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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속한 사람, 악마의 지배 아래 놓인 세상
  • 이기우
  • 등록 2020-01-10 15:5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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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2020.01.10.) : 1요한 5,14-21; 요한 3,22-30



베네딕도 16세 교황이 자진해서 교황직을 사임한 후 추기경단에서는 호르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을 새 교황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불리울 교황의 이름으로 무엇을 정하겠느냐는 질문을 수석 추기경으로부터 받았을 때 주저 없이 베르고글리오는 ‘프란치스코’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 이래 266대에 이르는 2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어느 교황도 선택하지 않았던 이름이었습니다. 이 이름에는 두 가지 매우 중요한 뜻이 담겨 있음을 그리스도인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가톨릭교회를 복음적으로 쇄신하는 뜻이 담긴 이름


첫째는 교회 쇄신으로서, 12세기에 활약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무너져가는 교회를 보수하라는 계시를 받은 인물입니다. 그 계시를 프란치스코 본인이 아니라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꿈에 받고 전해주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당시 중세 가톨릭교회는 많은 문제들과 어려움을 안고 있었고, 이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려는 숱한 운동들이 출현해서 혼란스러웠지만 그 운동의 막바지에 출현한 프란치스코의 청빈운동만이 가톨릭적이라고 교황의 꿈에 나타난 사적 계시로 입증된 것입니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 역시 교회를 다시 일으키라는 격려를 사임 전 베네딕도 16세 교황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둘째는 청빈의 가치로서, 청빈운동의 마지막 주자였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유한 신자들이나 부유했던 교회를 단 한 마디로도 비판하지 않고 그들의 자비와 자발적 동의에 기대어 살아가는 탁발로 살았습니다. 이렇듯 자발적 가난의 삶을 영위하면서도 부유한 이들로부터 자신이 받은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복음의 품격을 잃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기쁨을 간직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권위 있는 강론을 당시 교회를 향하여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쇄신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므로, 첫째와 둘째의 두 가지 뜻은 사실상 서로 통하는 한 가지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상 필요한 그 한 가지 뜻이란, 가톨릭교회를 복음적으로 쇄신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직에 오른 프란치스코 1세가 처음으로 전 세계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사도적 권고가 『복음의 기쁨』입니다. 그는 이 권고에서 자신의 교황직 수행을 통해서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이룩하고 싶은 자신의 꿈을 펼쳐 보였습니다. 그 꿈을 지금 이 공현 주간의 용어로 번역하자면, 모두가 네 번째 동방박사가 되어 구세주를 경배하자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황금와 유향과 몰약이라는 예물을 준비해서 길을 떠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드러나실 것이고 세상 사람들도 비로소 알아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아보다보면 주님을 받아들이고 경배하기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금의 예물은 구세주께서 지니신 임금의 품위를 상징합니다. 


가장 값지고 귀한 금속이 황금인데, 예수님께서는 섬김이야말로 황금과 같이 값지고 귀한 것임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아무것도 우리는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하느님 앞에 갈 때에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섬김의 삶만이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심판의 예물임을 힘주어 가르치신 바 있습니다. 


유향의 예물은 구세주께서 지니신 신성의 품위를 상징합니다. 


갈수록 신성의 품위를 잃어버려가는 인류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인간은 신성을 깨닫고 회복함으로써 하느님을 닮을 수 있음을 보여주셨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인생도 문명도 역사마저도 이 신성의 품위로 행해지지 않으면 모두 다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몰약의 예물은 구세주께서 참으로 나약한 사람으로 오셔서 보통 사람들이면 다 겪어야 하는 삶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셨음을 드러내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외 없이 그리스도인들은 섬김의 삶을 화려하게가 아니라 힘겹게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화려한 섬김은 없습니다. 모든 섬김은 고달프고 힘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정직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직이기 때문에 그의 교황직을 평가하기는 이릅니다. 단지 사도적 권고 안에 담긴 그의 뜻과 취임 후부터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를 통해서 기대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요한 23세 이후 베네딕도 16세에 이르기까지 공의회 정신으로 가톨릭교회를, 네 번째 동방박사로 삼아서 온 그리스도인들을, 구세주를 경배하게 하려는 순례의 대열을 종합적으로 지휘할 막중한 책임을 맡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교황직에 오른 직후부터 지금까지 파격적일 정도로 겸손한 행보로 가톨릭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갈라진 형제들인 동방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개신교파의 그리스도인들 안에서까지 인기를 얻고 기대를 받고 있습니다. 오직 자본주의자로서 현대의 우상숭배자 혐의를 매우 짙게 받고 있는 미국 월가의 자본가들과 이를 지지하는 언론들, 그리고 공의회 이전의 가톨릭교회를 그리워하는 귀족적 취향의 교회 내 일부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볼멘소리를 듣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에 내포되어 있는 징표가, 오늘 독서의 표현대로 그가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며 동시에 악마의 지배 아래 놓인 세상과 맞설 수 있는 또 다른 모세임을 증명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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