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간 수요일 (2020.12.16.) : 이사 45,6-25; 루카 7,18-23
지난 주 월요일이었던 7일에 검찰 개혁을 촉구하는 천주교 성직자 및 수도자 3,951명이 시국선언을 하며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12월 1일자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종교계 100인 선언’을 지지하면서 호소합니다. 검찰은 오늘 이 순간까지 자신이 걸어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참회하기 바랍니다. 오매불망 ‘검찰권 독립수호’를 외치는 그 심정을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검찰이 권한을 남용하여 불러일으켰던 비통과 비극의 역사를 생생하게 떠올립니다. 사건을 조작해서 무고한 이를 간첩으로 만들고,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멀쩡한 인생을 망치게 만드는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가진 사람들의 죄는 남몰래 가려주고 치워주었던 한국검찰의 악행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이 일을 다시 상기시켜 드리는 이유는 처음에 종교인 100인 선언으로 촉발된 이 움직임이 종교계 전반을 거쳐서 전국의 시민사회단체들로 확산되어 가고 있어서, 이 시기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의 징표이기 때문이고, 또 마침 오늘 독서가 의로움에 대해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이사 45,8)
하느님의 뜻을 반영하는 최고선 중의 하나는 정의인데, 그 정의라는 가치가 사람들이 구원되게끔 사회 현실에서 공정하게 구현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공정한 사회’는 모든 예언자들이 전했던 메시지의 공통분모이기도 하지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실” 메시아께서 “성실하게 공정을 펴실 분”(이사 42,3)이심을 전한 예언자는 이사야입니다. 예레미야도 하느님의 백성 역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고 착취당한 자를 압제자의 손에서 구해 주어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고,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예레 22,3)고 전해 주었고, 에제키엘은 “악인조차도 자기의 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그것들 덕분에 살 수 있으리라.”(에제 33,19)고 가르쳤습니다.
호세아도 “하느님께 돌아와 신의와 공정을 지키고 하느님께 늘 희망을 두어야”(호세 12,7) 한다고 호소했는데도, 사회의 불공정한 현실이 개선되지 못하니까, 당연히 이름 없는 백성들은 “주님께서 오시면 정의를 실천하셔서 억눌린 이들에게 공정을 베푸실 것”(시편 103,6)이라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의 현인들도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잠언 21,3)고 후세들에게 가르쳐왔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공정함이 실현되는지 여부에 왜 이토록 민감했었을까요? 그 까닭은 공정함이 정의의 척도이고, 정의는 하느님의 가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공정함이 무시되면 하느님이 부정당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을 필두로 백성들은 메시아와 함께 공정한 세상을 기다려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을 시켜 예수님께 여쭈어 보게 했다고 나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루카 7,19)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기 전에 이미,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하면서 그분의 진면목을 알아 본 요한이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의문이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제자들도 자신처럼 예수님의 진면목을 확신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이 의도를 알아채신 예수님께서도 즉답을 하시는 대신, 당신의 복음 선포 현장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메시아 시대가 바야흐로 실현이 되고 있다는 뜻으로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을 인용하여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루카 7,22-23)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사이에 오갔던 이러한 선문답(禪問答) 같은 대화가 말해주는 바는, 사회의 불공정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온갖 불행한 피해를 입은 희생자들이 회복되고 있으며, 따라서 공정함을 비롯한 하느님의 가치가 비로소 실현되고 있으니,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이었습니다.
당시에도 모든 질병과 장애, 죽음과 가난이 죄의 결과라고 여겨지고 있었고 흔히 힘세고 부유한 자들이 저질렀던 그 죄의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뒤집어씌워지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가난은 그 모든 사회병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는데, 그 가난한 이들마저도 예수님께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실현되고 있었던 이 메시아 시대의 징표들에 대해서,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등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능력을 질투하고 심지어 그 존재마저 부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루카 12,10)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림시기에, 우리도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공정함이라는 하느님의 가치에 민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회적 불의로 피해를 입은 희생자들이 복음을 듣게 해야 합니다. 의로움이 공정하게 구현되는 일은 사회 공동선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아, 의로움이 싹트게 하여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