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간 금요일 (2021.02.26.) : 에제 18,21-28; 마태 5,20-26
오늘 독서에서 에제키엘은 왕과 사제 등 당시 목자 역할을 맡은 지도층들이 부패한 탓을 하며 자기 운명을 비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 실제의 삶에서 실현해 내는 가치에 의해서만 심판하실 것이라는 이치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서 나오는 선의 가치로서 정의와 평등이요, 달리 말하면 의로움과 공평함입니다. 그래서 그는 집단의 풍조가 어떻든 그에 영향받지 말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실존적인 결단을 강조했으며, 그 결과로 달라질 개인의 운명은 순전히 그 자신의 결단과 삶의 내용으로 달라지는 것임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께서는 조상이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받았다고 해서 자신들도 당연히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당시 유다인들에게 경종을 울리셨습니다. 당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된 조상이 받은 십계명을 매우 형식적으로 지키거나 지키도록 가르치면서 자신들이 의로움의 기준인 양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 대단히 위선적인 처신에 대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즉,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예수님께서는 “살인(殺人)하지 말라”는 제5계명을 들어 그 한심한 왜곡 실태를 고발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이 계명을 근거로 사람의 생명을 죽인 자는 재판에 넘겨 사형(死刑)을 시켰으며 사람을 다치게 한 사람에게는 같은 상해(傷害)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동태복수(同態復讐)입니다. 심지어 사랑과 자비를 설파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에게 ‘바보!’라든가 ‘멍청이!’라고 비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같은 세태가 선민(選民)이라고 자부하던 유다인들 특히 그 중에서도 율법을 철저히 준수한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에 대해 응징(膺懲)하는 처벌(處罰)보다 이미 죄를 저지른 사람의 마음 속에서 악을 몰아내는 일이 더 먼저 행해야 하는 더 중요한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범죄행위에 맞갖은 벌을 준다 하더라도 그가 회개하고 선한 사람이 될 가능성보다는 복수심에 불타서 더 악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해하고 타협하는 대화방식이 더 중요하고 더 먼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기준과 실천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이 과연 어떻게 나타나고 있느냐 하는 계시 진리와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 계시 진리를 솔선수범하여 보여주신 품위에 대해 명심함으로써, 가정 같으면 가부장과 가모장의 모범, 사회 같으면 어른이나 엘리트 계층의 모범, 나라로 말하면 권력을 담당한 책임자들의 모범이 있어야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고 공동선의 질서가 자리잡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에제키엘의 경고에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고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더 강경한 심판의 말씀이 떨어졌습니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에제 34,8).
그 결과로 나라의 공동선이 피폐해지고 국력이 쇠약해져서 강대국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지도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백성은 노예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가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교훈과 목자의 역할은 예수님의 공생활에 매우 진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포함한 산상설교의 말씀도 그 메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에게는 당신 부활의 소식이 알려지지 못하도록 하시는 한편, 믿는 이들에게는 부활하신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셔서 믿음을 굳게 해 주시면서 또한 그들도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 부활의 원동력이 역사상 숱한 신앙인들로 하여금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물론 각자가 속한 집단과 민족과 교회에 있어서 예수님의 메시지가 빛바래지 않도록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정의와 평등, 의로움과 공평함의 가치가 잣대요 기준으로서 살아있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사회는 천손의식은 까맣게 잊어버린 처지였고 조선의 주류로 자처했던 사대부(士大夫)들은 오히려 중국이 내세운 중화사상을 기준삼아 소중화(小中華)로 만들고자 했으며, 그 결과로 양반 중심의 세상이 되어 버린 그 당시에 백성의 절반이 노비였을 만큼 불평등했습니다.
무력한 농민의 부담만 과중하게 만든 전정(田政), 양반은 면제되고 평민만이 부담하는 군정(軍政), 빈민구제를 목적이었으나 고리대금제도로 타락한 환정(還政) 등 삼정(三政)의 문란(紊亂)을 개혁하고자 하는 민란(民亂)이 평안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에서 많이 일어날 지경이었습니다. 국력이 쇠약해지고 국운도 기울어져 가던 조선 후기에 복음을 이 땅에 들여온 선각자들의 뜻은 복음 진리를 통한 사회 개혁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천진암 강학회에서 천주학을 배운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1818년에 쓴 ‘목민심서’(牧民心書)와 ‘경세유표’(經世遺表)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백 년에 걸친 박해로 말미암아 그 뜻은 가로막혔고, 나라를 빼앗기고 분단과 전쟁을 겪은 또 다른 백 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그 뜻은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의로움과 공평함의 가치가 살아있는 나라를 만들어 나갑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