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간 수요일(2021.1.20.) : 히브 7,1-3.15-17; 마르 3,1-6
오늘은 노동하는 선교로 고난의 삶을 봉헌한 사도 바오로를 통해서 메시아 백성이 지녀야 할 세 번째 정체성인 사제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의 세 가지 직무로 가르쳤습니다(평신도사도직교령, 2항).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제직이 우선입니다(사제직무생활교령, 2항). 그리고 모든 신자들이 보편적으로 사제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직무사제직을 성체성사와 함께 제정해 놓으셨습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히브 7,17). 이 말씀은 히브리인 신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계승해야 할 신앙의 전통으로서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제직을 살아야 함을 명심하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히브 7,2)을 사제 멜키체덱을 통해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유다교의 전통에서 사제직무는 레위 지파에서 맡았는데, 그들은 토지를 분배받는 대신에 나머지 열한 지파로부터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그 몫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면, 사제는 그 십분의 일을 자기와 제단 봉사자들의 몫으로 하고, 나머지 십분의 구는 성전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레위 지파와 이방인, 과부, 고아 등 토지를 분배받지 못해 가난한 이들의 몫으로 주었습니다. 이것이 사제직을 통하여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십일조 제도였고, ‘멜키체덱’이라는 이름도 ‘정의의 임금’이라는 뜻이었습니다(히브 7,2).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여주신 사제직은 구약의 세습사제직과 같이 대대로 물려받아 주어진 범위 내에서만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적인 사제직이 아니라 시나이 계약을 실현하고자 고난받는 이들의 해방을 위하여 자신의 고난을 봉헌하는 자유로운 사제직이었습니다(히브 7,16). 고난을 봉헌한다 함은 삶을 모조리 봉헌하는 것이기에 그분의 사제직은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른 사제직”(히브 7,16)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향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데 당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안식일에 율법상의 의무를 지키시려고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하필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미리 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마르코의 보도를 고려하면, 필시 손이 오그라든 그 사람은 바리사이들이 데려다 놓았음이 분명했고 이는 그들이 쳐 놓은 함정이자 올가미였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처지에 대해서 그 어떠한 연민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 계명이나 십계명의 제정취지 등에 대해서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이런 비정하고 완고한 태도를 지닌 바리사이들이 비열하게도 덫까지 놓았음을 알게 되신 예수님께서는 노기를 띠셨습니다(마르 3,5).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습니다만, 바리사이들은 평소에 앙숙으로 지내던 헤로데 당원들과 야합하여 그분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마르 3,6). 재물보다 더 귀한 지향과 노력을 하느님의 뜻대로 행함으로써 그분께 봉헌하려던 예수님의 사제직이 이렇게 하여 고난을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그분은 이 고난마저도 남김없이 하느님께 봉헌하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도 바오로 역시 만만치 않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기성 사도들로부터는 비주류의 설움을 받아야 했던 그가 과거의 동지들이었던 바리사이들로부터는 배신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직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확신했으면서도, 그 협조자는 신앙적 뿌리가 같은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구하려고 언제나 유다인 디아스포라부터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들의 안식일에 회당에서 그들을 만나서 구약성경을 읽으며 토론하면서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이심을 설득하고자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만 하면 마치 예루살렘 바리사이들로부터 사발통문이라도 도는 것처럼, 방해와 훼방과 투옥, 고문 그리고 추방 등으로 박해를 받곤 했습니다.
이러한 억울한 고난에 처하여, 사도 바오로는 더욱 근본적으로 임했습니다. 자신의 사도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제직무로서 행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계는 물론 선교활동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스스로 노동함으로써 조달하고, 신자들에게는 무보수로 봉사한 것입니다. 그가 택한 노동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다.”(2코린 11,27)는 고백으로 미루어보면 결코 만만치 않은 노동이었고 대단한 고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하느님께 봉헌하려던 그의 지향으로 말미암아 그는 박해자였던 전력 때문에 하느님 앞에 부끄러운 과거를 겸손되이 고백하면서도(1코린 15,9), 비주류 출신이라 하여 무시하기 일쑤였던 다른 기성 사도들에 비해서 자격이 없거나 능력이 모자라거나 노력하지 않는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2코린 11,5). 다만 사도로서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것만을 기쁨으로 삼았고, 오로지 신자들에게 무보수로 봉사할 수 있음을 명예로 삼았던 인물입니다.
생전에 예수님은 물론 바오로도 사제라고 불리운 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바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제직의 삶을 본받으려고 노동하는 선교활동으로 고난까지 봉헌하며 따랐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