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근수 편집장) 오늘 가톨릭프레스 인터뷰는 개신교 개혁 운동 선두에 있는 강만원 선생입니다. 강만원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약력을 보니 새로운 해석방법으로 문체론을 공부하셨는데, 가톨릭프레스 독자들을 위해 문체론이 성서 해석에서 어떤 도움이 되는지 설명 해주세요.
▶ (강만원 선생) 네, 안녕하세요.
문체론에 대해 설명하자면, 우선 저자가 쓰는 글 혹은 화자가 하는 말에는 저자나 화자의 언어적인 선택에 따라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저자나 화자의 특별한 표현은 저자의 의도에 따른 선택에 기인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의도적인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텍스트를 읽을 때는 독자가 자신의 지식이나 선입견, 자기 나름의 객관적인 바탕을 가지고 해석하지만 문체론적 해석은 저자나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하는 겁니다. 즉, 독자의 해석이 아니라 저자의 메시지에 주목한다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자는 자기 나름대로 표현방법을 선택합니다. 어떤 단어를 선택한 이유, 또 어떤 문장을 구성하면서 어떤 것은 특별히 강조하는데, 여러 번 반복하면서 강조한다던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면 저자의 주관적인 메시지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문체론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어요. ‘문체는 저자 자신이다’ 혹은 ‘문체는 텍스트 자체다’
문체론은 두 갈래로 봐야 합니다. 하나는 ‘형태론’인데, 말 그대로 저자가 어떤 글이나 말을 선택할 때 저자에 따라 특별한 형태가 드러납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론’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형태론적인 것은 미학적인 연구와 관련이 있고, 의미론적인 문체론은 일종의 해석학으로, 철저한 텍스트 분석을 통해서 현대 언어학에서 강조하는 담론 분석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문체론적으로 해석하면서, 저자의 의도는 이런 게 아닌데 성경 해석을 지나치게 신학자 해석 혹은 독자들 해석에 따라서 저자의 의도가 많이 왜곡되는 걸 느꼈어요.
- 그러면 독자를 분석하는 게 아니라 저자를 분석하는 거죠?
▶ 네, 저자의 메시지를 파악한다는 것은 독자의 자의적인 해석과 다른 겁니다. 성경은 이천년 전에 쓰여졌지만 독자는 지금의 관점에서 읽어요. 자신에게 적용하기 위해서 지금의 관점에서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에서 메시지를 파악할 때는 당시 글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과 더불어 언어적 배경으로서 문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저자의 의도가 문맥 안에서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상황적 문맥(situational context)과 언어적 문맥(linguistic context)라는, 이중 구조의 ‘문맥적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조화를 잘 이뤄야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해석이 독자 입장이라면 문체론적 해석은 저자 입장에서의 메시지 파악이죠.
- 현대 신약 성서에서는 텍스트와 문맥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전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독자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는 학자가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겠죠. 예를 들어 마가복음의 문체론적 특징을 몇 가지 설명해주세요.
▶ 사복음서 중 마태‧마가‧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공관복음은 동일한 관점에서 봤기 때문에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공관복음은 세상에 오신 예수부터 시작해서, 세상에 살면서 가르치고 부활하신 과정은 똑같지만, 마태‧마가‧누가복음을 문체론적으로 분석하면 확연히 다릅니다.
마태복음의 특징은 저자가 율법을 계속 반복해서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메시아에 초점을 맞췄다면 마가복음의 저자는 종으로 오신 예수, 그래서 박해받는 예수에 초점을 맞추죠. 다른 복음서에 비해 가장 짧은 복음서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받은 박해, 심지어 가족이나 고향에서조차 소외되고 박해받는 부분을 더욱 부각시켜요. 그 배경은 마가 공동체가 가진 특성 때문에 마가는 예수도 세상에 와서 수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마침내 세상을 이기셨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입니다.
마가 공동체에 특별히 강조해서 전하려는 메시지는 결국,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 공동체도 숱한 박해가 있지만 끝까지 견디는 자가 이기리라’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반면에 누가 복음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탕자의 비유나 몇 가지 비유를 보면 인간으로서 오신 예수의 긍휼, 위로, 사랑에 많은 초점을 두고 있어요. 이처럼 같은 복음서임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전하는 ‘심층 메시지’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 우리 한국 개신교 목사님들이나 성도들의 신학 성서 복음서의 문체론적 해석에 대한 식견은 어떤 수준입니까?
▶ 그들에게 문체론적 분석은 생소하고, 대부분 신학적인 접근과 종교적인 이해로 성경을 해석합니다. 저는, 교회의 타락, 목회자들의 비리, 윤리적인 문제의 가장 큰 배경은 성경 해석의 왜곡과 그에 따른 신앙의 일탈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만약 목사나 신학자들이 성경의 준엄한 메시지를 영혼과 골수에 그대로 새겨 넣는다면 두려워서라도 감히 이렇게 타락하지 못합니다. 잘 알려진 얘기지만 어떤 목사의 반복적인 성추행은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치명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 목사는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거지, 사람 앞에서 하는 게 아니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고 자기 나름대로 회개를 했다는 거죠. 그러나 그것은 자기 방식의 ‘반성’일 수는 있어도 성경적인 의미에서 회개가 아닙니다.
비단 그만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킨 목사들은 자기 나름대로 회개를 했다고 주장합니다.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고했다는 건데 다시 강조하지만, 그건 성서적인 해석이 전혀 아닙니다. 일부 교단의 교리적인 혹은 주관적인 해석일 순 있어도 성서적인 해석이 될 수 없어요. 성서적인 해석은 초대교회의 경우 교인들 앞에서 공고백이 있어야 되고 공고백을 통해 교인들로부터 회개를 인정을 받아야 했고, 그걸로 끝이 아니었죠. 가톨릭 관점이긴 하지만 그에 따른 보속이 있어야 됩니다. 개신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보속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죄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인 지침입니다.
문제 있는 목사들은 잘못된 회개론에 바탕을 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은 회개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날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의 성서 해석은 대부분 신학적인‧종교적인 관점에서의 해석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계시로서의 올바른 성경 해석이 아닙니다. 성경 해석의 왜곡은 신앙의 일탈로 이어지고, 신앙의 일탈은 필연적으로 타락과 부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바로 그것이 한국교회를 타락시킨 결정적인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국 개신교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성서 해석의 오류에 관한 것이라는 거죠?
▶ 많은 사람들은 한국 개신교의 치명적인 문제를 윤리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목사들의 성추행, 세습, 재정비리 등 윤리적인 문제를 탓하는데 사실 윤리적인 문제는 초대 교회부터 줄곧 있었어요. 초대교회부터 중세 가톨릭을 거쳐 지금까지 계속 있었던 겁니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윤리적인 타락에 대해 질타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윤리적으로 가장 타락했던 세리나 창녀를 두고 오히려 “세리나 창녀가 구원받을지언정, 거룩과 경건을 외쳤던 바리새인들의 구원이 없다”고 합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를 보시면서,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고 율법을 준수했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인 중의 죄인인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 칭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시는 구절, 즉, 신앙의 외식을 엄히 질타하신 부분을 저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윤리적인 타락은 드러난 현상이지 그 자체가 원인이 아닙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목사가 부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거짓과 교만이며, 권력을 장악한 종교인들의 불의입니다.
- 선생님이 아르케 처치(Arche church)라는 말을 많이 쓰시는데 이 말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 아르케 처치(Arche church)를 우리말로 하면 ‘원형 교회’입니다. 그리고 원형 교회의 본은 초대 교회나 가톨릭, 또는 개신교가 아닌 예수께서 내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셨던 그 교회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종교적인 교회, 신학적인 교회와 구별되는 성서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계시라고 본다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전하고자 했던 모든 게 성서에 담겨있으니 철저하게 성서적인 교회로 가야 하죠.
수많은 사람이 개혁을 말하는데 잘못된 제도에 대한 개혁은 마땅히 해야 됩니다. 그런데 개혁은 또 다른 개혁을 요구해요. 개혁은 흐르는 과정이지 목표나 목적이 될 수 없어요. 아르케 처치가 추구하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교회의 회복이에요. 교회가 세속화되어 타락하고 변질된 상태인 종교적인 교회에서 이제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성서적인 교회로서 원형교회로 돌아가야 해요. 그런데 이때 원형 교회는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세울 수 있는 교회인가, 아니면 관념적인 교회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원형교회는 결국 예수와 성경을 ‘이상이며 본’으로 삼는 실험적인 교회인 동시에 실제적인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현재 한국 개신교가 국민들에게 많이 외면당하고 있는데 그 원인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 요즘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한 한국 교회다’라는 말이 있어요. 어떤 면이 타락했느냐고 물으면 일관되게 윤리적인 문제라고 말합니다. 여러 곳에서 개신교의 심각한 퇴보 원인에 대해 묻는 조사를 많이 했는데, 예를 들어 다섯 가지 정도의 항목을 정해서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70~80%는 목회자라고 답합니다. 재정비리, 성추행, 세습, 권위주의적 태도 등 목회자로 귀결되는 윤리적인 문제 때문에 교회가 타락했다고 보는 거죠.
그런데 저는 윤리적인 타락을 만든 그 배경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눈에 보이는 가지가 상해서 제 아무리 가지치기를 해봐야 땅 속에 묻힌 뿌리가 썩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뿌리가 무엇이냐. 목사나 사제 같은 교회의 소수 성직자들이 장악한 권력이에요.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를 지배하는 거죠. 권력의 속성은 더 많은 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이고, 지배하려는 것입니다. 지배와 독점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개신교 목사들은 설교권뿐만 아니라 침례나 성찬식까지 모두 장악했어요. 결국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던 중세 가톨릭의 사제권을 넘어서는 절대 권력입니다.
- 가톨릭, 개신교, 불교 이 세 종교의 문제에는 비슷한 양상이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문제인데 이 문제의 근원은 권력입니다. 참 안타깝죠. 계속 질문하겠습니다. 개신교의 성서 해석 문제가 계속 대두되는데 학술적으로 성서 해석에 대한 토론이 많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성서 해석은 주로 어떤 형태로 이뤄지고 있나요?
▶ 개신교 해석의 주류는 두 바탕으로 봅니다.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가 태동하면서 칼뱅의 예정론과 그에 맞섰던 아르미니우스의 행위론이 개신교 교리의 양대산맥이죠. 그런데 이 둘은 갈등을 겪고 있어요. 예정론과 행위론은 서로가 서로를 이단으로 봐요. 그러면서도 파워가 형성되니 자기들 나름대로 정통교회라고 해요. 교리조차도 힘이 지배하면 그만입니다. 힘이 없으면 그들 가운데 하나는 일찌감치 이단으로 단정됐을 거에요.
크게 두 가지로 보지만 그 전에 이미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대립이 있었고 그 보다 한참 위엔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예정과 행위, 은혜와 의지, 하느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이 대립이 개신교 성서 해석의 두 축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두 가지는 기득권을 형성했기 때문에 신학적‧종교적으로 절대 봉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이원론적 구원론에 입각한 ‘믿음’의 해석이지 성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믿음 없는 행함 없고, 행함 없는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행함은 세상의 도덕일 수 있을망정 기독교 신앙이 아니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이미 죽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예정과 의지가 하나로 모아져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고, 베푸신 은혜에 부응하고 따라갈 때. 이를테면 그 은혜에 의지로 부응할 때 온전한 믿음이 생기는 거죠, 그게 신앙입니다. 신앙은 은혜와 의지, 하느님 주권과 그에 부응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만남이지 그것을 분리하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 루터는 개혁을 시작할 때 500년이 지나 먼 나라 한국에 이런 목사가 생길 것을 예상했을까요?
▶ 아마 예상했다면 종교개혁을 하지 않았겠죠(웃음). 하지만, 지금 개신교의 타락에 대해서 종교개혁가들의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목사라는 직분을 새로운 성직으로 제시했다는 책임, 그로 인해 목사 성직주의가 태동되었다는 것이 개신교 타락의 중대한 요인입니다. 지금의 개신교는 중세 가톨릭의 치명적인 타락과 부패에 맞섰던 종교개혁 시점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악하다고 봅니다.
중세 가톨릭은 교황 한 명에게만 집중됐던 절대 권력이라면 지금은 교회마다 절대 권력이 있습니다. 교회 수만큼 개신교 교황들이 군림하고 있는 거죠. 지금의 교권주의를 타파하지 않는 한 교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권력의 속성은 지배입니다. 그리스도의 종교로서 기독교는 지배와 갈등, 반목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섬겨야 되는데 교회에 권력이 집중되는 한 섬김은 사라지고 계급과 차별이 넘칩니다. 이 말은, 교권주의가 교회를 장악하는 한 교회의 타락과 성직자의 비리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 권력과 거리가 멀 것 같은 성직자들이 왜 그렇게 권력에 욕심을 내는 걸까요?
▶ 성직자들이 권력을 욕심내는 것은 성경 해석의 근본적인 오류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봅니다. 목사가 되어 섬기는 종으로서 희생하고 헌신하겠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해석하는 목사는 (이것도 그릇된 해석이지만) 성서에서의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목자가 자신의 양을 키우고 먹이고 보살핀다는 미명으로 지배하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있어요.
목사들에게, “여러분들은 목사로서 나름대로의 소명의식을 갖고 있으시죠? 그 소명의식은 내 양을 보다 잘 키우고 잘 먹이고 잘 자라도록, 그렇게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 종의 사명을 갖고 있는 것 아닙니까”하고 물으면, 대부분 그렇다고 대답을 해요. 바로 거기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목사는 목자로서 <내 양>을 키우는 양의 주인이 아닙니다. 목자는 주께서 말씀하신 ‘내 양’, 즉 예수 그리스도의 양을 키우는 종입니다. 성경에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여라, 내 양을 쳐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건 베드로에게 양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양’ 즉 예수의 양을 먹이고 키우라 하시는 거죠.
종인 목사는 주인의 양을 키워서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가 아닙니다. 양의 털을 벗겨서 자기 몸을 덥히고, 양의 살을 찢어서 자기 배를 불리는 종은 주인에게 준엄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감히 해쳤기 때문이지요. 종은 섬길 의무가 있을 뿐, 소유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 말은 목사들뿐만 아니라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의 모든 성직자들, 나아가 평신도 중직자들까지 모두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종의 기쁨은 주인의 소유를 잘 지키고 보전해서 주인에게 칭찬받는 것이지 자신이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직자주의에서는 성직자가 종이 아니라 주인의 행세를 하며 교인들을 지배합니다. 요컨대 성직자주의를 타파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타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보면 바리새인은 간음도 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지도 않았죠, 계명에 따라 충실했어요. 반면에 세리는 남의 것을 토색하고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거둬서 이방인 로마에 바치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구원은 세리에게 있고 바리새인에겐 없다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의 ‘나에게 이렇게 복을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이 말엔 ‘나는 거룩하나이다 그리고 저 세리는 속됐습니다’라는 성서 이원론이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이 성서 이원론을 바탕으로 성직자주의가 태동됐고, 성직자주의가 교회를 타락시켰다고 생각합니다.
- 최근 신학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데 한국 개신교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신학적 지위는 어느 정도입니까?
▶ 개신교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자는 말을 많이 하죠. 그건 율법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종교 이전의 ‘도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덕과 달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해석은 전혀 다르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불쌍한 사람들, 그러니 우리가 도와야한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는가 하면, 소외된 사람들, 심지어 하느님께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차별적인 개념이 밑바탕에 깔려있어요. 내가 도와야 하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패러다임을 바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양과 염소를 가르시면서 말씀하시죠. “굶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에게 하는 것이 나한테 하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도우라는 말에서 끝나는 것 아니라, 그 사람들을 섬기라는 겁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모든 인류가 마음껏 쓰고도 남을 만큼 풍요롭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가난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들은 세상이 만든 제도의 권력과 폭력으로 억압했기 때문에 빼앗긴 사람들이 된 것이지, 하느님 은혜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가 많은 걸 가졌기 때문에 가진 것 일부를 주면서 생색내지 마라, 그건 기독교 신앙의 실천이 아니다 라는 말씀입니다. 물질 이전에 그들의 고통을 마음으로 함께 느끼면서, 빼앗긴 자의 몫을 돌려주며 그들을 섬기라는 것이지요.
- 강 선생님은 예수가 어떤 분이라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선생님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준 예수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하느님입니다. 첫 번째 ‘인간의 몸으로’는 중요한 부분인데요. 하느님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건 예수의 특별한 신성 때문인데, 그것은 전능의 신성과 달리 자기 생명을 바쳐 형제를 살리는 사랑의 신성입니다. 전능의 신성을 세상에 보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특별한 신성을 보이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께서 하느님의 본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마지막 날 제자들에게 “내가 네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너와 내가 상관이 없다. 내가 온 것은 너희에게 본을 보여주려고 왔다”라고 하시죠. 두 번째 ‘세상에 오신’은 세상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세 번째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신성을 지니신 동시에 예수는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 혹시 마리아가 선생님 개인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아니면 주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 마리아의 순종이 없었다면 예수의 탄생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율법 시대에 정혼한 여성이 임신을 했다는 건 정말 생명이 위험한 상황인데, 성령의 말씀을 듣고 마리아는 그대로 순종합니다. 생명을 바쳐 예수를 낳으신 마리아의 위대한 순종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위대함은 온전한 순종으로 예수를 잉태하고 낳았다는 사실이지, 마리아가 신성을 지녔거나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승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는 사실은 종교적인 이유로 수긍할 뿐, 성경적인 사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 이번에는 민감한 질문입니다. 최근 예장합동(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에서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발언한 것이 보도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가톨릭을 이단이니, 이교니 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예장합동에서 가톨릭을 이단, 이교로 규정하려고 했죠.
일단 이단과 이교를 구분해야 합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성경을 동일한 경전으로 인정하는 종교라면 가톨릭은 이교일 수 없죠. 그러나 이단에 대해서 말하려면, 이단이 사이비를 말하고 불의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의미 그대로 하이레시스로서 ‘선택’을 말하는 건지 먼저 구분해야 합니다. 만약 사이비라는 의미에서 이단이라고 말하는 거라면 가톨릭은 세상에서 ‘보편 종교’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이단으로 규정하는 건 있을 수 없죠.
반면에 이단의 정의를 ‘선택’의 의미로 본다면, 대답은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다른 선택이 있게 된 배경에는 성경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고, 다양한 교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나 교파에서 그 교리를 정통으로 받아들이지만 다른 사람은 그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받아들인 쪽이 받아들이지 않은 쪽을 이단으로 표현한 거라면, 개신교와 가톨릭은 교리가 다르니 개신교가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반대로 가톨릭에서 개신교를 이단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 2년 후에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분열된 지 500년이 됩니다. 한국 종교 일각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화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강 선생님이 보시기에 가톨릭과 개신교는 어떤 대화를 해야 합니까?
▶ 결정적으로 서로가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데 억지로 통합하자는 방향으로 가는 건 안 됩니다. 이미 각자의 교리에 따른 제도와 기득권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때로는 견제하고 논쟁하고 감싸기도 하면서 기독교로서의 본질을 찾는 운동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심은 교리가 아닌 예수가 돼야 합니다. 원래 그리스도교로서 하나의 종교였으니 통합해야 된다는 운동이 아니라, 예수 중심의 본래 종교로 돌아가는 운동이 중요합니다.
- 신앙의 형제자매로서 가톨릭 독자들에게 조언이나 비판, 또는 실망스러운 점을 말씀해주시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 ‘개신교의 위기는 가톨릭의 기회다’라는 말이 있죠. 90년대 이후부터 가톨릭은 성장한 반면에 개신교는 침체된 상태죠. 개종을 하지 않았다하더라도 가톨릭에 관심이 많아진 건 사실입니다. 일종의 반대급부죠. 그러나 개신교의 타락과 목회자들의 비리로 인해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실 개신교 내부의 불의 못지않게 가톨릭의 불의도 심각합니다. 추기경이나 사제들의 성추행과 재정 비리가 심각하다는 건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개신교나 가톨릭 가릴 것 없이 교회에 만연한 교권주의에 맞서고 불의에 저항하면서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운동이 절실합니다. 가톨릭에 바라는 건 앞서 말했다시피, 서로 논쟁하고 견제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로서 본래의 모습으로 가자.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실질적인 선교와 전도가 되는 운동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 강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민감한 질문입니다(웃음). 교황이란 말이 저는 의아해요, 가톨릭의 수장이란 의미에서 교종이란 말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시 ‘프란치스코 성도’라는 제목으로 글을 하나 썼어요. 상당히 많은 독자가 읽었는데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가톨릭에선 ‘다른 종교라지만 가톨릭 교황을 어떻게 성도라고 표현하느냐, 타종교에 대한 예의가 없다’라는 반응이고, 개신교에선 ‘개신교가 위기인데 교황에 대해 지지하는 말을 하느냐, 당신은 종교다원주의자가 아니냐’라는 반응이 나왔어요.
프란치스코 성도라고 말한 것은, 세상의 작은 자를 향해 기꺼이 다가가고 사랑을 실천했던 그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의 특별한 행동을 본 것이 아니라,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을 통해서 저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행하라고 말씀하신 제자도, 즉 그리스도인의 본을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저는 그에게서 종교인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 아니라 신앙인의 모습을 보았으며, 교황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사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