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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공원을 죽음의 역사가 아닌 생명의 땅으로"
  • 최진 기자
  • 등록 2015-09-07 11:52:02
  • 수정 2015-09-07 17: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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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형장에서 죽어갔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시대와 종교의 차이는 있었지만, 나라와 민족의 앞날이 더욱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며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는 서소문을 죽음의 역사가 아닌, 생명의 땅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서소문역사공원 바로 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는 3일 서울 국회의사당 헌정기념관에서 ‘서소문공원 저항의 역사와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범대위는 이번 강연회를 서소문공원 천주교 성지화 사업의 부당성을 알리고, 바람직한 서소문공원 개발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날 강연회에는 범대위와 천도교인, 시민단체 등 50여 명이 참석했으며, 천주교 순교자를 포함한 서소문지역 저항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명했다.



토론회 사회를 맡은 이미애 범대위 공동대표는 “서소문의 역사가 과거 처형장에서 이어온 죽음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살아있는 살림터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범대위 정갑선 실행위원은 “역사를 잃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이번 강연회를 통해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지침이 되는 흔적이 되기를 염원한다”며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오늘의 열정은 역사의 횃불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다음은 발표자의 주요 발표 내용이다.




채길순 명지전문대 교수 : 스토리텔링으로 구성한 조선 시대 서소문 지역 저항의 역사


서울시 중구청에서는 입만 열면 증거가 있느냐고 말을 한다. 정확한 조선왕조실록과 당시 보도된 신문과 사진을 통해서 조선 시대 서소문 역사를 살펴보겠다.


서소문에서는 조선 전기에서 후기까지 많은 참형이 일어났는데, 참형 당한 죄수들은 거의 고종시기에 몰려있다. 특히 고종 때는 민란이 많고 조선이 저무는 시기였기 때문에 머리를 자르는 참형이든 교수형이든, 1907년 경성사변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처형은 효수로 이어지고, 그 효수는 서소문에서 이루어졌다.


1894년까지는 머리를 자르는 참형이, 그 이후에는 교수형이 이루어졌다. 조선 시대에는 개혁주의자들의 반봉건적 개혁 투쟁으로, 종교 신념으로, 국권 강탈에 대한 저항으로 무수한 인물들이 서소문 지역에서 희생됐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 등 사회제도를 개혁하고자 하는 개혁주의자들이 반역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서소문 밖 사거리에서 공개 처형됐다.


광해군일기에는 광해 10년(1618년 8월 24일) 역적 허균, 하인준, 현응민, 우경방, 김윤황을 서쪽 저잣거리에서 정형했는데, 그때 백관에게 명해 차례대로 서게 했다라고 적혀있다.


서북 지방민에 대한 차별 대우 시정을 요구하며 세도정치 기간에 대규모 민란을 일으켰던 홍경래의 난에 대해서 순조실록은 홍경래, 이희저의 머리를 잘라 군민에게 두루 보이고, 거리에 사흘 동안 걸어놓은 뒤 팔방에 전해 보이게 했다고 기록됐다.


천주교도들도 많이 처형됐다.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1866년 병인박해 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서소문 밖 민초천변에서 참수치명을 당했다.


서소문 처형장이 보이는 언덕에 천주교 약현성당이 있다. 약현성당을 보면 박물관을 연상할 정도로 이와 관련한 것을 다 갖추어 놓고 있다. 그런데도 더욱 확장하고 싶은 것을 보면 욕심을 넘어 탐욕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는 국권강탈에 저항하다가 죽은 사람들이다.


조선에서 유일하게 일본군을 혼비백산하게 격퇴한 임오군란의 주동자들도 이곳에서 처형을 당했다.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으로 수치심을 겪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잔혹하게 처형 절차가 진행했다. 임오군란은 개항 이후 최대 규모로 전개된 반봉건·반외세 투쟁이었으나 명성황후의 분노를 사게 돼 주모자들에 대한 보복이 가혹했다.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한 갑신정변의 인물들 역시 서소문과 관계가 깊다.


김옥균, 박영호, 홍영식, 서광범 등 젊은 개화파 젊은이들이 민영목, 김태호, 윤태준 등 탐관오리들을 죽이고 유혈 쿠데타를 진행하면서 조선의 개혁을 추구했으나 청군이 출동하면서 진압됐다.


1884년 12월 13일부터 시작된 갑신정변 주동자들에 대한 처형은 이듬해까지 서소문에서 계속됐고, 이는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자주 국권, 자유민권, 자강개혁을 추진한 근대화운동의 상징인 ‘독립신문’을 발간했던 독립협회 간부도 체포돼 서소문 감옥에 갇혔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폐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명하자 남상덕 참위(소위)를 중심으로 단합한 군인들은 무장투쟁을 전개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장비와 병력이 일본에 다 넘어갔기 때문에 많은 군인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1907년 8월 5일자 ‘황성신문’은 ‘지난 칠월 경성사변 때 죽은 병사의 시체를 서소문 밖으로 들어 옮겼다고 보도했는데, 27일이 지난 지금까지 버려져 있다’고 보도했다.


경성사변은 우리나라가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일으키게 된 출발점이다. 사변 이후 전국 각지에서 무장투쟁이 전개됐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도 서소문에서 처형됐다.


조선왕조실록은 1871년 12월 24일 교조신원운동을 펼치며 농민 봉기를 주도한 운동가 이필제와 정기현, 정옥현을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형에 처했다고 기록했다.


실록에는 1894년 10월 4일 ‘양호 도순무영에서 수원 비적의 괴수 김내현과 안승관을 효수하고, 사람들을 경계시켰다고 보고하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안승관과 김내현의 처형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처음으로 효수된 사례다.


동학 지도자 김개남, 성재식, 안교선, 최재호 등도 서울로 압송돼 처형되고 효수됐다.


실록은 고종 31년인 1894년 12월 25일 비적의 두목인 김개남과 성재식을 효수하고 사람들을 경계시켰다고 적었다. 지방에서 처형된 경우에는 머리만 따로 가져와 서소문에 효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동학 지도자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 등 5두령에 대한 처형도 1895년에 있었다. 일본 시사신보 5월 7일 자에는 전봉준, 손화중, 성두환과 이하 20여 명의 동학당 괴수들에 대해 판결을 내리게 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동학 교주 최시형도 1898년 4월 5일 강원도 원주시에서 체포돼 서소문 감옥에 갇혔다가 6월 2일 교수형 장으로 이동했다. 실록은 당시 규정에 따라 3일 동안 효시 된 뒤인 6월 4일에 광희문 밖 신당동 공동묘소에 내다 묻었다고 기록했다. 실록에는 서소문이라는 말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국사범 효시 장소가 서소문이기 때문에 3일 동안 효시 된 곳이 서소문일 가능성이 크다.


서소문은 이처럼 조선 초기부터 나라의 형장이었다. 때문에 민중들의 참형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비운의 장소이고. 역사적인 현장이며, 민중 탄압의 상징적 장소다.




조광환 동학역사문화연구소 부소장 :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의 최후


동학 농민군 지도자인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의 최후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


지난해부터 서소문에 대한 갈등이 심각해지고 있다. 어떠한 결론이 나오든 간에 역사적 장소를 이해하고 다루는 것에 있어서 서소문은 귀중한 선례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해관계가 대립할 경우 지혜롭고 공정하게 역사적 사실을 확인했으면 좋겠다.


이제 동학 농민군으로 싸우다 죽은 후손들과 관군의 후손들이 함께 제사를 올린다. 관군의 충(忠)과 동학 농민군의 의(義)가 110년 만에 화해와 상생의 지혜로 발전됐다.


2004년 3월 5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에 관한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과 같이 서소문 문제에서도 지혜로운 해결이 나오길 기대한다.


전봉준은 도망치는 상황에서도 재기를 도모했지만, 밀고로 잡혀 처형됐는데, 장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가 전북 정읍시에 있다.


그 묘와 묘비가 전봉준 전처의 문중인 여산 송 씨 산에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전봉준의 머리를 수습했다고 기록되는 조장태의 묘가 이 묘와 같은 비봉산에 있는 것도 그 가능성을 매우 높여준다.


비석 학자들도 비석의 생성이 100년 이상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장군천안전공지묘비’라는 글자에서 장군이라는 말은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인 만큼 장군으로 불린 전봉준의 묘일 가능성이 크다.


서소문 역사공원이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서 강조하고 그 뜻을 기리는 것을 뛰어넘어 충과 의가 함께 공존하는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남기를 바란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성스러운 탄생지 예루살렘이 어떻게 폭력과 전쟁으로 점철됐는지를 타산지석으로 생각하면서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해법을 찾길 바란다.




전희식 한울연대 공동대표 : 바람직한 서소문역사공원 개발방향


함축적인 역사적 장소에 대한 고찰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명확한 적시다.


이것은 지난번 서울시 중구청 토론에서 명확하게 밝혀졌다. 사회변혁으로 볼 수 없는 천주교인의 처형이 22%, 동학과 사회변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36%다.


천주교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사회변혁을 위해 헌신했다. 이 역사적 사실이 서소문 밖 역사공원의 조성에 명확하게 반영돼야 한다. 교세가 강하다고 해서 이 사실을 흐리는 것은 역사적인 왜곡이다.


두 번째는 역사적 공간이 현대적 시대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사진 몇 장을 대형화하고, 관련 유물을 전시하며, 밖에 나오면 싸구려 기념품을 파는 것은 박제된 역사이며 찾아갈 가치가 없는 곳이다.


서소문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역사적인 당시의 사건을 어떻게 옮겨낼 수 있고, 복원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1894년에 외쳤던 시대정신이 오늘 2015년에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때 이야기했던 신분제 철폐, 인권, 생존권, 가혹한 탐관오리의 폭정 등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환경권, 조망권 등 새로운 권리들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절박한 과제들은 오늘날에 이전돼있다.


등골 서늘한 역사적 장소라는 점이 관광객 유치의 자원이 될 수 있느냐. ‘서소문 밖 역사 유적지 관광 자원화 사업’의 목표와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복원이 돼야 한다. '역사정신의 회복과 종교자유의 지킴공원', '역사정의와 종교양심을 위한 공원'이 역사적 사건에 걸맞은 이름이다.


시대정신을 되살리는 개발이 됐으면 좋겠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천도교, 서울시 중구청의 3자 협의체가 만들어져서 향후 공원의 개발을 새롭게 논의하고 설계도를 수정하여야 한다.


토론회를 마치면서 범대위 정갑선 실행위원장은 “오늘 강연회를 시작으로 조선 후기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다루는 추진위원회를 세울 계획이다. 유물과 유적, 사료에 대한 발굴과 연구를 위한 위원회가 조직돼 서소문 공원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발족한 범대위는 그동안 서소문공원을 천주교 순교성지로 조성한다는 계획이 종교 편향이자 우리 역사를 왜곡한다고 주장해 왔다. 토론회가 열린 3일 현재 서소문공원에서 천주교 순교성지화를 막기 위한 천막 농성을 278일째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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