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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 이기우
  • 등록 2023-02-22 11:5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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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2023.2.22.) : 요엘 2,12-18; 2코린 5,20-6,2; 마태 6,1-6.16-18


오늘부터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오늘 교회가 거행하는 재의 예식은 우리네 육신 생명이 언젠가는 재로 돌아갈 것을 상기시키는 한편, 우리가 육신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 지향해야 할 목적은 영원한 생명임을 상기시키는 뜻이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주신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가르침은 사순시기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안내해 주는 길잡이입니다. 


이 세 가지는 유다교에서도 전통적으로 행해 오던 종교적 관습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전통을 계승하되 근본정신에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초점은, 자선이든 기도든 단식이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겉치레로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의식하여 진정성 있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모아 산상설교에 담았습니다. 진복팔단으로 시작되는 산상설교는 하느님을 믿는 유다인들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며 하느님을 믿으려던 더 열심한 이들을 상대로 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이웃 사랑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사랑에 기준함으로써 철저할 것을 요구하시는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듣는 이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또 믿으려는 그리스도 신앙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마르코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집요하게 추구하던 목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신 이유를 알지 못하면 결코 그분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마태오 복음 특히 산상설교의 그 엄격해 보이는 가르침의 대전제가 되고 있는데, 이는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죄에 물든 인간을 용서해 주셨다는 사랑을 말합니다. 


흔히 잊어버리기 쉬운 노릇이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엄청나게 미리 주어져 있는 하느님의 이 압도적인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닫지 못하면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철저하게 하느님을 의식해서 행하라는 오늘의 복음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기업이 생산과 판매로 인해 발생한 수입과 지출 실적을 정확하게 평가하려면 먼저 이루어진 선행 투자를 감안해야 하듯이, 우리네 인생과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어마어마하게 이룩해 놓으신 창조의 투자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인생과 세상은 결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주어진 자유를 남용하여 죄를 짓는 바람에 인생도 세상도 망쳐놓았기 때문에 당신 외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값비싼 희생을 치루심으로써 당신을 저버렸던 인간과 화해하시고 세상을 다시 아름답게 창조하고자 하셨다는 섭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선을 행하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은 이미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더 필요한 이웃에게 나눔으로써 결국 하느님께 돌려드리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되 골방에 들어가 하느님께 기도하라는 가르침 또한 이미 주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단식하되 얼굴을 찌푸리지 말라는 가르침 역시 우리가 먹는 일용할 양식이 모두가 함께 먹었어야 할 것임을 잊어버리고 우리만 배불리 먹는 동안에 굶주리고 있는 이웃이 있으니, 이제는 그들도 먹을 수 있도록 나누어주어서 원래의 질서대로 되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절약된 몫을 이웃과 나누는 자선과 반드시 연결되어야 합니다. 자선이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봉헌이 되기 위해서는 또한 기도와 연결되어야 마땅합니다. 기도함으로써 본래 우리가 거저 받은 것을 나누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자선의 행위가 가난한 이웃을 돕는 효과를 누리기 이전에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대한 도리를 갚는 의미가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라는 전통적인 종교 행위가 습관적인 행사가 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은총이 되도록 이 사순시기에 우리가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예수님께서 마귀의 유혹과 싸우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던 공생활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도 수행해야 할 싸움을 다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식과 금육을 포함한 극기로 마귀의 공격을 막기 위한 보루를 쌓고 희생과 자선을 무기로 하여 성령의 이끄심을 받기 위한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순 시기를 다시 시작하며 우리가 갖추어야 할 지향이, 첫째 받은 은혜를 모른 척했던 배은망덕을 뉘우치는 것에서 시작하여, 둘째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어주신 예수님과 화해하는 것을 거쳐서, 셋째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이들의 죄를 조금이라도 짊어지기 위해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행하되, 넷째 특히 기도생활에 있어서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듣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법인데, 듣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일방적인 방식의 기도로서는 하느님과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 질 리가 만무합니다. 


다섯째,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가 세상의 사회적 공동선에 기여하도록 지향하면서, 여섯째 그렇게 해서 쌓은 공로에 대한 상은 세상 사람들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로부터만 받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이렇듯 이 여섯 가지 지향으로 신앙의 순수함을 회복하는 일이 이 사순 시기의 과제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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