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호박 반쪽과의 전쟁’
  • 전순란
  • 등록 2019-04-08 10:29:45

기사수정


2019년 4월 7일 일요일, 흐림



한 달에 한번, 매달 첫 주에 단성에 사시는 임신부님이 누님 임봉재 선생님과 함께 문정공소에 미사를 드려주러 오신다. 셋째 주 저녁엔 함양본당 주임신부님이 오시기에 공소에서 한 달 두 번의 미사는 대단한 특전이다. 오늘도 임신부님은 일찍 오셨다. 누님만큼이나 부지런하고 철저한 삶을 사는 분이다. 그분이 ‘네오까떼꾸메나또’ 공동체를 지도하시는 것도 어쩌면 지나칠 만큼 철저하게 사는 그들 모습이 신부님의 생각이나 생활과도 통해서일 게다.



그 회원들은 애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하느님 선물로 여겨 셋이고 넷이고 다 낳는단다. 얼마 전 어느 부부의 여섯 번째 아이의 유아세례를 주기도 하셨단다. 세례도 물에 몽땅 몸을 담그는 침례로 받고, 사순절에도 얼마나 열심인지 부활성야 미사도 장장 6시간을 거행한단다. 본당에 교무금을 내고도 자기들 끼리 많은 돈을 내서 활동을 한단다. 어떻게 보면 근본주의 같지만, 내 열심을 뽐내 남을 비판하지 않는 다면 철저하게 사는 삶은 바람직하다. 가끔 본당공동체와 동떨어져 무슨 개신교 종파와 같아질까 주교님들이 걱정한다는 보스코의 평이다.



미사 후에는 우리 공소 교우들 간 친목도 도모할 겸 각자 음식을 해올 수 있는 사람들이 음식을 해 와서 나눠 먹었다. 작은 숫자가 음식을 해오지만 넉넉하게 가져와 늘 먹고도 남는다. 막달레나는 떡과 계란, 나는 감자와 고구마, 사과와 커피와 우유를 준비했고, 도정 글라라는 맛있는 유부초밥을 해왔다. 남은 음식은 봉재언니에게 싸드렸다.


까밀라 아줌마가 당신이 아껴두었던, 잘생긴 늙은 호박을 쪼개서 글라라와 내게 반통씩 나눠 주었다. ‘껍질이 깡깡해서 쪼개기 힘들었어예.’ 했는데 과연 나중에 식칼로 껍질을 까며 무슨 말인지 호되게 알았다. 


아줌마네 호박넝쿨 건너편에 가동댁 박넝쿨이 있어 지난 늦여름 보스코와 저녁산보를 할 때면 달밤에 피어나는 박꽃의 황홀함에 찬사를 보내곤 했는데, ‘깡깡한 껍질’은 그 황홀토록 아리따운 박꽃에 원인이 있었다. 호박은 호박인데 껍질은 박이었다.



글라라에게 반쪽 호박을 어떻게 처리했느냐 물어보니 네모난 큰 칼로 자르다 자르다 못해 도마를 망가트릴 것 같아 아예 쪄서 속을 파냈단다. 착하고 평화주의자인 그녀다운 호박 속 채취 방법이다. 나는 닭모가지 내려치듯 제일 큰 칼로 호박을 찍어내어 일일이 껍질을 쳐냈다. 다 성격대로 하는 일이라 ‘성질이 지랄지랄지랄인’(보스코의 아내 평) 나는 호박과의 전투 끝에 호박인지 박인지 모를 괴물체를 처단하는데 성공하긴 했는데 쳐들기도 힘들만큼 팔이 절단났다. 그래도 승리의 기쁨으로 ‘호박 반쪽과의 전쟁’을 무용담처럼 얘기하는 나를 보스코는 웃음을 참아가며 잘도 들어준다. 부창부수다.


비가 오려기에 비온 뒤 씨앗을 뿌리려고 밭을 호미질하는데, 퇴비 봉지를 열자마자 ‘깔따구’가 연대비행으로 달려든다. 양파망모자를 쓰고 내려가서 다행이지 아니면 보스코와 진이엄마 며칠 전 얼굴처럼 퉁퉁 부을 뻔했다. 망 밖에서 먹을 것을 두고 침을 흘리는 그 날벌레들이 위윙거리는 기분은 살모사가 우글거리는 정글을 지나가는 기분이랄까? 



이번 겨울이 너무 따뜻해서 힘든 여름이 될 것 같다고들 한다. 아직 여름도 안 왔는데 벌레들과의 기나긴 싸움을 어떻게 당할 것인가 걱정이 앞선다. 올여름 텃밭농사는 ‘적과의 동침’ 정도로 무드있게 치르기로 심호흡으로 맞기로 했다. 모처럼 소량이나마 오후에 비가 내렸다. 


모니카씨가 울릉도취(부지깽이나물)를 한줌 꺾어들고 올라왔다. 식사도 못하고 병실에서 차츰 사위어가는 남편의 마지막을 혼자서 지켜보기가 무척 힘들게다. 한때는 아이들이 가득차 시끌벅적하던 집안이, 자식들 하나둘 도시로 결혼으로 떠나고, 옆방에서 긴긴밤 해수기침으로 뒤척이던 영감마저 떠나면 ‘칠흑같은 적막이 내리는 세월만 밤낮으로 남는다’는 상상만으로도 견디기 어렵단다. 


아~ 인간이 지닌 위로의 말들이 이토록 빛을 잃으면, 우리가 가진 믿음만이 유일한 의지가 된다. ‘이제와 우리 죽을 때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신음이 절로 난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