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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라는데, ‘공동체’라는데 외롭다
  • 지성용
  • 등록 2018-05-28 17:08:33
  • 수정 2018-05-29 1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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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지난 2017년 4월 발간된 지성용 신부의 책 『복음의 기쁨, 지금 여기』 가운데 일부입니다.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가톨릭프레스> 시대의 징표 코너에 매주 월요일 연재 합니다. - 편집자 주 



우리는 모두 외롭다. ‘함께’라고 하는데 ‘공동체’라고 하는데 외롭다. 심리학자들은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인간 발달의 목표로 본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자유’에의 부름이라 하며 하느님이 창조한 대로 참된 자신이 되는 것을 자유라 말한다. 


심리학자 C. G. 융은 인간 발달의 목표를 ‘개성화(individuation)’라고 했다. 인간의 발달과정은 온전하게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과정(의식화 과정)이다. 우리는 부모와 시대의 문화,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고 특별한 관습 앞에 복종하며 군중에 휩쓸린다. 게으름과 외로워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 이름 없는 공포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거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우리는 본래 스스로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으며,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모든 것이 될 수 없다.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의사나 변호사, 정치가, 신학자, 신부라 해도 모든 직무를 동시에 수행할 수 없다. 그래서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이며, 때문에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더불어 살아가면서 우리는 관계의 어려움을 고백하는 경우들이 참 많다. 비교와 다툼, 시기와 중상, 모략과 뒷담화 등 관계의 파국을 맞이하게 될 때가 많다. 왜 우리들은 남들의 문제에 이다지도 관심이 많은 것일까?


뒷담화, 스캔들은 사회적 또는 개인적인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사회적인 면에서 스캔들은 분열된 사회를 일시에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기능을 가진다. 스캔들을 일으킨 당사자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그 공공의 적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돌을 던지는 과정을 통해 그 동안 쌓여있던 사회 안의 긴장감을 한 순간에 푸는 정화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가 허용해준 범위 안에서의 욕망을 넘어선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들을 낙인찍고 쫓아냄으로써 개개인이 욕망할 수 있는 그 경계선을 다시 한 번 규정짓는 역할을 한다. 즉, 그 경계선 밖으로 빠져 나온 자들을 처단함으로써 대중들을 다시 그 경계선 안으로 밀어 넣고 사회시스템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다시 한 번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그러나 간음을 하다가 붙잡혀온 여인을 향해 예수는 특유의 화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요한 8,7).



그렇다면, 개인들은 왜 남의 스캔들과 뒷담화에 관심이 많은 것일까? 우리가 그러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돌을 던지는 이유는 우리 무의식(알 수 없는 마음)안에 스캔들을 일으킨 사람이 한 행동과 유사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도 많이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인 데 참고 인내하고 있는 것을 그 사람이 한 것이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돈에 대한 집착, 권력에 대한 욕망, 성에 대한 욕구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분출되었을 때 우리는 환호작약 하는 것이다.

  

특히, 주교들과 사제들 그리고 수도자들의 스캔들에 민감한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은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더 깨끗해야 할 분들이 저러는데, 내가 하는 것쯤이야!’라고 하는 내 안의 숨은 욕망에 대해 면죄부를 준다는 것이다. 이런 개인의 욕망이 다른 사람들에게 향하는 것을 ‘투사적 동일화(Projective Identification)’라 한다. 우리는 유다를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만 정작 나에게도 유다와 다르지 않은 그 무엇이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누구든지 죄 없는 이가 먼저 간음한 저 여인을 치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나이가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떠나갔다. 왜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인가? 산다는 것이 죄의 연속이고,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는 이미 그들의 죄를 잘 알고 있었다.


교회법에 따르면 본당은 “교구장의 권위 아래 고유한 목자로서의 사목구 주임에게 맡겨진 개별교회 내에 고정적으로 설정된 일정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교회법전 515조 제1항)이며 본당신부는 “자기에게 맡겨진 본당 사목구의 고유한 목자로서 교구장의 권위 아래 자기에게 맡겨진 공동체의 사목을 수행하는 자”(제 519조)로 정의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정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기 까지는(2베드로 3,13) 여정의 교회로 성사와 현세제도 안에서 지나갈 현세의 모습을 지니고, 아직까지 탄식과 산고를 겪으며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피조물들(로마 8,19-22) 사이에 살고 있는 것이다”(교회헌장, 제 48항)라고 했다. 


이렇게 교회는 주님께서 오실 때 까지 주의 십자가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1코린 11,26) 세상의 박해와 하느님의 위안 속에 여정을 계속하고(교회헌장, 제8항) 우리 모두는 하나의 교회 지체로서 때로는 고독하게, 외롭게 걸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 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걸었던 것처럼 팍팍하고 무미건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이들은 모두 부족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다.


교회는 불완전하고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 동안 긴 역사 안에서 다양한 경험의 지표로 깨달아왔다. 2000년 전 예수님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교회가 바로 오늘 날의 모습일까? 이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교회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천명하듯 ‘하느님의 백성’이라 규정한다면 우리는 교회가 어떠한 정형적인 틀에 갇혀 있거나 교회에는 순수하고 완전한 이들만이 있다는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회에는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끊임없이 순례하는 여정으로서의 교회 성원들은 하느님을 추구하며 구원과 희망에 굶주려 있는 이들이다. 그들은 ‘인간이란 무엇 인가? 인생의 궁극적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이고 인간의 죄는 무엇인가? 고통이란 무엇이며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죽은 후에 어떤 심판이 있을까?’ 묻고 대답하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교회구조는 완벽하지 않다. 실수 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다. 부활하신 예수가 교회에 대한 어떤 정관이나 법, 조직을 형성하지는 않았다. 여기에 교회쇄신의 근거가 있다. 관료적이고 행정적인 교회의 운영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인 피조물이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서로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불완전함을 깨달아야 공동체가 다양한 형태의 적개심, 분열, 중상, 비방, 뿌리 깊은 반목, 시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고독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완벽해 보이려는 공동체는 구성원들 모두에게 약점과 실패를 숨기고, 한계를 부끄러워하고, ‘타인의 눈은 물론이고 자신의 눈에도 초인으로 보이도록 노력하라!’고 우리를 부추긴다. 그러나 완전에의 요구는 불가능하다. 그 완전에의 요구가 공동체에 분열과 갈등, 시기와 다툼을 불러일으킨다는 역설을 우리는 바로 보아야 한다. 그 ‘완전’이 사실 우리를 판단하는 ‘잣대’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 공동체가, 또 봉헌생활을 하는 사람들조차 다양한 형태의 적개심, 분열, 중상, 비방, 뿌리 깊은 반목, 시기에 놓여있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특정 이념을 강요하는 것과 심지어는 분명히 마녀사냥으로 보이는 박해까지 견뎌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과연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복음의 기쁨』 100항)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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