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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학자 강호숙 인터뷰 : “교회 내 남녀 차별은 성경해석보다 정치적 문제”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12-18 17:29:51
  • 수정 2015-12-18 17: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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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수 편집장) 오늘은 여성신학자 강호숙 선생과의 인터뷰입니다. “교단이 여성 인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여성의 은사와 소명이 무시되는 상황이죠. 여자도 하나님이 만드셨는데….”라고 하셨죠?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합동은 여성 목사도 여성 장로도 인정하지 않고 여성 전도사가 있지만 임시직이라고 교단 헌법은 못 박고 있습니다. 전도사 시절에는 아래 강단에서만 설교했고 남자 목회자만 위 강단에 설 수 있는 상황인데요, 개신교나 가톨릭에서 왜 여성의 은사와 소명이 무시되고 있는지요? 


▶ (여성신학자 강호숙 선생) 은사와 소명은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유익을 위해 나눠주시는 것이죠(고전 12:7-31). 여기엔 여성도 분명 해당되겠죠. 하지만 이것이 교회리더십에 무시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목회소명을 주셨다 해도 여성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남성 리더에게 종속되어야 하죠. 이를 ‘남성헤드십’이라고 합니다. 결국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은사와 소명보다 남성헤드십을 우선시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회리더십을 제외한 기도, 찬양, 봉사(식당봉사, 청소, 안내), 전도와 선교 등이 여성의 은사와 소명인양 오히려 강요하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 “교회 내 남녀 차별은 성경해석보다 정치적 문제 같았어요.”라고 하셨는데,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셔요.


▶ 교회 내 남녀 차별은 교단의 정치가 “여성안수반대”(일명 성직반대)를 못 박았기 때문에 교단의 신학자들이 정당한 해석을 할 수 없습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교단의 정치‧문화적 편견이나 가부장적 전제가 선입견으로 작용하여 해석되기도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1장 5절에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는 말씀은 지키지 않으면서(이 부분에서는 오히려 가톨릭이 성경대로 행하고 있어요), 고린도전서 14장 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의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로 채택하여 믿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해석에서 문화적인 것을 교리화 또는 정치화하여 진리로 못 박고 있음이죠. 


그런데 여기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의미를 생각해봐야 해요. ‘떠들지 말라’인지, 아니면 ‘설교(예언)를 하지 말라’인지, 또는 ‘교회에서 어떤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인지 성경 문맥상 정확히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턱대고 문자로만 ‘잠잠하라’고 하는 것과 ‘가르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고린도교회에서 예언과 방언한 자들 가운데 여성이 있었다는 말씀을(고전11:5)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니아, 뵈뵈, 브리스길라, 다비다, 예언한 빌립의 네 딸 등이 사도, 집사, 동역자, 선지자, 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복음전도자, 교사, 교수, 여전도사, 성가대원, 선교사는 왜 허락했는지 납득하기도 어려워요.


- 선생님께서 “교회 안에 갇힌 신앙을 넘어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갑시다”라는 말씀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개신교 신학자에게서 자주 듣기 어려운 발언입니다. 설명해 주세요.


▶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쓴 「세월호 희망을 묻다」에서 몇 분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한 꼭지씩 유가족의 신앙적 회의와 물음에 대해 편지글로 답장을 썼습니다. 제가 단원고 주희 학생의 어머니 이선미 씨가 한 여러 가지 질문 중 “왜 교인들은 사랑을 외치면서 슬픔을 당한 이웃에게 냉담한가? 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을 쓰면서 붙인 제목입니다.


세월호 사고가 발생하자,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은 “하나님께서 학생들이 탄 배를 침몰시켜 국민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또는 “가난한데 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느냐”라며 무정한 종교적 상투어와 자본주의에 물든 발언을 내뱉었고, 이를 추종하는 교인들은 유가족들을 비난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한국교회 주류의 모습이며 ‘교회 안에 갇힌 신앙’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한국교회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외침으로 교회 성장주의로 치달으면서, 교인들에게 ‘교회중심’의 신앙생활만 강조했죠. 그렇게 교회에 열심히 나와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내고, 열심히 충성하는 교인들을 길러냈습니다. 둘째, 한국교회의 복음은 소위 힘 있는 자들인 ‘갑의 복음’이 되었다고 봅니다. 기독교의 밑바탕은 은혜‧사랑‧정의‧평화‧성도의 교제 등 소중한 진리를 신앙의 기반으로 삼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직분의 서열화‧성차별‧빈부차별과 교단 패권주의가 만연한 강자가 독식하는 복음이 되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교인들은 목사들의 말에 복종하는 자가 ‘복 받는다’라는 이상한 믿음 속에서 ‘교회 안에 갇힌 신앙인’이 되었죠. 


하지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의 우선성은 신학적 입장과 교리를 떠나 억울함을 당한 자들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게 마땅하다고 봅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 후에 기독교 정신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되새겨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님의 교회는 억울함을 당한 피해자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면서까지 정통성과 건재함을 자랑하는 ‘회칠한 무덤’이 아니기 때문이죠. 17세기 교육신학자로 알려진 코메니우스의 말을 빌리자면, ‘주님의 교회는 전복된 세상’입니다.


- 학술논문 「개혁교회 성윤리에 대한 여성신학적 고찰」을 쓰셨는데요. 가톨릭 사제들의 성추행 문제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종교개혁의 후예라고 자처하면서 수년간 많은 교회여성을 성추행한 대형교회 목사를 교회, 노회, 심지어 교단이 엄호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를 보자면 남성리더십을 강조하는 교단일수록 성윤리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고, 교회여성들에게는 ‘성의 사각지대’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남성 목회자의 개인윤리로 접근해왔지만, 오히려 교회 메커니즘으로 접근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가톨릭 사제의 아동성추행, 성추행 문제가 심각했더군요. 1950~2002년 미국에서 4,329명의 사제가 최소 10,677명의 어린이를 성추행해왔다는 보도를 인터넷에서 보았어요. 교황청은 쉬쉬하며,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요구하며 문제를 덮기에만 급급했습니다. 고무적인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일랜드, 영국, 독일 등 성추행 피해자 6명을 4시간동안 만났다는 것과 “사제의 성추행은 신성모독이며, 교회가 통곡, 참회하며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주어야 한다. 약자에게 저지른 잘못은 용서하지 말고 관련 사제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이 소식을 접하고 너무 고마웠고, 이런 지도자를 둔 가톨릭이 부럽기도 했어요.


가톨릭에선 성추행을 고발하는 ‘전화 핫라인’이 개설되고 성추행을 사전에 방지하는 ‘SOS 예방 전담기구’를 마련했다고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개혁교회의 성윤리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교회권력과 조직에 상관없이 ‘기독교 성윤리 상담‧교육전담 기구’를 필히 마련해야하며, 교회헌법에 성윤리 규범과 성폭력 처벌규정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법제정과 윤리위원회에 반드시 여성신학자들이 가담하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 「개혁교회 내 남녀파트너십 필요성에 대한 여성신학적 고찰」과 「개혁주의 여성리더십의 이론과 실천」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데, 가톨릭교회 내 남녀평등 문제에 대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중세 가톨릭의 교황무오와 사제주의에 저항하여 ‘만인(신자)제사장설’과 ‘여성본성논쟁’을 부르짖은 개혁교회의 후예라고 자처하던 교회와 교단이 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며 위계적으로 변질된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가톨릭과 합동교단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여성 성직 반대’를 한다는 거죠. 5년 전에 한스 큉(Hans küng)이 쓴 「Women in Christinity」를 번역한 적이 있습니다. 한스 큉은 “여성의 종속은 예수님에게 어필될 수 없다. (중략) 오늘날 여성의 사업, 학문, 과학, 문화, 나라와 사회에서 달라진 위치로 볼 때, 여성 성직은 더 이상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어요.


총신 합동에선 남녀관계를 ‘존재론적 평등, 기능적 종속’으로 못 박으면서 성직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있는데, 이것은 남녀평등에 위배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기인된 것이며, 인간을 존재와 기능으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나라 법은 남녀평등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의 철폐, 여성의 사회참여를 촉진하는 적극적 조치, 모성보호, 육아와 가사노동에 대한 남성의 참여와 사회분담 촉진 등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발전해왔습니다.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회에서는 국가의 법보다 한 차원 높은 남녀평등이 이뤄져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남성과 여성은 상호보완적 존재이고, ‘교회는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공동체’요 ‘교회의 어머니 됨’의 성격으로 볼 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는 남녀평등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 총신 합동교단에서 여성신학자로 자처한 배경을 설명해주세요.


▶ 저는 총신 합동교단에서 신앙생활을 중1때부터 현재까지 40여 년을 해왔습니다. 불교신자이셨던 부모님의 모진 핍박과 엄격한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심한 차별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설상가상으로 두 딸을 낳으면서 아들을 원하셨던 시부모님께서는 아들도 못 낳는 ‘못 마땅한 며느리’ 취급을 하셨죠. 심한 우울증도 앓게 되어, 자살을 하려고까지 했었어요. ‘이러다 내가 지옥 가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루에 8시간씩 6개월을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후에 신학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총신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런데 함께 신대원에 들어온 남학생들이 “가서 애나 키우지 여긴 왜 와서 남학생 한명을 떨어 뜨렸느냐?”, “여자들이 신학해서 남자들의 밥줄을 끊으려고 하는 것이냐?”라며 비아냥과 질타를 퍼부었습니다. 새로 부임한 총장은 ‘여성안수반대’를 정치적 이슈로 삼으면서 여성에 대해 호의적인 교수들을 쥐 잡듯 내몰아서 저는 교내 분위기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죠. 


또한 교회사역하면서 직위와 처우에서의 차별과 성희롱, 성차별적 설교를 하나님 말씀이라고 떠벌이는 저질스러움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총신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야 무슨 말이라도 하겠구나!’ 결심하게 되어, 「교회여성리더십의 이론과 실천적 방안」이라는 주제로 실천신학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과 왕따는 지도교수로부터 시작되더군요. 이에 굴하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의지하면서 당당하게 여성리더십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총신 합동은 신학과목에서 여성교수를 채용하지 않기 때문에, 대학에서 ‘현대사회와 여성’이라는 교양선택 과목을 가르치고 있죠. 한국연구재단사업인 시간강사연구에 지원하여, 개혁교회 성윤리, 남녀파트너십, 성차별적 설교, 교회리더의 성(聖)과 성(性)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여성신학자의 입장에서 소리를 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총신 합동교단은 남성신학자, 남성목회자들의 소리만 가득하였기에, 어찌보면 ‘남성적 복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성의 가치, 여성의 인권, 여성의 은사, 여성의 사명과 지혜와 통찰이 복음에 함께 실려야 비로소 온전한 ‘그리스도 복음’이 되는 거 아닐까요!


- 선생님께 예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분으로 여겨집니까? 


▶ 한스 큉은 「Women in Christinity」에서 “마리아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어머니이며, 인간으로서, 어머니로서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증거한 증인이었다. (중략) 마리아는 기독교 믿음의 유일한 예요 본보기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신비에 관해 어떤 특별한 믿음이나 통찰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믿음 역시 예수의 역사를 경험하여 기독교 믿음의 길을 두드러지게 하였다”라고 평가하는데, 저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요. 


여기에 좀 더 부연하자면, 예수 어머니 마리아는 그리스도 복음사역의 첫 번째 증인이자, 마지막 증인이라는 거죠. 한국교회 대부분은 남성 열두 제자의 행적에만 관심이 집중돼있어 안타까워요. 사실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에서 예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는 여성들이기에 할 수 있었던 꼭 필요한 일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 어린시절과 생애, 십자가와 부활의 첫 증인의 역할을 잘 감당했죠. 또 예수 승천 후에는 오순절 성령체험으로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사명을 위임받은 제자들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혹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이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에 대한 예수님의 답례정도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복음의 정수인 십자가와 부활사건에서 당시에 증인도 될 수 없었던 여성, 게다가 일곱 귀신이 들릴 정도로 유대사회에서 하찮게 여겨지고 무시당하던 여성이 예수부활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했을지 생각해봐야 해요.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어요. “왜 부활하신 예수님은 유대사회에서 증인도 되지 못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처음으로 나타나셨을까요? 또한 신적계시의 권위를 갖고 있었던 열 두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메신저로 사용하셨을까?”


저는 예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모두 남성우월적인 유대사회의 편견과 무시에 메이지 않고,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깨달아 그리스도 복음사역의 증인과 사명을 감당한 온전한 여성제자들이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여성들도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주님의 복음에 멋지게 쓰임 받도록 시대의 편견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믿고 당당히 도전과 모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요?


 제 나름대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강자한테 강하고, 약자한테 약하게 대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신 분이 고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학문, 종교, 정치분야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 가운데, 약자들에게 약하게 대하는 괜찮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저의 평가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세월호 참사가 터진 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시고 화려한 엄호나 경호를 마다않고 경차를 타고 다니신다는 뉴스를 접했어요. 그리고 성추행 피해자들을 만나 그들을 어루만지면서, 가해자 사제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게 할 것’이라는 말씀과 행보를 보면서 솔직히 부럽기도 하고 반가웠어요.


우리 개신교의 대형교회 목사들 가운데 이런 지도자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부러웠고,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인지 세상에 보여주었기 때문에 반가웠어요. 교황청 안에 포진된 기득권 세력들의 반발과 비판도 만만치 않을텐데, 부여받은 권력의 짜릿함과 안락을 얼마든지 누릴 수도 있는 분이 세계 곳곳의 가난한 자들과 억울한 자들, 아픈 자들을 만나서 감싸주는 모습에 감동을 받습니다. 개신교에서도 이렇게 멋진 리더들이 나오길 바래봅니다.


- 종교 개혁 500주년이 다가옵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대화, 소통, 협조에 대해 생각이 어떠신지 듣고 싶습니다. 


 말테 리노 루터대 교수는 “한국교회가 교파주의, 배타주의를 버리지 못하면 종교개혁 500주년은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어요(한국일보, 11. 29일자). 현재 한국교회는 ‘가톨릭은 이단’이라고 하면서 가톨릭의 영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보입니다. 이는 어거스틴이 이단으로 정죄된 도나투스파의 세례를 인정하였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오히려 교회가 점점 극단적 협소주의와 배타주의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죠.


2017년에 맞이하게 될 종교 개혁 500주년에 개신교와 가톨릭이 대화, 소통, 협조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첫째, 루터가 말한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의미 있다고 봅니다. ‘오직 믿음’에서 행함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성화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대화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둘째,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적인 결정사항(현대세계에 적응, 대화와 지성, 연대성, 교회 밖에서의 구원가능성,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 종교의 자유, 타종교와의 화해와 협력, 평신도사도직, 권위주의 철폐 등)에 대해 대화의 장을 마련했으면 해요. 


셋째, 작고한 보수라인의 대표적 신학자인 존 스토트(J. Stott) 목사는 담임목사직을 제외한 모든 목회영역에서 여성 성직을 임명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물론 제가 속한 교단에서는 모든 성직을 불허하고 있지만, 가톨릭에서도 사제가 힘들다면 우선 부제직에서 여성 성직을 먼저 허용하면 어떨까 생각해요.


기독신자와 가톨릭신자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과 ‘하느님’인 거 같아요. 기독인들은 ‘하나님’이라고 안 부르면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기독인들은 ‘하느님’으로 믿는 가톨릭과는 달리,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부심과 자만이 엄청 강해요. 그런데 개신교에 속한 여성신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데에만 열심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왔고(고전 11:12),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교회와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데 집중해야지, 비로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개신교가 가톨릭에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와 화평을 도모하고, 남성과 여성이 ‘주 안에서 하나’이기에 여성 성직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봐요. 


- 가톨릭 신자들에게 주시는 선생님의 조언이나 기대가 궁금합니다.


▶ 글쎄요. 지금 세상 사람들이 개신교를 ‘개독교’라고 부르고 있는데, 개신교인인 제가 주제넘게 가톨릭 신자들에게 무슨 조언을 할 수 있을까요? 다만 예전에는 명동대성당이 ‘피난처’가 되었는데, 어느새 ‘조계사’로 바뀌었다는 것이 유감입니다.


가톨릭 신자나 개신교 신자 모두 성경의 진리를 믿기보다는, ‘교회조직의 신학이나 목사나 사제들의 성경해석과 설교를 진리로 믿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분명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어있음에도 신학을 공부한 목사, 사제만이 성경을 해석하며 설교할 수 있다는 독선과 오만을 갖고 있죠. 그리고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 계급주의와 차별주의가 ‘교인들을 우매한 백성, 신앙적 노예들로 만들지 않았나’라는 것이죠.


가톨릭 신자들이든, 개신교 신자들이든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 안에서 올곧게, 소신 있게 판단하며 행동할 수 있는 깨어있는 신앙의 주체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시대는 불의와 속임, 권력의 만용, 약자와 피해자, 가난한 자들을 짓밟는 ‘강자독식’의 세상입니다. 하지만 헤셀은(A. J. Heschel)은 “성경에 기본적으로 흐르는 정신은 하나님의 관심이 피조물 중에 특히 인간에게 쏠려 있다. 다른 인간을 향한 동정, 돌봄, 관심은 하나님의 신비 속에 숨어 있는 의요 거룩한 하나님과의 동역이다”라고 했죠. 


저는 가톨릭신자나 개신교 신자들 모두 주님 편에 있어야 비로소 인간 편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약하고 상처받고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선한 이웃이 되어주며, ‘사회악’에 대해서도 잠잠하지 말고 불의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 여성신학자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들려주신 소중한 말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필진정보]
강호숙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교회여성리더십의 이론과 실천적 방안」이라는 주제로 실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코메니우스 연구소 연구위원이자 개혁주의 여성리더십 연구소 소장이다. 저서로는 「개혁주의 여성리더십의 이론과 실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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