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대학교 교수이자 정치철학자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이 지은 정치 철학서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는 미국에서 10만 부 남짓 팔리는 정도였으나, 대한민국에서 유독 크게 인기를 끌어 2010년 7월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였고 인문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100만 부를 넘게 팔았다.
당시 2010년 이명박 정권 시절 ‘정의’라는 키워드가 이렇게 많이 팔린 이유는 많은 이들이 2010년을 살아가면서 ‘정의’에 대한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불의와 부조리에도 사회정의를 관장하는 법집행기관들은 애매하고 모호한 논리로 사건들을 처리했고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혼란과 물음을 던졌던 것이 사실이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과 2010년 한명숙 총리의 기소와 재판 등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의식분열과 인지 부조화는 ‘정의(justice)’를 다시 ‘정의(definition)’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전에는 선과 악, 빛과 어둠, 천사와 악마, 선인과 악인, 독재와 민주, 정의와 불의라는 구도가 명징해서 선을 위해,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인생을 던져 투신했던 시대가, 세대가 있었다. 내 인생을 걸고라도 싸워야 할 악이 있었고, 나를 헌신해서라도 지켜야 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이 있었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주창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의 꿈이 사라져 가는 듯했고, 정의로워야 할 검찰이 ‘논두렁 시계’를 조작하고 언론이 받아적었다. 당시 같은 천주교 사제로서 모 대학에서 강의를 같이했던 K신부의 경향신문 ‘시계나 찾으러 가자!’는 칼럼을 읽다가 한참을 멈추어 섰다. 그는 말했다.
“어느 정도 공인이라면 공인일 나의 신분에서는(가톨릭교회의 사제) 찬반양론이 극명하게 갈릴 소지가 있는 사안들에 대해서, 특별히 정치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이쪽이건 저쪽이건 그 어느 편도 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저 입을 다물고 피해 있는 것이 상책일 것 같다. 그러나 선물이나 돈을 주고받은 얘기는 굳이 정치적인 사건이라 할 수 없을 것이고, 주었다는 쪽이나 받았다는 쪽이나 주고받음 그 자체에서는 양자가 분명한 상황이니 굳이 찬반양론으로 편가르기도 되지 않을 내용인 것 같아 이렇게 쓰기로 한다.”
그는 서민들의 심리적 공황과 젊은 청춘들의 고단한 노동을 걱정하며 ‘시계를 찾으러 가자’ 말했다. 이후 나는 그래도 오랫동안 참고 보아오던 경향신문을 끊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한명숙 전 총리의 억울한 옥살이는 진보진영 안에 이렇게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정신은 K신부의 말처럼 ‘이쪽이건 저쪽이건 그 어느 편도 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저 입을 다물고 피해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1981년 민주“정의”당
광주항쟁의 피도 마르기 전에 전두환은 신군부세력을 규합하여 안정, 평화, 균형을 슬로건으로 ‘민주정의당’을 창당했다(1981년 1월15일). 대한민국 정당사에 처음으로 ‘정의’라는 말이 들어왔지만 그들은 정의롭지 않았다. 그들은 민주적이지도 않았고 평화를 원하지도 않았다. 1981년의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였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생 야당인 신한민주당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지역구 제1당에 전국구 2/3(61석)를 배분하는 선거법 덕에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민주정의당은 독재정치와 인권유린으로 국민들의 반감을 샀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된 6월 민중항쟁을 겪으며 창당 이후 최대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켜 기사회생하는 듯 보였다. 요사이 동체수색이 진행되는 KAL858기 사건도 이맘때 일어난 국가적 재난이었지만 석연치 않은 의혹을 남겨둔 채 우리들 기억 속에 불온한 사건으로 ‘봉인’되었다. 역사 속의 ‘6월 항쟁’과 ‘KAL858기 사건’으로 전두환의 ‘정의’와 천주교의 ‘정의’가 충돌했다. 군사독재의 수뇌들은 광주항쟁도 북한 간첩들의 소행으로 몰았고, KAL858 역시 북한의 소행으로 몰아가며 ‘정의’를 간판으로 걸고 온갖 ‘불의’를 자행했다. 그들의 이름은 ‘민주정의’였다.
1974 “정의”구현사제단
1974년 천주교 원주교구의 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민청학련 구속사건을 계기로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었다. 사제들은 유신반대, 긴급조치 무효화 운동, 민주헌정 회복운동,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한민국 사회 안에서 ‘정의’로운 죽비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믿음을 주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19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천주교 교세는 2%에 지나지 않았지만, 천주교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J.O.C.(가톨릭노동청년회)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 운동, 정일우 신부와 제정구 의원이 중심이 된 천주교 도시빈민 운동, 가톨릭 대학생들의 전국가톨릭대학생연합 등이 ‘복음의 자리’가 되면서 교세는 10%를 육박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비록 독재자의 초대였지만 두 번의 교황 방문과 더불어 천주교는 신뢰받는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지학순 주교는 1970년 4월 28일, 서울 종로 YMCA에서 ‘삥땅 심포지움’을 주최한다. 요즘은 볼 수 없지만, 버스안내양이라 불리는 소녀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도시로 돈 벌러 나와 집안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를 내주었던 소녀 가장들이었다. 70년대에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하고 그들이 받는 일당은 고작 540원(1977년 기준)이었다. ‘삥땅’이라는 부수입이 없다면, 딸린 식솔들을 책임지기 어려웠다. 교회에 다니던 한 소녀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인 삥땅을 챙기다가 어느 순간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교회의 가르침과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 가운데서 고민하던 버스안내양은 서울 시내 한 교회에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그 교회의 목사는 섣불리 답을 주지 못했고 그 편지의 내용은 서울 시내의 교회와 성당 등지로 순식간에 퍼지게 된다. 수많은 목사와 사제들이 정확한 답변을 주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리고, 지학순 주교는 누구보다 명쾌하고 확실한 답을 내리게 된다.
“버스회사 과장님, 시청 교통과장님, 경찰서장님, 그리고 장관님들. 여러분들은 월급만 가지고 생활할 수 있습니까? 아니, 그렇게 생활하십니까? 이 소녀에게 도둑질을 했다고 욕할 수 있는 분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지학순 주교가 지적한 것처럼 전 사회적으로 부패가 만연했다. 누가 누구를 나무랄 상황이 아니었거니와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비용으로 생활해야 했던 버스안내 노동자들의 참담한 생활에 지 주교는 힘을 실어 주었던 것이다. 이 심포지움을 통해 당시 버스 안내양들의 열악한 근무조건이 소상히 공개되었으며, 생존권과 관련된 노동자들의 의식이 깨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천주교회의 사제들은 거시적인 국가폭력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에서 다가오는 아픈 사연들과 연대해서 이 땅의 정의를 기초로 한 인간의 존엄과, 인권, 민주화, 평화, 통일을 위해 헌신했던 뿌듯한 과거의 역사를 가지고 살아왔다.
2008년 7월 1일자 한겨레 사설은 정의구현 사제단의 사회적 역할과 종교적 책임에 대해 극찬했다. “엊그제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사제단)의 시국미사가 깊고 넓은 울림을 준 것은, 의를 위해 당하는 이들의 핍박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있었느냐며 던진 따듯한 위로였던 까닭이다. 그래서 촛불은 본래의 평화와 기쁨으로 타올랐고, 헌신과 사랑으로 어둠을 밝혔다. 공권력은 당황했다. 그들이 자랑하던 군홧발과 몽둥이, 방패, 물대포, 구속영장 따위는 머쓱해졌다. 그들은 권력이 일제히 퍼부은 협박과 이간책과 색깔 씌우기가 촛불을 고립시킬 줄 알았다. 그러나 촛불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도저한 평화의 대오를 이뤘으니, 이제 무엇으로 감당할 것인가(…).”
필자는 바로 6월 30일 서울시청 앞에 다시 모여든 많은 민중과 함께 서 있었던 작은 사제로서 흔들리는 촛불 그러나 꺼지지 않는 촛불과 민중의 함성으로 용기를 얻었고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 신문 칼럼을 읽어 내려가며 어젯밤 진정 ‘살아있었음’을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지금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은 침묵 수행 중이다. 지금 사제단은 민주당보다 더 정치공학적이다.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정의”당이라는 이름까지
통합진보당 부정 경선 사건으로 열린 2012년 5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난투극은 정의로운 진보정당을 열망하는 대다수의 범 진보진영에 큰 상처를 주었다. 강당에서 오가는 물리적 충돌로 인해 일부 간부들은 당원들에 의해 옷이 찢겨지거나 머리카락이 뜯기는 등의 부상을 당했고 장내는 주먹과 발길질 등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분란은 2시간 가까이 진행되다가 겨우 진정되었다.
결국 정의당은 진보정의당 창당을 주도했던 국민참여당 출신의 국민참여당계, 자주파 세력의 일부인 인천연합계, 평등파 세력인 새진보통합연대계(진보신당 탈당 세력)의 3개 조직과 창당 이후 입당한 대다수 당원으로 구성되어 2012년 10월 7일에 창당발기인대회를 통해 당명을 확정짓고 ‘진보정의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2013년 7월 21일, 당원 총투표를 거쳐 당명을 “정의당”으로 바꾸었다. 정의당은 대한민국 21대 총선에서 6명의 의원을 배출하여 현재 원내 3당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정의”기억연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1990)의 업적과 활동을 계승하고,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2016)의 설립 취지와 활동을 이어받아 2018년 7월 11일 통합 출범했다. 정의연은 일제 식민주의, 군국주의, 가부장제의 산물인 일본군 성노예제의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가해국 일본정부의 범죄인정, 진실규명, 공식사죄, 법적배상,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대책마련(추모, 사료관건립, 교육) 등을 통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목표로 시작했다.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에 기여하며, 역사교육 및 추모사업 등을 통해 미래세대로 하여금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올바르게 기억하게 하고, 무력갈등 및 전시 성폭력 재발 방지와 전시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위해 활동했다. 특히 일본대사관 앞의 ‘수요시위(1438차)’는 일본에 적지 않은 부담을 주고 있었다. 동시에 전국 각지에 세워지는 ‘평화의 소녀상’과 최근 일본과의 무역갈등으로 빚어진 일본제품 불매운동으로 한일관계는 어느 때보다 더 어려운 국면으로 흘러들고 있다.
일본 아베 정부는 한국과의 관계악화로 인한 경제적 피해 규모가 확대되는 시점에 코로나 19 사태에 대한 적절하지 못한 대응, 부정부패 스캔들로 최악의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여기서 뜻하지 않은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극일 운동의 깃발이었던 정의기억연대는 온갖 의혹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용수 할머니는 ‘성노예’라는 명명에 모욕감을 나타냈다. “제가 왜 위안부고 성노예냐. 왜 그 더러운 성노예라고 하냐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라고 말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열리는 수요시위(수요집회)의 정확한 명칭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로 명명되었다. 유엔이 인정하는 공식 표현이 ‘강제 성노예’다. 정의연은 설명자료에서 “‘성노예’는 피해자를 매도하기 위한 용어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피해의 실상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학술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라고 밝혔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2018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로 거듭났다. 필자는 그들이 왜 ‘정의’와 ‘기억’이라는 이름을 조합해야 했는지를 돌아보았다. 추측컨대, 할머니들은 점차 하늘로 떠나가시는데, 일본의 태도는 좀처럼 변하지 않고, 정부의 미온적이고 애매모호한 태도는 운동을 장기화시키고 있으니 후대가 기억하고 이어받아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기억’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또한, 당시 서울대 이승만학당을 중심으로 한 뉴라이트계열의 친일학자들이 위안부 문제와 징용배상문제에 대해 강력한 반대여론을 형성하며 운동의 동력에 대한 혼선이 생겨나는 것을 우려하며 ‘정의’라는 강력한 단어를 선택함으로써 운동의 근본 취지를 앞세우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열 개를 주어도 하나를 주지 않으면 ‘주지 않은 사람’이 된다. 열 개를 주지 않다가도 한 개를 주면 결국 ‘준 것’으로 기록된다. 정의연은 이용수 할머니에게 준 아홉 개를 나열했다. 정의연은 인도적 지원단체도, 복지단체도 아니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의 용기 있는 증언 이후 세상에 나온 240명의 국내 피해자들은 물론 전 세계 피해자들과 함께 생존자 복지지원, 국내외 연대사업, 기림사업, 교육사업, 연구사업, 장학사업 등을 진행해 왔다. 다시는 유사한 피해자가 발생되지 않아야 한다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유지를 받들어, 전시 성폭력 재발방지와 피해자 지원을 위한 다양한 국제 활동도 펼쳐 왔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인권단체들에 적극 개입하고 다양한 국제연대 활동을 통해 국제 여성인권규범을 새롭게 써왔다.
이 가운데 여성인권·평화운동의 당당한 주체가 되어 주신 피해자들과 함께 보편적 인권문제로서 전시 성폭력의 개념을 세우고 확산시켜온 세계적인 여성 인권운동단체가 바로 정의연이다. 정의연은 이용수 할머니에게 아홉 개를 주었지만 하나는 주지 못했다. 그 하나는 정의연으로서는 줄 수도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2015년 한일위안부 합의 당시 그런 부당한 합의를 이끌어낸 장본인 박근혜 정부의 외교부 윤병세와 더불어 청와대에 근무하던 당시 민정수석 곽상도가 이용수 할머니 기자회견에 나와 앉아있는 것을 바라보며 도대체 저이들이 열 개를 주지 않다가 이제야 준 하나가 뭔지 궁금해졌다.
‘평화의 집’ 손영미(엘리사벳) 소장님의 소천 소식에 가슴이 미어졌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한 사람 평생의 삶을 잘 알지도 못하고 언론 기사 한 줄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세평 한 마디로 도매금으로 넘겨버리는 그런 가벼움에 대해. 일상에서 제기되는 숱한 문제들에 대해 숙고하거나 검증하지 않고 아직 사회법으로 재판도 시작하지 않았고 기소조차 되지 않은 시간에 이미 사형을 선고해 버리는 세상의 무정함에 대해 돌아보아야 한다.
기다려주어야 한다. 충분히 찬찬히 설명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해주고 공감해주고, 그다음에 어떤 실수나 미흡함이 있었다면 수정하고 개선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도록 채찍질하면 될 일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을 몰아가며 ‘너는 얼마나 깨끗한데 이러냐?’라는 식으로 사람 잡으려면 세상에 의인 하나 남아날 틈이 없다.
다음 날 삼성 이재용 부회장은 4조 5천억 원 대의 회계장부 분식 사기를 하고도 구속되지 않고 구치소 문을 걸어 나왔다. 욕을 하려면, 비난하려면 사실 죄질로 치더라도 삼성이 훨씬 나쁜 놈들인데, 이것은 이미 검찰의 수사와 재판에 의해 상당수 많은 범죄들이 드러났는데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정의연에 대해서는 십 원 짜리 하나 가지고도 득달같이 달려들어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한다. 강자 삼성에게는 한 마디도 못하던 언론들이 만만한 정의연, 윤미향, 손영미 소장의 집에는 늦은 밤에까지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취재를 했다하니, 그들 ‘언론들이 가해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의 정의는 물론 완벽하지 않다. 온전하지 않다. 결점도 있고, 실수도 있다. 일이 많으면 허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하나를 가지고 30년 외길로 살아온 시민운동가를 모욕의 자리로 끌어내리는 균형 없는 언론과 여기에 편승한 여론의 가혹한 평가는 좀 더 객관적이고 신중해야 한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
케네디는 1956년 메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시절 ‘그리스도교 및 유대인 국제 연맹’ 수상 연설에서 단테를 인용했다. “단테는 말했습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이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라고.”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더 정확한 번역은 이렇다. “치욕도 명예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슬픈 영혼들이 이렇게 비참한 꼴을 당하고 있다. 하느님께 반항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았고 단지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저 사악한 천사의 무리도 섞여 있다. 하늘은 그들을 쫓아냈다. 그들이 하늘의 빛을 가릴 테니까. 그러나 깊은 지옥도 그들을 거부하니, 그들을 보고 지옥의 자들이 우쭐해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지.” (단테 알레기에리, 박상진 역, ‘신곡-지옥편’, 민음사, 29.)
‘이쪽이건 저쪽이건 그 어느 편도 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저 입을 다물고 피해 있는 것이 상책’이라는 처세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진심으로 말해야 한다. 정의 없이 평화는 없다. 정의 없이 사랑도 없다. 정의 없이는 의로운 사람 하나도 남아나지 않는다.
이 글은 <공동선> 2020년 7, 8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