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간 목요일 (2020.02.20.) : 야고 2,1-9; 마르 8,27-3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처럼 군중이 몰려드는 갈릴래아 지방을 떠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를 돌아오는 여정을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호젓한 분위기에서 무언가 단단히 일러주실 말씀이 있으셨나 봅니다. 또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주고 있습니다. 차별은 불평등을 초래해서 죄를 짓는 일이고 사회를 지옥스럽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로 고백하는 믿음은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기운을 얻고 그분이 일하시는 현실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이 주신 기운으로, 그분이 일하시는 현장에서 그분과 함께 우리의 삶을 그분이 보시기에 좋게끔 변화시키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렇게 변화시켜야 할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인간관계를 거쳐 우리가 사는 사회의 현실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관계와 사회현실은 우리의 믿음이 나타나는 장이요, 그 믿음의 순수성과 강도를 시험당하는 무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른바 세간의 평판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동 시대에 활약했으며 정의의 외침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순교한 세례자 요한과 같은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고, 그보다는 훨씬 오래 전에 활약했었지만 북이스라엘 왕국의 부패한 왕권과 사이비 예언자 집단 450명과 혼자서 대적했던 엘리야와 같은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대와 상관없이 무언가 하느님의 신비한 능력을 부여받은 특출한 예언자임에는 틀림없다고 막연하게 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들은 평판이었던지라 예수님께서는 정작 제자들 자신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셨습니다. 다들 마음속에는 생각이 있어도 눈치만 보며 머뭇거리는 사이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했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이나 엘리야보다 더한 메시아이시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명쾌한 정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칭찬을 하기는커녕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베드로에게만이 아니라 이 고백을 함께 들었던 나머지 제자들에게도 엄중히 이르셨습니다. 그 이유가 곧 밝혀집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물론 당시 유다인들이 생각하던 메시아란, 능력자를 뜻하는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식민통치를 하던 로마군도 몰아내어 줄 수 있고, 착취를 당해 사는 게 고달팠던 백성의 살림도 윤택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지닌 정치적 인물이 그 당시 많은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현세적 메시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각오하고 계시던 길은 달랐습니다. 당신의 앞길에는 고난과 배척이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그 다음에야 메시아로 부활하실 것임을 가르치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신앙 고백이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깊이 생각도 해 보지 않은 베드로가 인간적인 충성심과 의리에서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마치 스승이 그런 고난을 당하시면 함께 죽기라도 할 것 같은 각오로 스승을 꼭 붙들고 반박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 마음, 그 심정이야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정색을 하시고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질책하셨습니다. 질책도 아주 심한 질책이었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사람의 일은 하느님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이나, 당장의 필요나, 급한 위험 등에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진화해 온 역사가 그러했습니다. 굶주리지 않고 안전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느라고 인류는 농사를 짓게 되었고 모여 살게 되었으며 도구를 발명해서 오늘날의 과학기술문명을 이룩했습니다. 절대로 멀리 내다보고 계획하고 실행한 결과가 아닙니다. 지금은 달나라에도 가고 더 먼 별에도 우주선을 보내기까지 합니다. 의식주의 모든 기능을 도와줄 수 있는 각종 기구들을 만들어 생활을 편리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불편하면 불편을 느낄 때마다 족족 새로운 창안을 해서 민주주의 제도도 만들었고 화폐도 만들었으며 은행과 보험회사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차별이 심합니다. 인류 역사 이래도 커져온 불평등이 점점 더 커져갑니다. 개인들이나 집단이나, 지도자나 백성이나 하나같이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거나 불편을 극복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그리고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부조리한 모습 중의 하나가 대량살상무기로 갖춘 각국의 국방력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생명을 죽이고 사람 사는 서식지 환경을 아주 간단하게 파괴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도구인데도 사람들은 그 생각은 안 하고 자신들이 더 안전해졌다고만 착각합니다.
또 경제규모가 커진 것이 좋은 발전이라고만 생각하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착취당한 흔적인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서로가 존중하며 평화로이 살아가는 가운데 저마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동의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흔히 공동체라고 부르는 이 삶의 양식을 이룩하기 위한 생각 체계를 종교라고 불러왔고, 그 종교의 지도로 이룩할 수 있는 생활양식의 불쏘시개를 교회라고 불러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류는 오히려 그 종교와 그 교회로 인해 갈등과 불화, 소외와 차별이 완화되거나 극복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일깨워주기를,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일은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면서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자면, 그 믿음으로 우리네 삶과 세상을 예술보다 아름답게, 과학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