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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김웅배) ‘망나니’와 남북 대화
  • 김웅배
  • 등록 2018-04-30 12:01:48
  • 수정 2018-04-30 17: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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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진짜 망나니는 누구인가


60년대 헐리우드 서부영화 중에 이런 줄거리를 가진 영화가 있었다.


광활한 목초지 위에 조그마한 타운(한반도)이 있다. 거기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터전 위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잠시 거쳐 가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타운에는 누구에게도 환영 받지 못하는 망나니 술주정뱅이(북한)가 있다. 이 인물이 술을 마시고 사고라도 치면 동네 보안관은 그를 보안관 사무실 유치장에 가둔다. 그리고는 그가 술에서 깨면 한바탕 설교를 하고 풀어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동네를 무력으로 접수하려는 무법자 패거리(소위 열강)들이 몰려오면서 얘기는 반전된다. 타운의 골칫거리였던 이 주정뱅이(북한)는 보안관을 위시한 주민들(남한)과 합세하여 이 악당 무리들을 물리친다.  


우리는 기억력을 다른 미물보다 아주 조금 더 가진 동물에 불과하다. 그 기억력조차,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쥐, 닭보다 나을 것이 얼마나 되는지 인공지능으로 돌려보고 싶을 지경이다. 사람을 비하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인간을 하느님 모습으로 만들었다는 것 외에는 하느님 보시기에 인간과 미물에는 아무 차이가 없는 듯하다.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구약을 관통하는 기본적 요소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은 계약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쥐, 닭 머리 수준’의 인간들이 행하는 ‘배신’이 뼈대를 이룬다. 그런데 ‘판문점선언’으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한국에서 이 배신행위를 인증이라도 하려는 듯 수구 세력들이 튀어 나오고 있다. 마치 뿅망치로 두들겨 맞는 두더지 장난감처럼 말이다. 


▲ (사진출처=SBS 비디오머그 영상 갈무리)


‘북진통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헛구호를 수동태로 바꾸어 ‘종북좌파가 북한에게 나라를 바친다’는 둥 ‘나라를 통째로 넘기시겠습니까’ 라는 철학 없는 슬로건을 내 거는 그들의 사고 기반은 60여 년 전이나 전혀 다름이 없다. 그런 무리들의 어쭙잖은 왕초 노릇을 하며 허공에다 대고 헛소리를 해대는 홍준표류의 가래 끓는 소리가 지겹다 못해 입에다가 재갈을 물리고 싶은 심정이다. 


오랜 갈등과 불화 끝에 일어나는 싸움엔 항상 서로가 옳다고 우기는 상대가 있게 마련이다. 시정잡배들 간의 싸움에도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일단 상대의 처지를 알려고 상대 나이쯤은 물어본다. 닭싸움 하듯 을러대기만 하지, 돈 받고 싸우는 프로 싸움꾼이라면 몰라도 곧바로 주먹을 날리지 않는다.


미물은 물론 사나운 동물도 같은 종끼리는 싸움을 피한다. 다른 종조차도 먹이사슬이 아닌 관계라면 서로 소 닭쳐다 보듯 한다. 대관절 우리 남북 간의 처지와 비교해 본다면 이런 미물보다 나은 구석이 어디에 있단 말이며 지금까지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소위 ‘종북좌파’ 때문인가? 


어느 동네에나 서부의 한 타운에서처럼 ‘망나니’가 한 명쯤 있다. 그는 동네에서 갖은 못된 짓을 하고 다닌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보통 그의 근처를 피해간다. 그러나 그 동네의 어느 누구도 그를 동네 밖으로 영원히 쫓아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웬만한 동네 어른들은 그 ‘망나니’의 내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언제나 이 ‘망나니’를 어르고 달랜다. 이 동네에는 법을 넘어선 묵계가 있다. 나이든 어른은 공경을 받고 아랫사람들의 시비를 가려준다. 파출소는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다.  


사막이나 광야에서 길을 잃으면 그건 바로 죽음을 뜻한다. 모든 유목민이 대개 그렇듯 길 잃은 낯선 이에게 먹을 것을 주며 환대하는 이유에는 공존의 의미가 있으며 본인 또한 어떤 경우를 당할 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중을 위한 저축인 셈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남의 식량이나 식수를 빼앗는다면 그건 살인과 마찬가지이므로 그런 일을 저지른 자는 사형을 면치 못한다. 이명박근혜는 거의 10년을 정권의 횡포에 맞선 사람들의 밥그릇을 빼앗았다.  


▲ ⓒ 곽찬


우리의 ‘참보수’라고 자칭하는 홍류의 정치인들은 동네 어른들이 왈패 짓을 하는 망나니를 어르고 달래는 이유를 정말 모르는 모양이다. 서부의 한 타운에서도 ‘왈패’를 보듬는다. 그 왈패도 우리 동네의 한 구성원이고 어느 순간, 동네의 조력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산위 동네와 산 아래 동네가 서로 죽기 살기 싸움을 벌였다. 훨씬 잘 사는 산 아래 동네 사는 쪽이 (방산비리로 성능이 검증이 안 된) 신식 총칼을 들고 산위에 못 사는 쪽이 고생고생해서 겨우 장만한 잘 쏴질지도 모를 대포를 강제로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저 순순히 내놓을까? 역지사지로 우리의 입장이 그렇게 되었다면 당신들은 순순히 “그래, 가져가셔!” 할 거냐 말이다. 더구나 “나 대포 가지고 있으니 나한테 까불지 마!” 하면 그 물건이 확인되지 않았을지라도 주춤하게 마련이다. 그럼 다음 순서는 어찌 될까? 당연히 “야! 말로 하자.” 할 것이 아닌가! 마을 간의 돌싸움으로 사람이 죽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진짜 싸움으로 번지지 않는다.  


‘보수’라고 참칭하는 무리들은 지난 십여 년 간 이 땅에 사는 민중들에게 해 온 짓들이 참으로 공명정대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고개를 바짝 들고 온갖 헛소리를 아직도 질러대고 있을까? 사자방(사대강, 자원외교, 방위산업) 비리는 아직 손도 못 대고 있고 세월호는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다. 


정권의 비리를 북한과의 적대적 공생관계로 덮어 버리고 또 그걸 빌미로 나라 재정을 거덜 낸 위인들이 ‘관행’대로 하자며 아직도 버티고 있다. 제 잇속 차리느라 제 식구 겁주고 전혀 할 일도 아닌 일을, 해야만 할 일처럼 부풀려 국민의 혈세로 양껏 배 채우시고, 위아래 다 같이 좀 잘 살아보자는 햇볕정책은 퍼주기니 뭐니 하며 짓밟아버리고 대안이라고는 ‘북진통일’식의 막무가내 주장이나 하니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건지 도대체 그 행태가 점입가경이다. 


아무리 제 처지가 궁박하기로서니 온 겨레가 망하자는 쪽으로 머리를 들이미니 할 말이 없다. 아니 정말 그렇게 자학을 할 생각이라면 본인 혼자서나 조용히 속으로 삼킬 일이지 왜 온 나라에다 대고 시끄러운 나발을 불어대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신뢰’는 주고받으면서 쌓이는 것이다


전 세계에 평화를 위협하는 몇 안 되는 뇌관들 중 바로 우리 발밑에 놓여있는 위험한 뇌관을 우리끼리 해체하자는데 도대체 무슨 훼방거리가 있을 수 있는가 말이다. 북한 정권의 신뢰를 문제 삼는데 그동안 이명박근혜 정권의 신뢰는 어땠는지 되묻고 싶다. 신뢰라는 것은 주고받으면서 쌓이는 것이다. 둘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신뢰를 줄 수도 없고 확인할 방법도 없다. 신뢰는 동시에 오고 가는 ‘인질교환’이 아니다. 각자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시간차가 있게 마련이다. 


쌍방 간의 정전협정이라는 계약도 모든 전선에서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협정을 맺은 이후에도 한동안 전투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협정을 파기하지 않는다. 어느 쪽이 먼저 주고 그 다음에 받은 것을 확인하는 것이 신뢰 관계이다. 모든 계약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추상적 문자 상태로 출발해서 실제 행동을 통해 구체화 되는 것으로 완료된다. 남북 정상의 ‘판문점선언’은 이제 출발선에 서 있다. 


▲ (사진출처=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


잘 익어 먹음직한 포도송이가 높이 달려 있어서 도저히 따먹을 수 없는 여우는 이렇게 말한다. “에이, 저건 신포도가 틀림없어. 아니 가짜로 만든 포도일거야!” 인지부조화 현상의 대표적 우화이다. 


어느 야당 대표라는 자가 ‘판문점선언’(포도송이)은 ‘위장평화쇼’(신포도)라고 했다. 본인 스스로, 아니 그 당 전체가 인지부조화 현상을 자백한 꼴이 되고 말았다. 본인이 하고 싶었지만 언감생심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위장평화쇼’라는 헛된 말로 그 모순을 해소한 격이 되었다. 본인이 한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지금쯤은 알아차렸을 것 같다.  


여하튼 남북대화를 통한 ‘판문점 선언’을 ‘위장평화쇼’라고 한다면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한 위장쇼인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쇼인지 밝혀야 할 것이다. 그 ‘누구’가 평화를 염원하는 국민이란 말을 하려면 그대들이 몇 십년 동안 국민들에게 해댄 ‘위장안보쇼’ 짓거리에 대해 사죄하며 머리 풀고 석고대죄를 먼저 해야 한다. 


박정희와 김일성 간의 ‘7·4남북공동성명’이야말로 ‘기만극’이 아니었던가! 그 후에 남북한에서 부당한 정권 연장을 위해 행한 10월 ‘유신’과 ‘사회주의 헌법’ 제정만 보더라도 이는 위장쇼를 넘어서 완전 대 한반도 국민 사기극이었다. 이제 홍류는 좌파만이 남북대화를 찬성한다는 그 궤변을 도로 자신의 입속에 쳐 넣어야 한다. 남북 간의 ‘평화’라는 단어가 좌파에게만 해당되고 우파에게는 ‘전쟁’이란 단어로 들린다는 말인가? 


지난 백여 년의 세월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입장으로 볼 때 미물들의 한 조각 기억과 별다름이 없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정도의 시간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사사건건 ‘빨갱이’ 시비를 걸고 개차반 정쟁을 일삼으며, 남북한 겨레가 어찌되던 전혀 안중에도 없는, 소시오패스 성향까지 아낌없이 겸비한 이 나라의 ‘자칭 보수’라고 부르는 정치 모리배들을 소탕할 방법은 정녕 없단 말인가! 


이제껏 우리가 ‘보듬고 껴안고 가야 할’ 우리 동네의 ‘망나니’는 북한인줄로만 알았다.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 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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