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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농민들이 제 몫을 되찾는 그날 열매를 맺을 것 [이신부의 세·빛] 마리아는 길을 떠나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이기우 2023-05-30 14: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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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방문 축일(2023.05.31.) : 스바 3,14-18; 루카 1,39-56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입니다. 5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을 축일로 정한 이유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25)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24) 사이에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셉과 정혼한 직후에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구세주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엄청난 소식을 전달받으신 마리아께서는 바로 그날로 엘리사벳을 방문하기로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왜냐하면 천사의 전갈 속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로 알려진 늙은 엘리사벳이 아이를 잉태한 지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소식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로서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심을 확신시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겠지만, 마리아로서는 석달 후면 아이를 출산하게 될 엘리사벳에게 도움이 필요하리라는 생각도 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잉태 소식을 부모나 정혼자 모두에게 알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께서는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엘리사벳에게로 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렸습니다. 이 소식은 단지 한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 탈출 이후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아온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을 하느님께서 지키셨다는 소식이기도 했고, 그토록 고대해 온 메시아께서 탄생하시리라는 소식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부모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메시아 대망 사상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였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성모 찬송입니다. 


이 찬송 노래 속에는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종교인들, 즉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은 자들을 역사의 무대에서 내치시리라는 종교적 해방의 소식을 필두로 해서,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도한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하느님을 섬겨온 아나빔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리라는 정치적 해방의 소식을 포함하고 있었고, 또한 무도한 정치 탓으로 굶주려 온 이들이 이제사 배불리 먹게 되고 나눔을 거절하고 호의호식해 온 부유한 자들은 빈손으로 내쳐지리라는 경제적 해방의 소식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메시아로 인한 이러한 해방의 과제가 바로 스바니야가 예언한 대로, 환성을 올리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파스카 과업이었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행동 속에는 그가 미혼모로 의심받을 수도 있고 따라서 율법 규정에 따라 돌에 맞아 죽는 수치를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자리 잡을 틈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낳을 아기가 사생아로 취급받을 수도 있다는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요아킴이나 어머니 안나, 정혼자 요셉이 자신을 의심한 나머지 받아주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구세주 잉태의 전갈을 보내신 하느님의 자비와 안배에 맡겨드릴 따름이었습니다. 이는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인해 나타난 ‘상하지 못함’의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두려움도 마리아에게 작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아나빔으로서 살아온 마리아의 믿음이 순수하고 튼튼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신앙 선조들도 그러했습니다. 이벽이나 권철신과 권일신, 그리고 약전, 약종, 약용의 정씨 삼형제, 그리고 이들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양반 선비들 모두 자신들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하여 무려 백 년이나 끔찍한 박해가 닥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천주교 교리가 일러줄 신앙의 진리가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구하며 백성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절절한 희망뿐이었습니다. 심지어 대역죄인으로 몰려 능지처참형을 당한 황사영 알렉시오조차 그러했습니다.  


한국 초대교회의 인물들은 경기도 양주 인근 지역 출신의 양반들이었는데, 이벽과 홍교만은 포천, 권철신과 일신 형제는 양근, 약전과 약종과 약용의 정씨 삼형제는 마재, 황사영은 송추 등 경기도 북부 지방 출신들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이 선비들은 조선 왕조와 노론으로부터 대역죄인 내지 무군무부의 무리로 누명을 쓰고 모조리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여 당시 조선 사회에서 축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2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들이 열어젖힌 이 민족의 역사는 이 민족이 섬겨야 할 하느님의 최고선을 향하고 있었으니, 바로 양심과 신앙의 자유, 사회적 신분 차별과 남녀차별을 철폐하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평등할 자유 그리고 누구나 자기실현과 사회 공동선을 위해 헌신할 자유를 실현하는 최고의 가치가 바로 그들의 용감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 버리시고, 무도한 통치자들을 끌어내리시며, 탐욕스런 부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시는” 파스카 과업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 민족의 복음화는 마음이 겸손한 아나빔들이 종교적으로 각성하고, 비천하게 억눌리던 민중이 정치적으로 주역이 되며, 착취당하고 소외되어 온 노동자·농민들이 제 몫을 되찾게 되는 그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마리아의 방문 축일에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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