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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코로나 이전(Before Corona)과 이후(After Disease)
  • 지성용
  • 등록 2020-07-08 18: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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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께서 지난 성지주일미사를 홀로 지내셨다. 바티칸 성당은 텅 비어있다. 성지주일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며 소리를 치고 환호한다. 팔을 흔들며 “찬미받으소서!”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이렇게 사나흘이 지나고 모여든 군중들은 갑자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살인과 강도짓을 저지른)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소리 지른다. 도대체 왜, 예수를 환호하던 인파들이 며칠 만에 돌아서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는가?


코로나 이후 (After. Disease. 1년) 


인류는 지금 세계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 아마도 우리 세대의 가장 큰 위기일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갈 세상을 계획해야 할 뿐이다. 그 새로운 세상은 이미 와 버렸고 ‘우리는 이제 어떠한 삶을 살게 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회는 큰 혼란이 예상된다. 주일미사와 주일예배 참여를 중요한 의무적 신앙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그리스도교회가 초유의 바이러스 사태로 물리적인 집회를 중단하고 멈추는 일이 벌어졌다. 천주교회는 사순시기나 대림시기가 되면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고 성사참여의 여부에 따라 신앙생활자와 냉담자(신앙을 멈추어 선 사람들)로 구별했는데 여러 가지 신학적인 논란과 현장에서의 혼란이 예상된다. 


‘예수님의 피로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적으로 배고프다, 바이러스는 무섭지 않다!’고 인터뷰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소금물을 입에 뿌려대면서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래도 주일 미사와 예배를 강행해야 한다는 종교인들을 바라보며 종교는 이미 ‘사회악’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혼란스럽다. 헌금, 십일조를 온라인으로 입금하라는 사목자들이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재난기본소득을 위한 재정편성과 효율적인 분배를 위해 고심하고 있는 이런 엄중한 시기에 헌금을 온라인으로 입금하라는 것은 조금 낯 뜨겁지 않은가. 


하긴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온라인 결혼식’이나 ‘마스크 5부제’, ‘온라인 개학’, ‘온라인 수업’ 등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장년층은 젊은 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온라인, 비대면 경제활동이 생각보다 편리하고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재택근무든, 온라인 쇼핑이든, 온라인 미사, 온라인 예배 등 진입장벽이 한번 무너지면 바이러스처럼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것이다. 


습관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모두의 행동이 바뀌면 공동체의 문화가 달라질 것이다. 초중고 학교들의 개학이 연기되다가 급기야 온라인 개학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학생들은 태블릿 PC와 인터넷 방송을 통해 학교수업에 온라인으로 참여하는 학습형태가 공적영역에서 시작되었다. 정상적인 시기에는 정부, 기업, 교육위원회가 그런 실험을 하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평범한 시기가 아니다. 이 정도의 사회적 변화가 다가왔다면 대규모 종교집회나 오프라인에서의 종교집회 또한 무력화되지 않을까.


인간 바이러스의 n번방 사건, 본질은 디지털을 통한 지배욕


코로나 바이러스 정국에서 대한민국 사회를 다시 한 번 강타한 인간 바이러스 같은 끔찍한 사건이 터졌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온라인 메신저 안에서 미성년 아동들을 상대로 디지털 노예생활과 성적 착취를 일삼고 26만 명이 넘는 이들이 고액의 비용을 지불해가며 이를 이용했다는 소식에 우리들은 다시 커다란 시대와 사회의 어둠에 직면해야 했다. 


서울대 학생들은 기자회견을 하며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와 성차별적 구조를 타파하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n번방 사건을 막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맞다! 그러나 ‘n번방 사건’의 본질은 음란물을 돈을 주고 매매한 그릇된 성욕 해소만이 아니다. ‘n번방 사건’은 ‘인간에 대한 지배욕’을 돈을 지불하고 폭력으로 해소하는 것이 ‘상품’이 된 것이며, ‘여자지배 상품’ 장사가 4차 산업시대를 맞이하면서 진화되어 디지털 인신매매 ‘상품’으로 변화된 것이라는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여기 코로나 사태의 한복판에서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가 제기한 ‘전체주의적 감시’와 ‘시민의 권한’ 사이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정부와 기업들은 사람들을 추적하고, 감시하고, 조종하기 위해 훨씬 더 정교한 기술을 연구 사용해왔다. 사람들에게 체온과 의료 상태를 확인하고 보고하도록 장치하고 의무화하면서 의심되는 코로나바이러스 보균자를 신속하게 식별했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다양한 모바일 앱(응용프로그램)은 시민들이 감염자에게 접근하지 않도록 경고를 보냈고 해외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은 위치와 동선을 파악하는 앱을 무조건 모바일에 장착해야 했다. 


유발 하라리는 경고한다. “(전염병 감시시스템은) 감염 경로를 빠르게 차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무시무시한 밀착 감시시스템에 합법성이 부여된다고 가정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가령 감시시스템은 특정 영상을 보면서 내 체온, 혈압, 심박수를 파악할 것이며, 나의 희노애락을 식별할 것이다. 기업과 정부가 우리의 생체 정보를 일괄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다면 시스템의 운영자, 그들이 정부건 기업이건 간에, 그들은 우리들의 감정을 예측, 조작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품이든, 정치든 무엇이든 팔려고 할 것이다. 이제 ‘n번방의 지배’를 넘어서는 자치단체와 국가정부의 개입이 일상으로 다가오는 전체적 통제와 지배욕을 가능케 하는 4차 산업시대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실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것은 이후 소위 ‘전문가들의 독재(Tyranny of Expert)’, ‘기술자 독재(Technocracy)’, ‘의료 독재(medical dictatorship)’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예측도 있다.


글로벌 교육과 연대의 필요성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직면하는 중요한 선택은 “국수주의적 고립과 세계적 연대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전염병 그 자체와 그에 따른 경제 위기는 세계적인 문제다. 그것은 오직 세계적인 연대와 협력을 통해 효과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세계가 똑똑히 보았다. 무엇보다도 바이러스를 물리치기 위해서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 19바이러스가 어떻게 주변 국가들에 전파되었는지, 진단키트를 개발하고 감염의 원인과 경로를 발견하고 그렇게 축적된 정보를 세계적으로 공유하고 확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인간만이 가진 큰 장점이었다. 


바이러스나 다른 생명체들은 정보를 공유하고 확산시키며 연대를 만들어 내기는 어렵다. 영국 정부가 여러 정책 사이에서 망설일 때 이미 한 달 전에 비슷한 딜레마에 봉착했던 한국인들로부터 영국의 전문가들은 시의적절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앞으로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협력과 신뢰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진단 키트와 인공호흡기 같은 의료 장비를 생산하고 보급하기 위해, 적절한 의료진을 모아내기 위한 세계적인 노력이 앞으로도 필요할 것이고, 경제분야에서의 세계적인 협력, 여행문제에 대한 세계적인 합의를 도출해 내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중요한 연대의 일환이 될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몇 달 동안 모든 해외여행을 중단하는 것은 엄청난 어려움을 일으킬 것이고,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전쟁을 방해할 것이다. 국가들은 과학자, 의사, 언론인, 정치인, 사업가 등 필수 여행자들이 국경을 계속 넘도록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세계지도자들에게 촉구했다. “인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분열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글로벌 연대의 길을 택할 것인가. 만약 우리가 분열을 선택한다면 이것은 위기를 연장시킬 뿐만 아니라 아마도 미래에 더 심각한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세계적인 연대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승리일 뿐만 아니라, 21세기에 인류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모든 미래의 전염병과 위기들에 대한 승리일 것이다.” 라고.


코로나19 이후 4차 산업혁명이 급속도로 이뤄질 것이며 이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할 시기임에 틀림없다. 사회, 경제적으로 평온한 시기에는 혁신이 일어나기 힘들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계는 스마트워크, 원격의료·교육 등의 혁신을 적극 수용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로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김범수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는 교육 방식의 혁신을 꾀하는 ‘조지아텍’을 예로 들며 “전 세계에 원격수업 수강생은 1억 명이 넘고 개설된 과목도 1만3500개가 넘지만 한국은 700여개 정도”라며 “원격수업은 누가 더 양질의 교육 콘텐츠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생존경쟁, 구조조정을 촉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존의 학교교육방식도 이제 새로운 방향으로 구조조정이 될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종교는, 지금과 같은 미사와 성사를 중심으로 성당 안에서, 교회 안에서 집단으로 모여 기도하고, 노래 부르고, 성경공부에 교리 공부하고 헌금 내는 신앙생활들이 이후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의문이다. 


가톨릭교회는 전국 병상의 반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최첨단 의료시설과 장비,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의료진을 보유한 최고의 의료 클러스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톨릭사회복지회는 전국적으로 수많은 복지시설과 단체를 촘촘히 운영관리하고 있다. 수많은 평신도,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의료현장에서 사회복지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위기에 보다 능동적인 연대를 세상에 요구해야 한다. 


이탈리아의 성당이 무덤이 되어버린 뉴스를 보면서 필요한 이들의 자리가 되어주는 것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지만 전례가 멈춘 성당이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세상과 대화하지 못하는 성당이 무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공간이, 노숙인들의 급식소가 되고, 목욕시설을 제공하고, 동네주민들이 모여 코로나 사태에 대해 토론하고, 청소년들에게 직업과 미래를 고민하는 멘토들이 상주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 수 있었다면 성당을 시신안치소로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수가 살해당한 이유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왜 예루살렘을 둘러싼 백성들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하다가 이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던 것일까?


예루살렘 백성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가 세상을 바꾸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줄 강력한, 절대자라 믿었다.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나 광야에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다는 얘기나, 눈먼 소경을 보게 했다는 이야기에 열광했던 백성들은 빌라도 앞에 끌려 나온 예수를 보았다. 너무나 무기력했고, 체포되어 얻어터져 온 몸이 성하지 않았다. 우리가 믿던 하느님이,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던 하느님이, 눈먼 자를 보게 하고, 귀먹은 자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던 하느님이 저렇게 당할 수 있나? 그들은 실망했고, 그동안 그에 대한 풍문은 모두 거짓이었다는 생각으로 치닫는다.


이때 가야파는 말했다. “우리 모두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지키던 대사제와 율법학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은 성전의 이해관계에 얽혀, 먹고 살아야 했던 무리들이었는데 예수의 소문과 여론으로 그들의 이중적인 삶이 드러나는 것, 하느님보다는 재물을 선택하고 있는 그들의 삶을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의 악의적인 비방과 가짜뉴스, 뒷담화는 예수에 대한 여론을 급격하게 악화시켰다. 예수의 반대자들의 악선전과 선동은 예수를 파렴치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데 충분했다. 그것은 대사제의 권위와 바리사이, 사두가이들의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의 거짓된 ‘표피적 신망’ 때문이기도 했다.


예루살렘 입성 후에 예수가 했던 첫 번째 일은 성전 상인들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곳이다. 너희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라고 하시며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에게 휘두르시고, 가판을 둘러 엎어버리셨다. 밥그릇을 걷어차인 성전 상인들은 급 분노, 급 결속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의 상권과 이권이 무너질 것이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결국 죽음의 골고타를 올라가야 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은 무엇인가? 우리들은 왜 신을 믿고, 교회를 나가고 있는가? 교회를 믿는 것인가, 예수를 믿는 것인가? 지금 미사에 성당에 나가지 않으면 예수를 만날 수 없단 말인가? 이미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그분의 삶을 이야기로 들었을 때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믿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았고, 내가 살아야 할 삶의 방향을 찾았다. 그리고 내 인생의 중심에 그분을 세웠고, 그분의 정의, 평화, 사랑을 나의 모토로 살아가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성전은 우리 안에 있다. 공동체는 그러한 성전을 지켜주기 위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가 성사로써 보여지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우리 모두 각자의 길을 하늘에 물어야 한다. 그 동안 나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고 또 묻고 나의 길을 찾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고백록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 내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공동선> 2020년 5, 6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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