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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김웅배) ‘하늘에서 오는 징표’ 남북화해
  • 김웅배
  • 등록 2018-05-31 16:3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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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6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출처=청와대)


현재 한반도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혹은 스티븐 스필버그를 데려다가 영화로 제작하고 싶을 정도의 드라마틱한 시놉시스가 긴박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남‧북‧미 세 나라에 걸친 외교전을 보노라면 정말 주연 조연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있다.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을 쓴 작가 아론 소킨이 눈독을 들이고 있을지도 모르며 영화제작자 입장에서 보면 누구를 배역으로 정할지 고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막장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고 초현실적인, 초강대국 미국과 남북한 사이에서 벌이는 이 상황을 드라마에서 구현해내기란 컴퓨터그래픽을 총동원한 ‘아바타’라는 영화를 만들기 보다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이 영화 같은 일이 우리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진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일이었던가?


이런 극적인 일이 벌어지는 배경에는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 민족의 소원과 희망이 짙게 깔려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평화’는 1945년, 일제의 패망 이후갈라진 우리 민족의 대명제이며 그 어느 이념, 어느 가치보다 우선 된다는 것을 말할 것도 없다. 


노벨 평화상을 트럼프에게 준다면 그는 단연코 ‘노벨 불화(不和)상’감


▲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 (사진출처=TIME)


이제 이런 지난(至難)한 과정이 지나면 남‧북‧미‧중 사이에 예측 가능한 외교적 행보가 이어질 것이라고 희망해 본다. 여러 가지 난제에 따라 남‧북‧미 간의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로 촉발된 불확실성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홍준표류를 그대로 존치시키는 수구 집단의 행동거지가 민망하고 안쓰럽기 짝이 없다. 그냥 가만히 있거나 문재인 정권에 대해 합리적, 건설적 비판 정도로 끝냈다면 그들이 스탠스를 취하기도 훨씬 편했으리라고 본다. 


볼턴과 아베를 찜 쪄 먹는 막말로, 앉으나 서나 평화를 바라는 제나라 백성의 심기를 한껏 이리저리 휘젓는 그 작태가 노벨 평화상을 트럼프에게 준다면 그는 단연코 ‘노벨 불화(不和)상’ 감이다.


남북화해와 평화에 온 정성을 쏟고 있는 문재인 정권에 자한당 무리와 홍준표류가 쏟아내는 비방모략은 예전 북한방송에서 이명박근혜에게 가한 원색적 비방 욕설보다 내용적으로 보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아마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이 부분이 압권일 것 이다. 


남남갈등을 뒤에서 몰래 조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귀처럼 앞장을 서서 헤갈을 치니 이런 당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물론 속아서 한 선택이었겠지만 이런 자들을 뽑아놓은 이 나라 백성들이 야속할 따름이다.


‘위장 평화쇼’라니 그러면 실제로는 뒤에서 남북한이 서로 전쟁준비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위장 평화쇼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에 대응하는 것조차 혐오스럽다. 그가 벌이고 있는 언행을 곰곰이 뜯어보면 ‘위장 평화쇼는 걷어치우고 전쟁을 하라’고 부추기고 있는 꼴이 아닌가!


▲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지난 2월 27일 “위장 평화쇼 저지할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평화를 위한 남북간의 몸짓을 한사코 외면하며 한·미 간, 북·미 간, 남·북 간 아니 남·남 간에도 불화를 조장하는 그 꼴이, 아무 힘도 없으면서 ‘시대의 징표’를 무시하고 북진통일을 외치며 당사국임에도 정전협정에 참여하지 못한, 이승만의 뻘짓과 자꾸 겹친다. 


뭘 좀 들이대더라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할텐데, 니꺼 내꺼 겨우 구별하는 어린 아이만도 못한, 궤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으니 이런 자가 어떻게 공당의 대표인지 한심스럽다. 이제 남북 정상의 만남이 ‘친구 간 평범한 일상의 만남’처럼 이루어지려는 현실을 굳이 외면하는 이유는 또 뭔가?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징표)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저녁때가 되면 ‘하늘이 붉으니 날씨가 좋겠구나’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리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4)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 


이건 2000년 전,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했던 수구 사두가이, 바리사이만도 못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행태가 아닌가? 영화처럼 눈앞에서 펼쳐지며 리얼하게 돌아가는 현 상황에 일부러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그가 처량하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바리사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마태 15, 10-14)



수구 기득권 세력이었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가 꼭 20세기 말 대한민국에 출현한 어느 정당에다 대고 한 말씀 같지 않은가? 왜 성경 말씀을 현 정치 상황에 비교할까? 당시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율법으로 위장해 민초들을 수탈하고 억압한 종교 지도자이면서 소위 정치·사회적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위선적 종교 지도자를 질타하면서 동시에 정치 지도자도 과감히 비판하신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괜히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보지 않더라도 그 집단의 궤멸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하늘의 징표는 선명하게 한반도 하늘에 나타났다


뭔가 달리 방법이 없을 때는 무대책이 상책이라는 말이 있다. 예수님도 대책이 없으셨던지 하느님께 맡기자며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고 하셨다. 우리도 이들 수구 정상배들의 입을 봉해버릴 대책이 없으므로 그냥 내버려 둘 뿐이다.


하늘의 징표는 선명하게 한반도 하늘에 나타났다. 이젠 설사 북·미 회담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에 의해 또다시 파기된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겠다. 이미 서로의 진정성이 확인되고 신뢰를 구축하고 있는 남·북 간의 상호 협력은 주위 강대국들에게도 영향을 줄 것이며 결국에는 남·북 간의 화해시대는 열릴 것이다. 그래서 두 말 할 것도 없이 한반도 냉전의 시대는 끝나고 수구의 전유물인 ‘종북빨갱이’라는 허접스런 말도 우리 사회에서 퇴출될 것이다.  


남한의 어떤 ‘눈먼 인도자(?)는, ‘하늘이 붉으니 날씨가 좋겠구나’라는 자연의 징조조차 알려고도 하지 않는, 수구 몰락의 붉은(홍) 징표처럼 보인다.  

 

2017년 2월 <한겨레>신문에 실렸던 김 누리 교수의 품격 있는 컬럼의 일부분을 인용한다.


사실과 진실의 권위가 무너진 폐허에서 선동가들의 거짓말이 번져가고 있다. 그들의 거짓말이 위험한 진짜 이유는 그들이 거짓을 사실로 믿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을 하나의 ‘의견’으로 강등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사실의 신뢰성을 잠식하고 공론장을 왜곡하여, 결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문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 사이의 논쟁에 근거하고, 의견의 타당성은 사실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실이 무너지면 의견이 무너지고 결국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이다.

- [세상 읽기] 거짓의 시대 / 김 누리 중앙대 교수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 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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