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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버린 세월호, 하느님은 끝내 버리지 않으셨다” 생존자, 희생자 가족과 함께하는 세월호 특별 좌담회 염은경 2017-04-14 20:3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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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3년 만에 깊은 물속에서 올라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세월호와 함께 진실도, 미 수습자도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참으로 간절했고 인양 소식이 반가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녹슬고 찢겨진 세월호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한국사회는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 후 3년,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아프지만 현실을 바로 보고 진단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좌담회는 세월호 참사의 증인으로서 우리의 기억을 고백하고 행하기 위해 마련했습니다. ‘믿음’과 ‘신앙’이란 우리가 겪은 사건들의 의미를 보다 옳고 깊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해석하고 깨닫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어렵게 살아 돌아오신 차은옥 선생님, 세월호 참사로 조카를 잃은 정현숙 수녀님, 청주교구 신성국 신부님, 인천교구 지성용 신부님을 모시고 ‘세월호 3년의 기억 좌담회’를 가졌습니다.  


▲ (사진출처=4·16연대)


(기자) 아픈 기억을 다시 되짚는 시간이 될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먼저 듭니다. 참사를 당한 가족으로서, 또 수도자로서 지난 3년간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정현숙 수녀) 참사를 당하고 조카를 잃었습니다. 제 조카가 박성호 임마누엘, 단원고 2학년 5반입니다. 평범하게 수도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살았는데 참사가 일어나고 제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허술한 나라, 거짓의 나라인지 몰랐고 이토록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는 나라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언론’도 그렇고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그렇고, ‘종교’도 마찬가지로, 무엇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무척 고통스러웠고 그래서 방 안에만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모여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자’고 청계광장에서 촛불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때 밖으로 나와서 촛불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참사가 난 후 미사를 하는데 성당엔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라는 말도 없고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똑같은 미사를 하는 그날이 바로 성주간 수요일이었습니다. 성주간에 이런 참사가 일어났는데도 아무 일 없는 듯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생각했던 교회가 이게 아닌데, 교회가 왜 이러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 곽찬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성서에 표현되는 것처럼, 세월호 참사는 세상에 안 보이던 것들이 휘장이 갈라져 보이듯 포장된 실체를 보게 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또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실체를 다시 보게 됐는데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어떻게 이겨내야 되는지 오직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 시대랑 다 똑같구나’ 기도하면서 느꼈습니다. 지금은 길 위에서 우리가 진정 가야할 길이 어떤 길인가 물으며 찾아가고 있습니다. 


(기자) 신 신부님께서는 세월호 참사 직전에 ‘가난한 교회를 향한 시대의 징표’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하셨습니다. 2013년 12월 당시, 대선 부정선거 문제를 다루면서 부정선거를 저지른 범죄자이면서 책임자인 이명박, 박근혜 처벌을 위해 방송을 시작한다고 하셨죠. 결국 부정선거의 수혜자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참사를 만들었고 진실을 숨기기 위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고, 결국 스스로 벌인 국정농단 사태로 파면을 맞았습니다.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 하셨습니까? 


(신성국 신부) 이명박 정권 들어서자마자 용산 참사가 일어났어요. 그때 이미 그 정권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정 수녀님 말씀처럼 인간에 대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쓰레기처럼 짓밟는, 나머지는 돈으로 처리해버리는 배금주의 사상이 우리사회에 얼마나 만연해 있습니까,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무수히 자살하고 생명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정권이 이명박 정권이었습니다. 


제가 외국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2012년 7월, 18대 대선을 앞두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정권교체를 해서 국민들이 불행한 시대를 끝내자는 제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2월 19일 박근혜가 당선됐을 때, 이미 세월호의 예고편이 시작됐다고 봅니다. 5년 동안 이명박 정권의 비극적인 사건, 적폐들을 국민들이 지켜봤음에도 박근혜를 선택했던 것이죠. 


박근혜는 독재자 박정희의 딸입니다. 이미 하느님은 백성들에게 독재의 참상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은 무감각하고 돈의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세월호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다 죽은 것입니다. 


박근혜에게 세월호 참사의 1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그를 지지하고 선택한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고 우리들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한 이유도 부정한 정권에 맞서 마치 다윗이 돌멩이 하나들고 골리앗과 맞섰듯이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국민들이 패배감에만 젖어있으면 안됩니다.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힘이나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촛불 하나씩을 들었더니 박근혜가 탄핵되고, 구속 되잖아요. 누가 이걸 상상했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이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저도 마이크 하나 잡고 열심히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기자) 지 신부님께서는 최근 인천의 작은 성당으로 새로 부임해 가셨죠? 처음 부임해 간 날이 세월호 참사 1000일이었고 그 날 특별한 체험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성용 신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촛불정국 가운데서 새롭게 받은 소명이 인천교구의 용유도 성당이었는데 도착한 날이 세월호 1000일이었습니다. 희생자들을 생각하면서 본당 부임지 첫 미사를 봉헌하는데, 제가 도착해서 보니 저를 마중 나온 신자들 가슴에 세월호 리본이 하나씩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심 ‘또 누가 앞서서 부임 신부 성향을 파악하고 리본을 달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미사를 다 지내고 나오는데 신자들이 ‘여기도 희생자들이 있는 곳입니다’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용유초등학교 동창 17명이 환갑을 맞아 제주도로 여행을 가기로 하고 그 배를 탔던 것이죠. 그 배에서 12명이 희생 되고 5명이 생존해서 돌아온 것입니다. 사실은 단원고가 있는 안산처럼, 여기도 17명 공동체가 그 배를 탔다가 12명이 사고를 당했던 것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 지금 옆에 계시는 막달레나 자매님이 그 트라우마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방안에 계시다가 뭔가 얘기를 할 수 있는 신부가 왔다는 말을 듣고 성당에 나오셔서 화해의 성사 고해성사를 하게 된 겁니다. 


자매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에 제 가슴을 때렸던 것은 ‘차라리 그때 안에서 꼬르륵 빠졌으면 되는데’라는 얘기입니다.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도 매우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먼저 떠나간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과 또 동시에 죄의식, 죄책감 같은 것에 시달리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보내셨을까? 왜 내가 2017년 1월에 이 자리에 서게 되었는가?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인간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제 안에서 새로운 질문이 시작됐습니다.  


▲ ⓒ 곽찬


(기자) 오늘 차 선생님께서 어렵게 함께 자리해 주셨습니다. 몇 년 만에 화해의 성사를 했다고 하셨는데 마음먹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생존자 차은옥 씨) 같이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친구들을 잃었습니다. 저도 한동안은 동네에 있지 못하고 아들이랑 지냈어요. 죄인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트라우마’는 항상 있었습니다. 불면증 때문에 잠을 잘 못 자요. 


저는 그 사건을 직접 다 봤습니다. 학생들은 숫자가 많으니까 아침 식사를 나중에 하고 일반인들 먼저 일찍 식사를 했어요. 지금은 죽은 친구하고 저는 밖에서 2, 3분정도 커피를 마셨는데 그때 친구는 객실로 들어갔어요. 혼자 3층 복도에 나와 있는데 배가 약간 움찔했고 왜 그런가 하고 배 밑을 보러 갔는데 그게 운명의 길이었어요. 


병풍바위라는 섬이 보였는데 선명하게는 안보였습니다. 어떤 분이 반대로 가면 섬이 더 많다고 하기에 반대편으로 가려고 선미 가운데서 후미 쪽으로 움직이는데 배가 갑자기 기울어지면서 (외부에 제대로 고박해 놓지 않았던) 컨테이너랑 화물이 다 바다로 떨어지더라고요. 


배가 기울어져 있으니까 어지럽고 신발도 어디로 날아가고 정신이 없었어요. 3층 사람들 타는 선실에 기울어진 채 기대고 있는데 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큰 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보니 반대편에 빨간 큰 배가 하나가 있었고, 배가 기울었으니까 스크류 그게 막 돌면서 물이 공중으로 솟구쳤어요. 


배에서 방송을 하더라고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계속 나왔습니다. 지금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볼 때 방송한 그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구출되는데 50분정도 걸렸어요. 주변에 배들도 있었고 그 시간 안에 다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가만 있으라는 방송만 하고 아무것도 없어요. 구조 활동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가 기댄 칸이 화물차 기사들이 탄 객실이더라고요. 제가 친구들 객실로 간다고 기어가다가 다쳐서 피가 났는데 기사님들이 거기 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거예요. 위험하다고. 그렇게 있다가 헬기로 구조됐어요. 서거차도인지 하는 곳에 내려서 보니까 구조된 사람이 몇 명 안됐어요. 그때 슈퍼 같은데서 티비를 보니 전원구출 됐다고 나오는 거예요.  


거기서 친구 하나를 만났어요. 보트타고 구출됐는데 ‘나 좀 살려달라’고 떨면서 저를 붙잡았어요. 나중에 그 친구는 병원으로 가고 저는 체육관으로 갔는데 기자들이 말도 못하게 많더라고요. 가자마자 눈물도 안 나고, 벌써 배가 가라앉아서 뾰족한 것만 남아있는 것을 보는데 기가 막혀서 눈물도 안 나고 그 때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말이 ‘수장시켰다’였어요. 얼마든지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기자) 다시 들어도 정말 화가 나는 일입니다. 신 신부님께서는 오래전부터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하고 계시지요. KAL858기 사건과 세월호 참사는 참 많은 부분 닮아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말씀입니까? 


▲ ⓒ 문미정


(신성국 신부) KAL858기는 전원 실종에 동체조차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앞서 전두환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30년 전에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건에 닮은 점이 매우 많습니다. 두 사건을 둘러싼 청와대의 대처, 해경의 구조 행태, 언론의 보도행태 등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거짓들. 이 두 사건은 거짓말로 치장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부정한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항상 이런 대형 사건이 터집니다. 국민들이 의혹을 품을만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이죠. KAL858기 사건은 전두환 정권 말기에 13대 대선을 앞두고 갑자기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 안기부가 기획한 무지개 공작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세월호 사건은 모두 국정원과 관계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2013년 박근혜가 대통령 취임을 하고 그해 6월부터 부정선거규탄 시국미사가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2014년 3월 말까지 지속됩니다. 그런데 4월, 부활절을 앞두고 신부들이 본당에서 부활을 준비하느라 시국미사를 못했습니다. 또, 2013년도에 국정원장 원세훈 재판이 열립니다. 선거 개입 문제로 국정원이 완전히 코너에 몰릴 때였습니다. 


(정현숙 수녀) 사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처음부터 그 말이 나왔어요. 그 말을 듣고 가족으로서 너무 놀랐습니다. ‘설마 그건 아닐 거야, 사람이라면 이렇게 할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고 그런 말을 듣는 것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1년, 2년 이렇게 지나고 돌아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게 맞는 거예요.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그 일에 몰입하는 동안 부정선거에 대한 이야기는 조용히 사라졌어요.


(지성용 신부) 청해진 해운과 유병언 일가의 비리 문제 같은 것들로 관심을 집중 시키면서 본질을 흐렸습니다. 저도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언론’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던 그 방송과 이후에 짜고 치는 보도들,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 곽찬


(생존자 차은옥 씨) 사실, 저는 어디에서도 꺼내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농촌에서 그물질 하시고 농사짓는 분이신데 국가에 희생되신 분이세요. 전두환 정권 때 간첩으로 몰려서 끌려갔습니다. 할머니 동생이 6·25때 북으로 넘어가셨는데 그분이 만나러 와서 만났다고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간첩으로 만들어 놓고 끌고 갔어요.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7년 정도 옥살이를 하다가 특사로 나오셨습니다. 


착하고 못난 우리 아버지를 끌어다 만든 거예요. 총 들이대고 죽인다는데 무슨 수로 아니라고 합니까. 제가 그걸 다 보고 듣고 자랐습니다. 


재판받는 날, 이근안 이랑 아버지 그렇게 만든 사람 세 명이 왔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침을 딱 뱉었어요. “우리 아버지 그렇게 하고 너네 그렇게 잘 사냐”고 하니까 슬그머니 나가더라고요. 제가 그런 상처를 받은, 이 나라의 희생자에요. 그런데 이번에 세월호에서 딱 침몰 순간을 접했을 때 ‘수장했다’는 말이 저도 모르게 나왔습니다. 


저는 다 지켜봤습니다. 당시 해경이 왔을 때, 사람을 살리려는 게 아니라 무표정으로 긴장감이나 사명감 없이 움직이는 게 이상했어요. 일반인들도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살리려고 안간힘을 썼을 텐데 그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기운이 전혀 없었어요.


분노가 치밀어서 기자들 앞에서 막 얘기를 했어요. ‘이건 수장이다’라고 막 얘기를 했는데 어떤 사람들이 저한테 그만 말하라고, 그런 얘기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도 저는 다 기억해요, 골든타임을 그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던 걸 다 기억해요.


(기자) 어려운 얘기 꺼내 증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신 신부님, 이처럼 가슴 아픈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교회가 희생자와 가족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도 짚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신성국 신부) 우선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과 사명은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것은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생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구원입니다. 나중에 죽어서 천당에 간다, 지옥에 간다는 것은 하느님이 하는 몫이고 교회는 인간을 사랑하는 사명 한 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라 하는 것은 내 고통을 잘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에 함께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 생명의 수호자, 인권의 보루 역할이 교회의 1차적 사명입니다. 강우일 주교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우리 교회와 예수님의 관심사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KAL858기 사건 때도 그랬고 지난 3년 동안 세월호 앞에서도 교회는 너무 소극적이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서명운동에 신자들이 얼마나 참여했습니까? 본당 차원에서 협조 안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교회는 반성하고 지금부터라도 발 벗고 나서야 합니다. 


(기자) 얼마 전, 성호군 둘째 누나 예나 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동안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고 특히 성당에서 겪은 일들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에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예나 씨는 분명하게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다, 종교와 신앙은 별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모로서도 수녀님으로서도, 또 한 신앙인으로서도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정현숙 수녀) 무고하게 희생을 당한 그 고통과 아픔은 당사자만 겪어내야 하는 거예요. 지금 조카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겪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나는 성호랑 두 살 차이여서 주일학교를 같이 다녔어요. 어릴 때부터 학생 레지오도 하고 전례들을 담당하고 교사활동도 했습니다. 성호가 없지만 함께 했던 활동들을 계속 해 나가면서 성호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과 추억을 더듬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그 안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것 같아요. 성호를 다 아는 사람들인데도, ‘이제 그만하라’, 집회 나가고 하는 것도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말 하는 것을 보면서 ‘성호를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해할 수 없고, 분노하게 됐던 모양입니다. 


주일학교 행사를 할 때도 세월호 연극을 하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연극을 하는 것이 위험할 것 같아서 ‘이건 아니다’라고 말하니 오히려 ‘니가 너무 예민하다’고 했던 거예요. 그러면서 사람들과 멀어지고 화가 많이 나 있었어요. 제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성당 활동 하지 말고 미사만 하든지 촛불집회 현장이나 너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서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었어요. 


그런데 “이모 나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성호랑 함께 했던 것들을 간직하려 했다”는 거예요. 가슴 아팠습니다. 무고한 아이들이 고통 받는 것을 지켜보면서 저는 더욱 주님께만 의탁하게 됩니다. 성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이 아이들, 지금 이 순간 정말 힘들지만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이 고통을 더 좋은 에너지로 승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기도합니다. 


▲ ⓒ 곽찬


(기자) 힘든 시간들에도 불구하고 수녀님께서는 안산과 광화문현장에 자주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때 가장 위로를 받으십니까?


(정현숙 수녀) 제가 다른 일은 못 하겠더라고요. 내가 수녀로서 신앙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습니다. 사실, 안산에 엄마 아빠들이 있는 곳에 자주 가고 싶었지만 세월호와 관련한 긴박한 일들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그 현장을 따라다니기도 바빴습니다. 특별법 서명을 받고, 특조위 기자회견을 하고, 청문회를 하고 단식을 하고, 이런 중요한 일들이 계속 이어져서 안산을 자주 가지 못했는데 오히려 이런 현장에 있는 것이 부모님들을 위로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부모님들은 안 가는 곳이 없었습니다. 광화문, 국회, 정부청사, 팽목항, 동거차도. 저도 그렇게 부모들이 있는 곳에 가다보니 사람들이 ‘어 수녀님 또 오셨네’ 하면서, 당신들이 있는 곳에 함께 한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 것 같았어요.


저는 고통당하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너무 속상했습니다. 아이들은 친구를 잃었어요, 너무 슬픈데 고등학교 2학년이니까 공부를 하라고 합니다. 노란리본을 달았는데 교육부에서 노란리본을 달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아이들은 슬픔을 꾹꾹 누르고, 분노가 쌓였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어른들은 다 없어져야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을 만든 사람들, 옳지 않은 일에 침묵하는 사람들, 이 나라 이 사회에 대한 분노가 너무나 컸습니다. 


언론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진실을 전해야 하는데 진실은 말하지 않고 침묵했고 거짓을 전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예언자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침묵했죠. 교회지도자들,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 주지 않으니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습니다. 힘들어 하던 아이들이 자살을 했습니다. 분노에 못 이겨서, 희생당한 친구의 생일날이면 슬픔에 못 이겨 우발적으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생겨났습니다. 또 다른 참사가 계속 발생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이 아이들을 봐서라도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적어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그 몫은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성용 신부) 저도 세월호 참사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 더 큰 참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황님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유민아빠 손을 잡아주셨잖아요. 그동안 교회는 유민아빠의 손을 잡아주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정권의 미움이라도 받을까봐, 괜히 문제라도 생길까봐 교회 지도자라고 하신 분들은 그들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어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우리들의 삶 가운데 교황님이 오셔서 손을 잡아주는 모습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세월호가 올라온 날 주일에 강론을 했어요. 세월호가 올라오는 것은 단지 배 한척이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 사회의 숨겨진 진실을 함께 끌어 올리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바꾸어 나갈 큰 동력과 힘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로 강론을 했습니다. 그 주말이 지나고 본당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이름을 알 수 없는 교우가 ‘아직도 세월호냐’고 하는 거예요. “신부님 세금 내요? 그 배를 건지는데 세금이 몇 천 억이 쓰이고 있는데 당신은 세금도 내지 않으면서 그런 걸 하라마라 말할 권리가 있냐”면서 “또 한 번만 세월호 얘기했다가는 성당에 불을 질러 버리겠다”는 거예요. 그때 하도 황당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려면 제 앞에 와서 말씀하시라”고 했더니 전화를 뚝 끊어버려요.


그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불의와 부조리와 모순을 보면 정말 무기력해져요. 사실 저도 심각한 무기력에 빠져있었거든요. ‘내가 왜 살아야하나, 뭘 해야 하나, 내가 집 지으려고 사제된 것도 아닌데 성당을 세 네 개씩 짓고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대체 이거 해서 뭐하겠다는 것인가’ 심각한 회의에 빠졌습니다.  


저도 그동안 번영의 신학에 빠져있었습니다. 주교님이 시키면 한다, 집지으라니까 신자들 마음 모아서 열심히 성전건축하고 이 것이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이 사건이 어쩌면 제 사목의 방향을 완전히 변환시키는 변곡점이 된 거죠. 


내가 있는 사목의 현장에서 신자들에게 용감하게 이야기들을 전하고 사회의 여러 부조리와 불의를 고발하고 교회가 올바른 길을 가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사제들도 쇄신해야 합니다. 또 약자들의 고통에 함께 공감하는 일이 빠져버린다면 교회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성국 신부) 지 신부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저는 두 주교님을 예로 들고 싶습니다. 먼저 광주대교구 윤공희 주교님, 스스로가 고백한 내용입니다. ‘나는 이 사회 문제나 우리나라의 민족 역사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나는 교회를 잘 관리하고 유지하고 다스리는 주교로서의 책임을 다 하는 목자였다’ 


그런데 1980년 5월 18일, 당시 주교님 집무실이 금남로에 있었습니다. 광주 항쟁의 가장 중심지에 가톨릭센터가 있었어요. 그 건물 8층이 당신 집무실인데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진압군이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총으로 쏘고 칼로 찌르고 잔악하게 죽이는 것을 다 보신 겁니다. 창문을 내다보면서 그때 당신께서 너무 무력감을 느낀 겁니다. 눈앞에서 사람이 칼로 찔리면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내려가 진압군들에게 하지 말라고 막아야 하는데 못한 거죠. 두렵고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분께서 그때 혼자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신 겁니다. 광주문제를 현장에서 맞닥뜨리면서 눈을 뜨신 것이죠. 어떻게 보면 광주사건으로 인해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전에는 골프를 무척 좋아하고 호화로운 삶을 살았는데 그런 회개를 통해서 가난한 민중들, 억압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 편에서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강우일 주교님이 그랬습니다. 본래는 서울의 보좌주교로 계시다가 제주교구장으로 가셨는데 서울교구 계실 때는 우리나라의 고위 관료들과도 자주 어울리고 식사도 같이 하고 그런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주에 가서 사람들로부터 4·3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제주의 아픈 역사를 다시 보면서 우리나라 역사의 슬픔과 분단의 비극을 몸소 깨닫고 눈을 뜨셨습니다. 그때부터 강정 해군기지 반대운동에 앞장서고 세월호 문제에도 앞장서시고 제주에서의 만남을 통해 복음의 회개를 가진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전 국민이 그 생생한 사건을 지켜봤고 다 경험한 것 아닙니까. 하느님의 초대는 우리 모든 국민들의 회개였습니다. 교회가 누구보다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세월호 3주기가 부활절하고 맞아떨어집니다. 부활절과 세월호가 어떻게 연결 되는가 나름대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들에게서 버려진 겁니다. 일생동안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셨던 분이 하느님의 뜻에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버려진 것이죠. 부활은 하느님이 끝까지 예수를 버리지 않고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세월호는 선장이 배를 버리고 도망갔죠. 박근혜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선장과 똑같은 것입니다. 세월호 아이들도 예수처럼 이 대한민국이 버린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세월호에 희생된 이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잡아줬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우리 교회가 정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세월호의 아이들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되고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위해 교회의 모든 총력을 다 해야 합니다. 저는 세월호에 대해 교회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회개한 교회가 되고, 부활한 예수와 함께 걷는 교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3주기가 정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정현숙 수녀) 저는 참사 전후로 묵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리의 고통에 예수님과 성모님이 함께 계신다’ 우리 고통을 잘 아시는 분들이 그분들이잖아요. 수많은 이들이 침을 뱉고 모욕을 했습니다. ‘아 주님도 다 이걸 겪으셨구나, 성모님도 이걸 다 겪으셨구나’ 이런 것들을 새롭게 느끼게 됐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알고, 성모님의 고통도 알고, 2000년 전도 기억한다면서 눈앞에 벌어진 참사와 고통에 왜 함께 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것인지 답답할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도 마찬가지였죠. 예수님 사건을 보고도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회개하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구원 사건으로 바라보고 증언 할 사람들이 있으면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건물을 관리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 본질인 ‘사랑하는 일’, ‘헌신하는 일’에 삶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고, 옳은 일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부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새롭게 인간다운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소리를 낼 수 있는 것, 권력에 빌붙지 않고 예수님이 선택했던 가난하고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부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존엄하게 여기는 것, 생존자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연결된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옆에 있어주는 것, 그리고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진정으로 부활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 최진


(기자) 지난 7일 금요일, 안산 화랑유원지 야외음악당에서 수원교구가 합동으로 세월호 추모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날 오천여명의 신자들이 모였고 그 자리에서 이용훈 주교님이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생때같은 자식과 가족을 하루아침에 잃었지만, 3년이 다 되도록 사고 원인조차 모른 채 마냥 기다려야 하는 한 많고 기막힌 현실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숨 쉬고 있는 상식과 예의를 갖춘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희생된 영혼들에게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을 것입니다. (…) 자식을 잃고 절규하는 세월호 가족과 고통을 나누고 진실규명에 참여하는 일이 어떤 이유로 ‘종북’이고 규탄의 대상이 돼야 합니까. 어둠의 세력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런 몰상식하고 반사회적 의식을 가진 정치인들, 지도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이들이 사회를 교란하고 폭력을 행사한 일에 대해 엄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기본적인 헌법 질서를 어지럽히고 국가 전복을 시도한 이런 이들이야말로 바로 불순세력입니다”


진실이 규명되고, 책임 있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 후에야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어려운 자리 함께 해 주신 네 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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