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이 지난 21일(현지시간) 안젤로 칼로이아(Angelo Caloia, 81) 전 바티칸은행(IOR) 은행장과 가브리엘레 루쪼(Gabriele Luzzo, 97) 전 바티칸은행 법률 고문에게 횡령, 자금세탁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했다.
교황청은 이번 1심에서 피고인들이 8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자금 횡령 혐의의 중대함을 물어 장기형을 선고했다. 또한, 교황청 법원은 피고인들의 계좌에 동결된 3,800만 유로를 몰수하고 바티칸은행에 끼친 손해에 대해 2,000만 유로가 넘는 벌금을 선고했다.
칼로이아 전 은행장은 바티칸은행장으로 재직했던 2002년부터 2007년 사이에 루쪼와 공모하여 은행 소유의 부동산을 통해 자금을 착복했다.
이들은 실제로는 공시지가보다 높은 금액으로 부동산을 매매한 뒤 거래 기록에는 공시지가만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횡령했다. 이들이 횡령한 금액은 최대 5,700만 유로(한화 760억 원 가량)로 추산된다.
이들의 횡령에 일조한 루쪼의 아들 람베르토 루쪼(Lamberto Liuzzo, 55) 역시 이번 재판에서 5년 2개월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칼로이아 측 변호인은 항소 의사를 밝혔으나 나머지 두 피고인 측의 항소 여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교황청, 머니발 지적에 따라 바티칸은행 외부감사 법제화하기도
이번 선고는 유럽 자금 세탁 감시 기구 ‘머니발’(MONEYVAL)이 지적한대로 교황청에서 자금 세탁이나 횡령과 관련해서 법적 판결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점을 개선하는 방향에 부합한다.
교황청은 베네딕토 16세 때인 2009년 머니발에 가입했다. 2012년부터는 유럽 기준에 맞추어 교황청도 재정 감사를 받아왔고, 관련 보고서가 주기적으로 발간되고 있다.
머니발은 2017년 보고서에서 교황청의 자금 세탁 방지를 위한 여러 노력을 환영하면서도 교황청의 자체적인 조사에 의해 제기된 자금 횡령 재판이 없었고, 상당한 양의 자금동결이 이루어지고 있으면서도 공식적인 몰수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보고서 64-66항 참조)
머니발은 “아직까지 어떤 자금 세탁 사건도 재판에 회부된 적이 없는 만큼 교황청에서 자금 세탁 조사가 얼마나 선제적으로 행해졌는가를 판단하기 어렵다”며 자금 횡령 등에 관한 “교황청 노력의 전반적 효과는 결국 재판에서 성취되는 결과에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러한 지적에 따라 2019년 바티칸은행 투명성 재고를 위해 외부감사를 법제화했다.
교황청 자금 유용 의혹을 받고 있는 안젤로 베치우(Angelo Becciu) 추기경 사건과 맞물리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특별히 여러 가지 교황청 재정 개혁안을 내놓았다.
먼저 지난 10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시국 검사로 상법, 은행법 전문가 잔루카 페로네(Gianluca Perone) 교수를 임명하여 자금 세탁 추적의 전문성을 높였다.
그리고 모든 국제적 차원의 계약 및 거래를 감시하는 ‘계약감시위원회’(Commission for Confidential Matters)를 창설하고 교황청 재정의 흐름을 통제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바티칸시국 법령 개정안을 통해 ‘재무감독정보국’(ASIF)의 권한과 감시기능을 확대하고, 바티칸시국 검사로 하여금 “수사를 통해 자금세탁과 테러자금지원 예방 및 퇴치 관련 조사를 총괄”할 권한을 명시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교황청 교회법평의회 후안 이냐시오 아리에타(Juan Ignacio Arrieta) 사무처장은 “국제적 상황에 의해 필수가 된 검찰의 전문화가 두드러진다”며 “이는 교황청 사법당국에 있어 다른 법치 국가들에 대한 신뢰도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교황청은 한편 추기경이 연루된 교황청 자금 유용 의혹 역시도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지난 18일 교황청은 바티칸시국 검찰 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추기경의 자금 유용에 연루된 체칠리아 마로냐(Cecilia Marogna)의 재판이 “임박”했다고 발표했다.
교황청은 재판 임박 소식과 함께 “공동 횡령”(peculato commesso in concorso con altri) 혐의를 받고 있는 마로냐에게 내려진 “예방 조치”였던 범죄인 인도 요청을 철회하면서 “이탈리아 사법당국의 심문을 거부하며 자기변호를 거부한 바 있기 때문에 피고인으로 하여금 이러한 예방조처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교황청에서 재판에 임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로냐는 지난 10월 교황청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조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탈리아 매체 < Adnkronos >는 이와 관련해 “교황청 검찰이 체칠리아 마로냐 재판에 충분한 것 이상의 증거를 수집했다”고 단독 보도하기도 했다.
마로냐는 베치우 추기경으로부터 아프리카와 중동 외교 루트를 확보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57만 5천 유로를 받았으나 이 중 25만 유로를 사치품을 사는데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외신들은 마로냐가 외교 전문가가 아닌 교황청 측의 투자회사 대리인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