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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짧은 팔과 불룩한 배에 안겨야 하는…
  • 전순란
  • 등록 2018-10-24 11:20:51
  • 수정 2018-10-24 11:2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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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3일 화요일, 암울하게 흐리고 비 조금



세상 마지막 날이 저렇게 음산하고 암울할까? 7시가 넘었지만 검은 회색을 장막으로 드리운 세계는 여직 밤이다. 테라스에 나가 보니 비라고 한두 방울 하긴 했는데 북한산에 얹힌 검은 구름 위로 더 많은 비가 서성인다. 담 밖의 샛노란 은행나무마저 어둡고 침울하고 거무스레하다.


요즘은 방바닥에 앉았다 일어서면 뼈 마디마디가 쑤시고 근육은 올올이 다른 방향으로 땡겨지는지 ‘아구구!’ 비명이 절로 나길 한참. 서울에 올라온 길에 ‘선내과의원’에 찾아가려고 아침도 굶고 나서는데 보스코도 따라나선다. 봄 가을로 철이 바뀔 때마다 알러지로 온 몸을 긁어대는 그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덕성여대 교정, 4·19 네거리, 그리고 장미원 앞이니 걸어가자니까 어제도 걸었다고 오늘은 기어이 차로 가겠단다. 걸어가면 돌아오는 길에 아점으로 순대국밥을 사주겠다고 꾀도 막무가내여서 어쩔 수 없이 차로 갔다. ‘잘못 생각했다’는 항복을 받아내려고 아무리 흘기고 눈치를 보이고 꼬집어도 오늘은 딴전을 부리며 버틴다. 좀 피곤도 한 듯해서 모처럼 봐주기로 했다. 



의사선생님께 ‘잘못 조립된 장난감처럼 온몸이 사방으로 튕겨나가 망가지기 직전 같아요’라고 증세를 설명하니까 ‘그 나이에는 다 그래요. 오히려 건강하신 편이니 엄살 말고 그러려니 하고 재밌게 사세요.’ 란다. 영양제나 처방해 주시려니 했는데 그래도 병원까지 찾아온 대접으로 피검사와 소변검사는 해 주신다. 


오히려 맹장처럼 따라온 보스코는 (엊그제 방송에서 보고 들었다며) 아주 긍휼한 눈으로 진찰을 하시며 ‘피부 알러지치고는 너무 심하시네요. 주사를 한 대 놓겠지만 시골에 내려가 너무 가려울 때 상비약으로 쓰시라’며 약도 왕창 지어주셨다. 내 꾀병에 미안했지만 남편이 환자로 대접받으니 덜 미안해서, 고맙다고 90도 각도로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언제나 진료와 처방과 주사를 공짜로 해주신다. 그 병원은 우리 ‘꽁짜클럽’ 중 하나다.


집에 돌아와 피부병 약을 먹은 보스코가 소파에 길게 누워 비몽사몽 하더니 책 하나를 들고 혼자서 킥킥거린다. ‘약기운에 사람이 망가졌나?’ 살펴보니 임보 시인의 최신작 시집 「사람이 없다」를 읽고 있다. ‘가려움증’이란 제목을 읽으면서 동병상린을 느꼈던가 보다.


... ...

박박 긁으면 벌겋게 줄이 서고

아무리 긁어도 가려움이 가시지 않은 

그런 증세는 무엇인가?


의사는 무엇을 먹었느냐고 묻지만 

내가 먹은 게 뭐 한두 가지인가?

먹어서는 안 될 무엇을 잘못 먹었나?

처방해 준 약을 먹으면 잠시 가라앉았다가 

약을 끓으면 또다시 일어나는 발작!


낡은 육신의 운영체계에 혼란이 일어나 

뇌가 잘못된 경보를 흘리고 있나?

오작동된 공습경보의 사이렌 소리처럼 

내 촉각의 오작동 가려움증 심히 괴롭다.


긁고 싶은 세상 한평생 못 긁었으니 

제 살이라도 박박 긁어보라는 자학인가?


도대체 

이 가려움증의 업보는 무엇이란 말인가? (임보, ‘가려움증’에서)



오늘 병원에 간 내 삭신도, 한 달 내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몸을 긁어대는 보스코의 ‘업보’도 그 시를 읽으며 위로가 될 듯하다. 아마 그 나이 남자들이 예사로 걸리는 병이려니 하고… 이소영 작가의 책 제목이 『그림은 위로다』였는데 임보 시인의 시에는 환장할 가려움증에도 “시는 위로다”라고 부제를 달아야겠다. 



그 시구에서 힘을 받았는지 보스코는 일어나 글 쓰는 작업을 계속하고, 나는 엊그제 새로 산 남편의 남방 소매를 줄였다. 배는 자꾸만 나오는데 팔은 길어지지 않으니 짧은 팔과 불룩한 배에 안겨야 하는 아내에게는 불운이다. 며칠 전 jtbc 출연 화면에서도 양복 밖으로 삐어져나오는 그의 배만 눈에 거슬려 소리는 들리는 둥 마는 둥 하였다. 하지만 요즘처럼 이 암담한 세상에서 그 짧은 팔로도 소위 ‘사회적 사랑’으로 이 민족을 안는데는 넉넉한 듯해서 ‘배 좀 줄여요!’ 잔소릴 멈추고 그냥 옷소매만 줄이기로 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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