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신명 30,1-5; 에페 4,29-5,2; 마태 18,19ㄴ-22
오늘은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그에 앞서서 무엇보다 먼저 갈라져 살아온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 69년 전인 1950년 6월 25일에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입니다. 삼 년 동안 이 전쟁으로 전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수백 만의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천 만이 넘는 이산가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 세월이 무려 70년이 다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지구상에서 분단된 채로 살아가는 유일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세계의 비웃음거리가 되어온 못난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정농단을 일삼았던 대통령을 평화적인 시위로 몰아냄으로써 서구 세계에서도 갈채를 보낼 정도로 모범적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촛불혁명을 지켜보면서 최근 들어서는 민족 화해와 일치, 더 나아가서는 민족통일의 역사적 대장정까지도 그 어떤 민족도 해내지 못한 멋진 방식으로 한민족이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받고 있기도 한 민족이 우리입니다.
보통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되찾은 날을 기념하는 법인데 우리는 전쟁이 발발한 날을 70년 가까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겠다는 다짐이 뼈에 사무치기 때문입니다.
해방 후에 남쪽은 대한민국으로 북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각각 분단 정부들이 수립되고, 미국과 중국을 뒤에 업고 이 강대국들의 대리전 양상으로 국토가 파괴되고 국민이 희생되는 불행과 비극을 겪고 나서는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잡았던 주류는 이 전쟁이 북측의 남침으로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쟁이 끝난 날이 아니라 시작된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주류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제에 부역했던 매국노들이었고, 그들은 이 민족반역의 범죄를 희석시키느라고 친일파라는 다소 부드러운 호칭으로 자처하면서 반공과 친미라는 이데올로기로 분단을 이용하여 독재정치를 해 왔습니다. 대다수 국민들은 통일의 과업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빨갱이는 악마요 북쪽에 사는 이천 만 동포는 사탄의 세력이라고 세뇌당해 왔습니다. 이를 반영하는 현실이 지금도 그 효력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국가보안법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극단적인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정치사상적 운동장에서 살아왔던 것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 교회는 전쟁 예방을 넘어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더 전향적인 목표를 민족 구성원들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제창하여 한민족 사회의 최고 공동선을 분명히 내세웠습니다. 이제는 증오가 아니라 화해를, 분단이 아니라 통일을 지향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대변혁의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 현 시기 남북한 정세를 미시적으로가 아니라 거시적으로 내다보고자 합니다.
구한말에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 짓을 해도 오히려 부귀영화를 누리고, 일제강점기에는 나라를 빼앗은 일제에 부역하는 반역범죄를 저질러도 오히려 출세하고, 해방 이후에는 친미와 반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독재자에 빌붙어 민중을 탄압해도 애국자가 되는 세상에서 민족의 공동선은 실종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에는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새 시대를 위한 정의를 세우고자 할 때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관찰해보면, 전쟁이 실질적으로 종식되었는데도 종전협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휴전상태로 60년 넘게 지내오는 나라는 남북한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휴전협정은 남북 평화협정으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 현재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로 나아가기 위한 대세는 결정되었지만, 미국은 북핵 폐기를 우선시하고 북한은 경제제재 해제를 우선시하면서 샅바 싸움을 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좀 더 멀리 내다보면 미국은 조만간 북핵 폐기를 조건으로 북한의 요구도 들어주게 될 것 같습니다. 미국의 관심은 이보다도 종전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최소한 유지하고 자국 시장을 북한에까지 넓히려는 데 더 모아져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미국과 중국 사이에 무역분쟁을 일으킨 이유도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우위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으려는 속셈이 엿보입니다.
우여곡절을 겪겠지만 머지않아 남북의 교류는 점점 활성화되어 우호적인 나라들끼리 왕래도 자유롭게 하고 공동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는 사업들도 늘어나서 마침내 한 나라처럼 오고 가는 시대가 조만간 도래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미국이나 일본은 물론 중국이나 러시아를 비롯해서 세계 많은 나라들과 평화스럽게 교역을 하고 여행방문과 이민, 유학이 가능해진 것처럼, 적대관계를 해소한 북한도 기존의 우방이었던 중국과 러시아와 경제교류를 활발히 하게 될 것이고 남북한 공동 사업은 물론 정상국가로서 세계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교역과 방문, 이민과 유학도 자유로이 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평화입니다. 이를 막고 있는 장벽이 현재 북한을 옭죄고 있는 경제제재와 북한 체제의 통제이기는 하지만 이 장벽들이 풀리거나 변화되는 일도 멀리 보면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때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한 체제의 본산이었던 러시아나, 지금도 사회주의 정강 정책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중국의 현실이 이 점을 입증해 줍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부역하던 사람들은 설마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배가 지속되리라는 세계관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비웃었습니다. 분단으로부터 통일로 시대의 흐름이 바뀐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설마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까, 설마 남북이 화해할까, 설마 평화가 찾아오기나 할까 하고 의심하며 시대착오적인 종북타령과 훼방놓기를 일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반 여론으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사실 우리 가톨릭교회도 한때는 반공의 보루로 자처하며 증오에 앞장섰던 전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북한에서 가톨릭교회가 박해를 당한 것도 사실이고, 이념상으로 우리가 공산주의를 찬성할 수만은 없는 사정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톨릭교회도 한때 반공과 국가안보를 우상시했기 때문에 시대착오적이고 역사 퇴행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양심 있는 시민 여론의 조롱을 받고 있는 떨거지 같은 무리들을 마냥 비웃을 수만은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이념은 생존을 위한 체제의 도구일 뿐임을 명심해야 하고, 남쪽의 창의성과 북쪽의 자주성을 살리고 남쪽의 불평등과 북쪽의 경직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지금부터 경주해 나가야 합니다.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끼리 공존하기 위한 지혜는 책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노력하며 경험으로 지혜롭게 헤쳐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흥망을 기록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관점에서는 민족이 일치하고 흥하는 일도, 그와는 반대로 갈라지거나 쇠퇴하는 일도 하느님의 축복이거나 저주입니다. 오늘 독서인 신명기 30장의 말씀을 따라 우리 민족의 현실에 적용해 보더라도, 우리 민족이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하느님께로 돌아와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그분께서 우리 민족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가엾이 여기시어 다시 모아들이실 것입니다. 그래서도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시대정신을 명확히 정립하는 일입니다.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까지 퇴행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역사의식으로 반공주의에 안주하고 종북타령과 한미동맹을 우상시해 오는 무리들이 설칠 수 있는 것도 그렇게 처신해도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여론이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미래는 하느님께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이 신명기의 말씀으로도 분명해집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우리가 그분께 달려들어서 그분의 뜻에 따라 화해와 일치를 남북 사이는 물론 남남 사이에서도 이룩하고자 마음과 정신을 다할 때 거저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장의 사태 진전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고, 대국적으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먼저 우리가 하느님께 충실하기로 다짐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다시 한 번 화답송의 후렴으로 이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흩어진 당신 백성을 모으소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