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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길과 바꾼 105인 사건
  • 신성국 신부
  • 등록 2015-11-02 09:37:42
  • 수정 2015-11-02 09: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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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성서적 입장은 바알을 숭배한 우상숭배자들의 폭거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독재적 방식으로 무모하게 밀어붙이는 박근혜의 정신세계는 바알신을 섬긴 우상숭배자이다. 그가 그토록 우상화시키고 싶은 자들은 누구인가?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며 국부로, 박정희를 산업화와 경제기적을 이룬 화신으로, 친일파 매국노들을 멸사봉공의 애국자로 둔갑시키려는 나쁜 의도가 숨어있다. 


작금의 상황은 대한민국을 박근혜를 교주로 모시는 종교로 만들고, 박근혜가 원하는 국정 역사교과서를 성경으로 삼는 전국민 광신도화를 일삼고 있다. 광기 서린 국가종교의 탄생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한국천주교회가 침묵과 수수방관으로 일관하는 것은 하느님과 국민 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의 교회가 불의에 침묵하는 이유는 박해시대 이후, 근현대의 역사에서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적 소명을 다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절실한 이 시기에 과거를 진실하게 돌아보며 참회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일제 강점기 동안 교회의 사목 중심에 있었던 뮈텔 주교의 행적을 세상에 알리고, 친일 청산을 위한 진정한 반성과 참회를 시도하는 일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의 책무이다.   


김갑수 작가의 블로그 《한국 가톨릭은 105인 사건의 공범이었다》의 내용은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105인 사건’을 모르고 항일 독립 운동사를 말할 수 없다. 105인 사건은 1911년에 일본이 한국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사건들 중 하나이다. 


105인 사건 직전, 1910년 11월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다가 관련 인사 160명과 함께 검거된 ‘안악사건’ 또는 ‘안명근 사건’이었다.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야고버)은 청소년을 계몽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황해도에 많은 학교를 세운 인물이다.


1910년 8월에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간도로 이주하여 독립전쟁을 위해 무관학교 설립을 꾀하였다. 황해도 일대에서 무관학교 설립과 군자금을 모금하고 활동하다가 1910년 12월에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뮈텔 주교 일기에 안명근 사건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뮈텔주교 일기 1911년 1월 11일 「빌렘 신부(홍석구)가 총독부에 대한 조선인들의 음모가 있었는데 거기에 안명근 야고버가 적극적으로 관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빌렘 신부의 요청에 따라 나는 그 사실을 아카시 장군(주한 일본군 헌병대사령관 겸 일본총독부 경무총장)에게 알리고자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데도 그를 찾아갔다」


먼저 일기의 배경을 살펴보자.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이토오 히로부미 처단 이후, 빌렘(홍석구) 신부에게 안중근 집안의 일을 소상히 보고하라고 명령한 적이 있다. 그 내막을 알 리 없었던 안명근은 빌렘 신부에게 데라우치 총독 척살계획을 고해했는데, 놀랍게도 이것이 빌렘의 편지를 통해 뮈텔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주교는 이를 아카시 장군에게 전달하였다. 


▲ 아카시 장군


일제가 안명근 사건을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케 암살 미수 사건으로 만들어 독립운동가에 대한 탄압과 체포에 나섰다. 1911년부터 전국에서 총 600명이 검거, 재판에 기소되어 투옥된 사람은 105명이다. 항일 기독교인들, 독립단체 신민회원들, 민족지도자들이 대거 체포되고 국내의 독립 활동은 와해, 무력화되었다. 1911년 1월 11일 뮈텔 주교가 일제 총독부에 안명근 내용을 밀고한 시점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가 소탕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 교회가 민족과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반민족행위를 한 것이다. 


뮈텔 주교가 빌렘 신부로부터 받은 비밀 편지를 들고 아카시 장군에게 한걸음에 달려간 이유는 우리를 경악케 한다. 그 이유가 뮈텔 주교 일기 1911년 1월 11일자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종현 성당(현재 명동 대성당)은 부지 문제로 소송이 걸려있었다. 일본인들이 명동성당의 일부 부지를 침범함으로 인해 진고개로 넘어가는 길(통로)이 막혀있었다. 4년 동안(1906년∼1910년) 재판을 하면서 전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명동성당측은 1심‧2심에서 두 차례 패소했다. 그 시기에 뮈텔 주교는 홍 신부로부터 온 비밀 편지를 아카시 장군에게 전달하며 대신 명동 성당의 부지 문제를 협의하고 즉각 해결하였다. 


뮈텔일기 1911년 1월 11일자 「아카시 장군은 즉시 헌병대의 중위를 불러 즉석에서 다른 두 통로, 즉 양로원 길과 수녀원 정문 길을 열어 놓도록 그에게 명하였다. 장군은 나의 통고에 진심으로 감사해 하였다」 


나의 통고는 무엇인가? 안명근 관련한 정보가 아니던가. 


뮈텔 일기 1월 12일자 「타카다 중위가 영국인 통역을 대동하고, 아카시 장군의 명함을 전하는 동시에 그의 이름으로 내게 감사하고, 또한 통로들의 차단을 치우라고 명령이 현지 경찰에 내려졌으며 그리고 또다시 차단이 되면 중앙 경찰에 알리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전하러 왔다」 


일본 총독부에게 독립운동의 비밀을 넘긴 대가로 교회는 명동성당 부지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받은 대가는 무엇이었나? 독립지사들이 대거 체포되고 민족운동의 중추조직들은 처참하게 무너져 버렸다. 안명근은 종신형을 받았으며, 백범 김구는 15년형, 그 밖의 독립지사들은 7년형, 5년형을 과하였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교회는 지난날 민족 앞에 저지른 과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새로운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박해 시대의 순교자들에 대한 미화만으로 부족하다. 이젠 일제 강점기의 수치스런 잘못을 무마하고 덮으려는 자세에서 벗어나 식민지 지배로 억울하게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교회의 도리를 다해 용서를 구해야 한다. 


2015년 가을 추계주교회의에서도 신자들에게 고해성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민들이 보고 싶은 것은 고난 받는 민족 앞에 저지른 교회의 잘못에 대하여 진정으로 고해하고 참회하는 자세이다.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도록 도와주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2000년 대희년 준비에 관하여, 33항)    



[필진정보]
신성국 : 마리스타 교육수사회 파견사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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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2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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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em2015-11-08 13:32:39

    은전 30량에 스승을 팔아먹은 유다스나, 통로 하나 확보하고자 양 무리를 늑대에게 갖다 바친 목자나.. 고금을 막론하고 12명 중 하나 쯤은 직격 배신자.. 교회의 참회와 함께 명동 성당 구내의 그 자리를 "피의 땅"이라 불러야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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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em2015-11-02 20:53:09

    기가찬 일입니다.
    지금의 고위성직자들도 불의에 저항할 의지와
    옳을것을 말할 입이 없어 보입니다.
    하느님! 이 나라에 제발 참된 목자를 다시 보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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