상제사 금지문제로 배교를 했던 다른 양반층들처럼 그도 배교를 했다. 실정법으로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의 비상한 재주를 익히 알던 정조의 배려로 유배형으로 갈음했으나 가톨릭 입장에서 보면 배교자임이 틀림없다. 만약에 그가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면 가톨릭으로서는 엄청난 보화를 얻었겠지만 ‘목민심서’는 잃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이장을 할 때 예수의 십자고상이 관 위에 있었다고도 한다. 겉으로는 배교자이지만 속으로는 신자의 자세를 유지한 건 아닌지 추측을 해본다. 아무튼 그가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을 근거는 없다. 왜냐하면 애민사상이 남보다 투철했던 다산의 면모를 보면, 그도 충분히 접했을, “나는 착한 목자다.”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과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 시대 목자들은 삯꾼이 많았으며 이리 떼의 잦은 출몰 등 척박한 환경으로 주인과 계약할 때 전체 양의 20% 정도의 손실은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것처럼 지금의 백화점 같은 대형 점포도 경영진의 결정에 따라 대개 5% 내외의 손실을 미리 감안한다. 물건을 도둑맞을 수도 있고 여러 사정상 훼손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점원들에게 가해지는 도난 방지에 대한 부담이 오히려 판매촉진에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일종의 경영전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온전히 목자나 점원들의 양심에 맡길 수도 없다. 그러니 목자가 품삯에만 연연하거나 아니 그보다 더해 양까지 훔쳤다면 주인은 어떻게 하였을까?
사기꾼인지 대통령인지 헷갈리는 위인이 수하들의 비리가 들통이 나자 비서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정권은 도덕적(도둑적?)으로 완벽하니 절대로 ‘허점’을 보이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던 기사가 생각난다. 아니 ‘허점을 보이지 말라’니 ‘들키지 마라’의 고급 버전인가?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나쁜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청렴을 강조해야 맞지 않았을까? 그런데 청렴은커녕 나라 곳간을 탕진하고도 모자라 본인의 도덕성마저 자신이 믿는 맘몬과 바꿔치기 해버렸다. ‘청렴’이란 인간만의 도덕적 소양 중에 하나다. 청렴한 설치류가 있을 수 있는가?
필자는 군대 생활을 거의 꽉 채운 36개월을 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깨러왔다가 실패한 사건 때문에 그 해 제대특명을 받고도 느닷없이 군 생활이 6개월 연장된 고참들에게 무수히 당한 군번이 제대할 무렵인 70년대 초,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졸병 생활을 시작했다. 그 첫 해, 부대에서 김장을 했는데 늦가을 낮게 흐르는 개천 같은 강물에서 무를 맨발로 닦는다고 부대원 모두가 양말을 벗고 시린 물속에서 첨벙거리던 기억도 선명하다.
일은 그 이후다. 김장을 하는데 고춧가루가 없었다. 분명 김치인데 벌건 점 하나 없이 푸르둥둥 하기만 했다. 그 이유를 나중에 알았다. 고춧가루는 우리 부대까지 오는 동안 중간에 과감히 없어지고 남은 것은 결국 우리 부대 하사관들의 차지가 되어 종래에는 말단 병사의 식판 위에 고춧가루가 사라진 김치가 제공된 것이다. 예전부터 당연히 내려온 관행이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토를 달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군 관련 방산 비리를 논하기 전에 최 말단 야전 부대에서조차 이러한 일반 부식재 까지도 몽땅 떼어먹는 일이 당연시 되고 있었으니 다른 분야야 더 이상 말하면 입이 아프다. 군단 직할 포병대대가 이런 정도면 오지에 주둔하는 사단 보병의 수준은 어떨지 보나마나다. 말단 병사들의 사기 문제는 전혀 고려 대상도 아니었던 야만의 군벌 시대였다. 그러한 부대 지휘관은 적군이 내려오면 양들에게 전혀 관심 없는 삯꾼처럼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재벌 기업의 총수들은 직원들이 사사로이 향응을 받거나 작은 수뢰에는 경기를 일으키지만 정작 자신들은 기업과 관계된 모든 공무원들을 관리하며 때마다 뇌물을 뿌린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들이 각 분야의 힘 있는 자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한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고 아예 삼성키드를 만드니 그 원대한 뜻은 하늘 높은 줄 모른다. 뇌물이 일상화 되면 수수하는 입장에서는 뇌물이 아닌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니 이명박근혜 시절의 수뢰는 정치적 행위로 굳게 믿었던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고위층의 수뢰 행위는 당연한 거고 말단까지 그런 행위가 몰래 이어지는 것 또한 당연하다. 한 나라를 경영하고 대표하는 대통령이 청렴해야 할 절대적 이유이다. 청렴하면 공정심이 자연 발생적으로 나올 것이며 매사에 공정하려면 청렴해야 마땅할 것이다. 청렴이 배제된 정당이나 정권은 아무리 안보를 외치고 빨갱이 타령을 하며 종북척결을 부르짖어도 결국은 와해되고 만다.
예수는 기득권층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삯꾼들이라며 가차 없이 비판하신다. 성전 대사제들에 의해 온갖 불법과 탈법으로 복마전으로 변한 성전 앞뜰을 둘러엎기도 하신다. 그들의 이중적 태도와 위선에 대해서는 혹독한 욕도 마다 않으신다. 당시에도 지금 여기나 마찬가지로 지도자들의 양심은 실종되고 그들 사전에도 ‘청렴’이라는 단어가 없다. 아무리 양이 귀하기로서니 주인도 자신의 목숨과 바꿀리 없다. 이리 떼가 달려들면 삯꾼보다는 더 열심히 싸우겠지만 어쩔 수 없을 경우 포기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삯꾼은 더 하다. 이리 떼가 몰려온다면 제 목숨 부지하려 도망치거나 적당한 선에서 양을 포기하고 계약된 대로 할 것이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신다. 주인의 입장도 훨씬 넘어선 말씀이다. 무도한 정권의 패악질을 두 눈 질끈 감고 관망 혹은 동조하며 적당히 자세를 고치는 종교 지도자나 양들이 죽건 말건 아무 동요 없이 머리 올리는 게으른 삯꾼은 이미 목자가 아니다.
시대는 변한다. 미투운동도 마찬가지다. 옛날의 기준으로도 엄연히 범죄였다. 그런데도 ‘관행’이라는 미명 하에 그냥 지나친 것일 뿐이다.
부패가 관행이었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이승만을 시작으로 박정희 전두환에서 만개된 ‘부패’관행은 이명박 때 흐드러지게 피었지만 박근혜를 끝으로 완전히 스러져야 한다. 한 30년 전 얘기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며 편하게 살았던 필자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지금은 그러한 위치에서 한참 멀어져 있기 망정이지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도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 당시 시세에 따르지 않고 다산의 ‘대탐필렴’이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살아왔다면 지금은 다른 모습으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내세울 수도 없었겠지만 대통령 자신들부터 ‘대탐필렴’을 내세우며 국정을 이끌었다면 지금 같은 참담한 결과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국민은 전두환의 ‘정의사회 구현’이나 이명박의 ‘부자되세요’, 박근혜의 ‘창조경제’ 같은 허튼 소리는 들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굳이 그들이 ‘필렴’을 외치지 않아도 민중들이 알아서 그들의 ‘대탐’을 성취시켜 주었으니 다산 정신이 무색해진다.
후지고 후졌던 여당이 지금 명찰만 바꿔달고 제1야당이랍시고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그런 제 1야당 대표라는 자에게 목민심서를 안기고 싶다.
그가 진정한 ‘목민관’이 되기를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먼저 여당 시절에 벌였던 부정부패 비리를 깨끗이 인정, 반성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런 후 종북척결 운운하며 문재인 정권에게 종주먹을 들이대면 훨씬 참신하고 더 진짜 보수다울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단언컨대 좌익에 기울었던 몸통은 차츰 오른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세상에는 좌우익 날개만 있는 게 아니라 꼬리 날개도 있고 날개를 달고 있는 몸통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날개의 방향성에 따라 몸통은 잠시 좌우로 움직일 뿐이다.
‘대탐필렴’은 좌우익이라는 이념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염리(廉吏)로 가는 보수적 처세술이다. 정말 이제부터는 실체적인 ‘청렴’이 도래해야 하고 아주 작은 행동에도 ‘염치’를 달고 살아야 한다. 문재인 정권도 예외가 아니다. 문재인 시대가 후세에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삼성 일가에 대한 심판이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다산이 주창한 ‘공정과 청렴’을 훌쩍 뛰어넘어 약자를 위하여 죽는 ‘착한 목자’임을 선언하신다. 모든 공직자가 ‘공렴’을 가슴에 담고 예수님처럼 착한 목자의 길을 갈 수만 있다면 우리 민초들은 대통령이 누구인지 알 필요도 없다.
부언하면 다산이 생각한 목민의 대상은 사회적 소외 계층으로 고아, 과부, 병자, 노약자 등 예수께서 그토록 가까이 한 민초들과 동일하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