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간 수요일 : 신명 4,1.5-9; 마태 5,17-19
어제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지 109주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에 하얼빈 역 광장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 토마스는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동양 평화와 대한 독립을 외치면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저술한 ‘동양평화론’의 미완성 원고를 보면 그가 자기 목숨과 맞바꾸고자 했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사사로운 원한에서 살인행위를 저지르고자 한 것이 아니었고, 위선적인 동양평화의 구호를 앞세워 조선을 침략하고 중국까지 지배하려 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사악한 죄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는 군인의 자격으로 응징한 전투행위를 한 것이었습니다.
안중근 토마스가 뤼순 법정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이토는 무려 열다섯 가지의 중죄를 저질렀고 그 중에는 수많은 조선인들을 무고하게 죽인 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국제적 이목이 쏠렸던 당시 뤼순 법정에서 안중근이 전세계 여론에 호소하려 했던 주장은, 미완의 ‘동양평화론’ 원고에 담겨있듯이, 한중일 세 나라가 형제로서 연대하여 동양평화를 이룩하자는 정의와 사랑의 가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은 산상설교의 첫 머리에 나오는 내용인데,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이미 잘 알고 있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율법이 강조하던 정의라는 가치와 당신께서 선포하시던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담긴 사랑이라는 가치의 상관관계를 명백히 밝히시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정의의 가치는 절대로 폐지될 수 없고, 오히려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의의 가치를 어기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 불릴 것이라는 평가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거부 선언이고, 사랑의 가치로 정의를 완성하는 이들이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평가는 하늘나라에 적합하다는 합격 선언입니다.
안중근의 거사 이후 백 년 동안 한반도와 한민족을 괴롭힌 불의는 일제의 침략과 이로 인한 분단 그리고 미국의 지배였습니다. 이제 시대의 흐름이 민족의 화해와 평화라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데, 이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군산복합체를 등에 업은 미국의 강경보수파, 미일 간 동맹관계를 이용하여 미국의 강경보수파를 부추기고 있는 일본의 자민당과 보수언론 그리고 일본에 기대어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친일파와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입니다.
해방 후 남북을 갈라놓은 장본인은 미국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를 부추기고 분단 원인과 빌미를 제공한 일본 극우세력입니다. 그들에 의해 살아남은 한국 친일세력은 부끄러운 친일 경력을 반공과 친미로 포장하고 반대세력을 탄압하면서 독재를 옹호해 왔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는 독재부역세력으로 변신해 왔고 이 나라와 민족의 공동선을 짓밟아 왔습니다. 최근의 정세는 이들 세력들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발악적 행태가 얼마나 뻔뻔스러운지 그 사악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정의를 무시하는 악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범국가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분단되어야 했는데, 동아시아에서는 거꾸로 전범국가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특별원조를 받아 경제부흥을 이룩한 데다가 한국 전쟁으로 인한 특수를 누리고 번영의 발판을 마련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일본 극우세력의 부추김을 받은 미국에 의해 한국은 남북이 강제로 분단되고 남한에서 친일잔재를 청산하려 했던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바람에 이념의 골이 깊어져서 급기야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치루고 말았습니다. 강대국들의 불의한 처사에 힘없이 당하고 말았던 약소국의 슬픈 현대사 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백 년 전 그리고 칠십 년 전,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불의한 강대국들의 힘에 굴복해야 했던 비극을 딛고, 이제 우리 민족은 스스로 민족 정기를 정의와 사랑의 가치에 입각하여 엄정하게 세워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정의를 세우지 못하면 나라와 민족의 불행과 비극은 멈출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 그 정의를 완성하지 못하면 나라와 민족의 번영과 평화는 이룩될 수 없고 역사도 완성될 수 없습니다.
향후 우리 민족의 미래를 개척함에 있어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되지 말고, 오히려 큰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도록 정의의 가치를 한 자 한 획도 없애지 말고 사랑의 가치를 한껏 높이 세워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정의와 사랑의 질서를 잘 지켜서 새 나라를 세우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 됩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