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토요일 : 탈출 12,37-42; 마태 12,14-21
오늘 독서에서는 이집트 탈출 사건 보도를 마무리하면서 이를 대대로 기념하기 위한 파스카 축제, 즉 과월절 예식이 시작된 연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역사적 계시 사건은 처음이었습니다. 이를 엑소더스 파라다임(Exodus Paradigm)이라 하는데, 그리스도의 교회가 기반이자 목표로 하는 부활 신앙은 이 엑소더스 파라다임을 보편적이면서도 영속적으로 기념하고 재현하도록 이끄는 기운입니다.
또한 오늘 독서의 본문에서는 엑소더스 파라다임의 객관적 실체에 대한 정보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인원 규모는 장정만도 육십만 명 가량이었고, 그 대열에는 히브리들뿐만 아니라 함께 노예살이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국인들도 섞여 있었으며, 그들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자그만치 사백삼십 년이요, 그들이 자손대대로 이를 기념하는 예식으로 누룩 없는 과자를 구워 먹은 이유는 이집트에서 빠져 나오느라 머뭇거릴 수가 없어서 미처 반죽을 부풀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고 이는 나물을 미처 발효시킬 시간이 없어서 쓴 나물을 먹어야 했던 사정과 통합니다. 그만큼 이 사건은 시간적으로 매우 긴박했던 작전으로 진행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을 전해준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이 파스카 과업을 어떻게 수행하시는지에 대해 대표적인 사건들을 전해 주었습니다.
파스카 축제를 조상 대대로 민족 최대의 명절로 지내면서도 정작 그 역사적 배경과 정신 취지에는 둔감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본 뜻을 일깨워주시면서도,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물려받은 여러 민족의 후손들 모두에게 그리고 억압받는 모든 민족들을 위한 파스카의 과업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당신 혼자만의 힘으로는 벅차셨던지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이스라엘 방방곡곡으로 파견하신 후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먹은 제자들에 대해서 안식일 계명을 어긴다고 바리사이들이 비난하자 이를 계기로 파스카 사건을 일상에서 기념하도록 제정된 안식일의 본 취지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안식일 계명을 소홀히 하는 것 같다고 여긴 이들이 아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일부러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들어가시는 회당에 데려다 놓고 그 반응을 떠보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는데, 이를 빌미로 바리사이들은 그분이 안식일 계명으로 대표되는 모세의 율법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고 따라서 그분은 거짓 예언자임에 틀림없다는 내심의 혐의를 굳히고는 제거하기로 살해 음모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파스카 사건에 대한 해석과 파스카 과업 수행에 대한 노선 차이가 이로써 극명하게 드러나 버렸습니다. 마태오는 바리사이처럼 율법 전문가로 자처하던 소수 엘리트 그룹이 아니라 많은 군중이 이 첨예한 논란의 와중에서도 예수님을 따랐다는 진술을 통해 파스카 사건에 대한 해석과 그 과업을 수행하는 노선을 둘러싼 일종의 역사논쟁에서 사실상 결판이 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어, 많은 군중의 지지와 응원에도 불구하고 현실 권력은 바리사이들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스카 과업을 수행하려는 메시아의 수난이 왜 불가피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의 형식으로 이렇게 내다 보았습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이 예언은 모세의 역할로 그 예형이 드러났던 역사적 파스카 과업을 이제 메시아로 오시는 분께서 혈통으로서의 이스라엘을 떠나 모든 민족들을 상대로 펼치시리라는 증언적 예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하는 예언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파스카 과업을 실제 행동으로 수행하시리라는 암시적 예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하는 예언은 부러진 갈대나 연기 나는 심지처럼 세속적으로 보아 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회적 약자들을 메시아께서 그 지옥같은 고통으로부터 탈출시켜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로 해방시키리라는 파스카 과업에 대한 시적이면서도 명시적인 표현입니다.
뻔히 내다보이는 고난을 각오하고서 파스카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부러진 갈대’나 ‘연기 나는 심지’ 같은 히브리들을 해방시켜야 할 사명을 받고 있는 모세가 바로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