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강의를 마치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교우 자매가 “신부님 제발 정치 얘기 좀 그만 하면 안 되나요?” 라고 말한다. 그날은 4월 16일이었다. 그 자매는 내게 “부모가 죽어도 5년 동안 리본 달고 다니나요? 신부님이 자꾸 의도적으로 특정 정치를 옹호하는 것으로 들리네요”라고도 말했다.
그날 강의 중에 했던 나의 발언을 돌아보았다. ‘세월호는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다. 사고 발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의혹이 하나, 둘이 아니다. 특히 왜 아이들을 구조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구조를 하지 않은 것인가에 대해 전문가들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세월호 침몰에 관련된 CCTV 및 기록장치에 충돌 전후 중요한 시간의 기록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이 사고에 대해, 보다 정확한 조사와 사고의 원인과 과정에 대해 한 치의 의혹이 없이 밝혀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사고는 다시 우리의 일상을 위협할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국가와 종교와의 문제에서 저 멀리 로마시대부터 지금 2019년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다. 특히 근현대 국가에 이르러 종교의 정치참여를 적극적으로 배제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다. 종교가 권력과 자본을 가진 기득권자들의 편에 서 있을 때 사회 변화와 개혁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근대시민들의 요구가 혁명에 반영되면서 프랑스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 건설의 이념적 기초를 세계인들 앞에 내놓았다.
본래 종교는 사회적인 약자와 차별받는 자들, 보호가 필요한 ‘버려진 돌’들을 주워 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예수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는 이들의 벗이 되었다. 세리와 창녀, 가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의 편이 되어 그들에게 빵이 되고 술이 되었다. 억울하고 답답한 이들의 편이 되어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강물처럼 흐르게 만드는 것이 예수의 전도여행이었다.
종교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권력과 돈의 놀음에 종교가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처음의 발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 운영자들은 약자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련의 연대를 정치적 쟁점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그러한 연대를 불온하게 설명한다. 이러한 종교권력의 권력지향적 정치참여가 선량한 의지를 가진 다수의 연대와 참여에 거꾸로 걸림돌이 되고 있다.
“신부님 제발 정치 얘기 좀 그만 하면 안 되나요?”라고 물었던 그 자매에게 묻고 싶다. 우리들의 높으신 추기경님들과 주교님들이 유력한 정치인들과 회동하고 예방을 받고 자칫 그들에게 유리할 것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할까요, 또 제1야당의 원내대표 정치인은 가톨릭신자라는 것을 적극 내세우며 종교 마켓팅을 벌이고 있는데, 이것은 또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정치인들이 종교를 악용하며 자신들의 정치에 이용하는 것이나 종교수장들이 유력한 정치인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국가예산과 지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더 정치에 간여하는 것은 아닐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그들이 통치하니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의 통치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그들이 더 잘 통치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능력껏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르면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입니다. 정치는 공동선에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 사형을 내린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뒤로 물러나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뭔가 기여해야 합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참여함으로써 통치자들이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2013년 9월 16일 성녀 마르타의 집 소강당에서 미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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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1976년 명동 구국선언 사건으로 옥고를 겪으신 신현봉 안당 신부님의 영세신자로 한때는 신 안당 신부님과 반정부 활동을 했으나, 귀하와 같은 사람 때문에 냉담 중인 카톨릭입니다. 사제도 국민이기 때문에 당연히 정치비판을 할 수 있습니다. 현실정치 비판은 사제의 정치참여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강론이나 사목을 통한 사제의 정치비판은 편향되어서는 안 되고 보편적(catholic)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다양한 정치성향의 신자를 가진 카톨릭 사제가 취해야 할 정치비판의 한계입니다. 어떤 정치비판이 특정 정치조직에 편향된다는 판단이 들면 사제는 자제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정치비판의 기준과 한계가 모호하므로 편향성을 가늠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제들이 정치비판을 아예 삼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월호 비판이 좋은 사례입니다. 세월호 비판이나 세월호 리본이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방법이라면 지나치게 기괴하며 한국의 전통제례나 의례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세월호 리본을 기억의 상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월호 리본은 정확히 박근혜 대통령 개인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것을 이용한 특정 정치세력의 권력도구로 인식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월호는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자기고백에 다름 아닙니다. 세월호라는 존재적 사실(being)이 박근혜가 책임져야 한다는 규범적 당위(oughtness)가 되려면 수많은 세부적인 규범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카톨릭이라는 신념의 체계나 사제의 법복은 존재적 사실을 당위적 규범으로 만드는 자동전환 시스템이 아닙니다. 단순히 대한민국 대통령이기 때문에 세월호 전복사고에 총체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정서주의적 폭력입니다. 귀하에게 묻겠습니다. 292명이 죽은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 침몰사고와 101명이 죽은 1993년 4월 28일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에 대해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씨는 어떤 책임을 졌습니까? 192명이 죽은 2003년 2월 18일 대구 중앙로 지하철 화재사건에 대해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씨는 어떤 책임을 졌습니까? 그것이 304명이 사망, 실종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전복사고와 무엇이 다릅니까? 적폐의 표면적 양상만 다를 뿐 서해훼리호 사고나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나 중앙로 지하철 화재사고나 세월호 전복사고에서 적폐의 누적 과정은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전복사고의 제1원인은 복원력을 상실하게 만든 선박 불법 증축입니다. 1993년 서해훼리호 사고 이후로는 여객선 운행 안전관리를 선사들의 이익단체인 해운조합에 맡겼습니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니 여객선에 실리는 화물선적 안전점검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초기에는 안전관리 예산지원을 하다가 노무현 정권에서는 그것마저 완전히 중단했습니다. 세월호 전복사고가 일어날 수박에 없는 불합리를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권을 비롯한 어느 정권도 개선하지 않았습니다. 세월호 전복사고는 부실한 안전관리 시스템 위에 설상가상으로 선박 불법 증축이 더해지고 안전 불감증이 누적된 총체적 폐해의 필연적 결과일 뿐입니다. 여객선 운항 안전관리 예산을 전액 삭감한 당시 대통령 노무현씨는 무슨 책임을 졌습니까? 세월호 선박 불법 증축에 책임이 있는 당시 대톨령 이명박씨는 무슨 책임을 졌습니까? 카톨릭은 성모 마리아의 무염시태라는 불안정한 신념 체계 위에 서있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세월호라는 존재적 사실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판단으로 무염시태와 유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성직자가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유독 세월호 전복사고에서만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 보시기 바랍니다.
미사 중 주임신부님이 편향된 정치적 강론을 하시다가 잠자코 앉아 있던 신자들 중 한 형제님이 벌떡 일어나 소리치며 강하게 반박하던 모습을 곁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교우들은 이전부터 신부님의 정치성향에 따라 분열되어있던 터였습니다.
신부님은 종교적인 주제를 넘어 정치에 대해 발언 할 수 있습니다. 이때 특정 정치적 판단을 신자들에게 강조할 경우 신부님은 신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분열시키며 교회를 등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됩니다. 지금은 과거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국민들에게 정의와 희망을 주던 군부독재 시절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성숙해진 민주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부님 개인의 정치적판단을 신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다 큰 어른들에게 억지로 밥을 떠먹여 주는 모양이 아닐까요. 교우들의 정치관과 시국관이 오히려 신부님보다 적어도 세속적으로는 정확하고 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신부님은 특정 정치편에 서는 것보다 중립적 입장에서 교우들이 큰틀에서 정치상황에 대한 복음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역할에 머물러야 합니다. 숲을 보도록 이끄는 역할은 신부님이 하고 그 숲속의 나무들을 그리는 것은 교우들의 신앙적 자유에 맡기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글속의 자매님과 같은 분을 만나거나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납니다. 그리고 신부님이 고생 많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