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대할 때마다 난감함이 교차된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원수라는 소리를 남에게 별로 듣지 않고 산다. 정겹다는 의미의 반어법으로 ”이 웬수야!” 소리는 듣는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남에게 ‘너는 나의 원수다.’ 라는 소리를 듣는 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이다.
그러나 1980년 5월 광주학살을 자행한 신군부 전두환 일당은 광주 시민들에겐 ‘철천지원수’라고 칭할만 하다. 그 피해가족에게, 일당의 괴수, 전두환은 ‘불공대천지원수’이다. ‘적’에게서 보호되어야 할 국민을 상대로, 국민의 세금으로 장만한 총칼로 완전무장한 군대를 동원해 사적 권력 장악을 위해 무고한 양민을 폭도로 몰아 학살했다. 역성 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도 정적은 제거했을지언정 양민을 학살하지는 않았다.
근현대사에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대통령은 419를 유발한 이승만과 집권 후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빨갱이로 몰아 사법살인을 저지른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이다. 그들에 의한 피해가족들은 물론 온 국민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불문가지이다.
‘4.19혁명’이나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을 받긴 했으나 개인적 억울함과 사무치는 원한은 끝이 없으리라. 꽃다운 나이의 자식을 잃거나 부모 형제를 저세상으로 보낸 유가족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한 가지 최소, 최대한의 해법은 가해자들이 ‘석고대죄를 하며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의 ‘진심어린 사과’ 한마디였었다.
예수님께서 하신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씀이 허구적 의미로 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일방적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일방적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그 사랑을 느끼는 과정이 우리의 믿음일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일상생활 속에서 믿음의 상실과 회복의 순환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참 신앙인이 되어간다.
인간끼리의 사랑의 감정은 서로 공유를 해야만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남녀 간의 사랑이든 부모자식 간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또는 친구간의 우정 또한 마찬가지다. 서로 당장 공유가 어렵다 할지라도 종내에는 결국 알게 되는 것이 인간의 사랑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의 의미는 앞서 자신과 원수 사이에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할 수 있는 사랑을 말함일 것이다.
나의 철천지원수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도 않고 전두환처럼 뻔뻔하게 잘못이 전혀 없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면 그런 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설사 사랑한다고 해서 받아줄 리도 없는 자를 어떻게 사랑을 하라는 말인가.
악인이나 선인이나 가리지 않고 햇볕을 주시거나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모를까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원수와의 화해는 어떤 면에서는 단순할 수 있다. ‘진심어린 사과’ 한마디이면 그 원한도 오뉴월 봄눈 녹듯 사라질 수도 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속담처럼 지나간 일에 대해 체념하며 원한을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인간에게는 너무 과하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인지(認知)하고 있는 ‘원수’(怨讐)란 그야말로 ‘복수’(復讐)를 해야 할 상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처럼 하느님과 같은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엄청난 걸림돌이다.
헬라어의 원문으로는 원수가 ‘증오하는 자’ 라고 한다. 영어로 번역된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는 그저 적(enemies)일 뿐이다. 그 단어 어디에서도 살벌하기까지 한 ‘불공대천지원수’(不共戴天之怨讐)라는 극단적 개념이 없다. ‘적’(敵)이라는 단어에도 물론 여러 가지 내포된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원수’라는 단어와는 사뭇 그 의미가 동 떨어진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 27-31)
‘불공대천지원수’란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을 정도의 원수라는 뜻이다. 한 쪽은 이 세상 아닌 저세상에 있어야 한다는 섬찟한 의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적이란 나와 경쟁 관계에 놓여 있거나 아군과 적군으로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상대방을 일컬음이다. 또는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실제로 가족에게 해를 가하고 가정의 평화를 무참히 짓밟은 자도 당연 우리가 지우고 싶을 정도의 ‘불공대천지원수’로서 ‘적’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란 ‘불공대천지원수’도 포함되겠지만 지금은 적이 아닐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는 상대를 가리키는 말씀인 것 같다. 적이란 의미를 살펴보면 상대적 개념으로, 적은 언제든지 친구로 바뀔 수 있으며, 영원한 적도 있을 수 없다.
전쟁의 당사국이라 할지라도 전쟁의 와중에서 군인이 아닌 한, 민간인들끼리는 서로 적이 되어 싸우지 않는다. 상대국 민간인과 포로, 부상자에 대해 위해를 가할 수 없는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우리가 아는 적(원수)의 개념에서도 벗어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수’(적이라고 생각되는 자)까지도 사랑하라는 뜻일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원수를 ‘억지로라도’ 사랑하라는 강권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한다는 행위로서 미워하는 자에게 잘해주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해 주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쉽지 않긴 하지만 ‘대놓고’ 사랑한다는 뜻을 밝히는 것보다는 쉬울 것도 같다. 우리가 오해하는 구절이 다음으로 이어지는데,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라는 뜻은 오른뺨을 다시 들이밀어 가해자가 자신의 오른 손, 손등으로 치게 만들어 때린 자를 부끄럽게 한다는 유다인들의 관습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또한 겉옷을 가져가려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내어 주라는 말씀 또한 그의 양심에 비추어 차마 할 수 없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도록 하려는 의도도 상당히 있다.
사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보다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자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라’라는 행동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맹자님이 설파하신 사단칠정 중에 ‘수오지심’(羞惡之心)과 일맥상통 한다. 다른 얘기이지만 우리의 현실 속에서 지도자연하는 자들이 이 수오지심을 느낀다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후안무치하고 철면피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정치모리배들이 들끓고 있는 이 나라가 참 딱하다.
나에게 잘못한 이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도 다름이 아니다. 그 자체가 원수까지도 용서한다는 뜻이긴 한데, 실상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남을 용서하기보다는 용서를 청해야 할 일이 더 많다. 전두환의 입장이 그런 것이 아닐까? 용서를 청하는 일은 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남을 용서하는 행위에는 여러 가지의 경우를 수반한다. 용서를 해야 하는 상대가 강자이면 울며 겨자먹기로 마지못해 용서한다. 어쩔 수 없이 용서하는 경우도 많다. 소위 ‘정신승리’라는 시대의 명언이 이런 경우에 쓰인다. 그러나 내가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보다 약자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욱 곤혹스럽다. 정치모리배들은 항상 단체로 연단에서 큰 절을 하며 국민에게 용서를 청한다.(서구 정치 문화권에서는 전혀 있을 수도 없는)
그러나 개인 자격으로 국민에게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하는 일은 거의 없다. 있다 해도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주기도문의 일부분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주기도문과는 달리 우리는 이런 기도도 바쳐야 한다. “저희가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용서를 청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물론 원래 주기도문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려면 우리가 먼저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도치법을 사용한 조건문이긴 하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신 것 같다. 용서를 해라가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청해라’라고 말씀하셔야 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내가 용서를 청하는 것이 용서를 하는 것보다 일흔 일곱 배 이상 더 힘들다.
용서를 하는 행위가 사랑이라면 용서를 청하는 행위에도 사랑이 배경에 깔려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실상 계명이지 레토릭만으로 볼 수는 없다. 사실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그 원수가 자기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든 모르든 간에 그를 사랑해야 한다. 진정한 이웃의 의미를 알게 해준 선한 사마리아인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은 동일하다. 만약에 선한 사마리아인이 길에서 강도를 당한 사람이 자신의 ‘원수’였어도 그를 구해야 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라면 마땅히 ‘적’은 물론 흉악한 자일지라도 살려내야 하는 것처럼!
결론에 가까울수록 헷갈리기 시작한다. 대다수의 뜻과 달리 ‘사형선고를 받고 사면(赦免)’ 된 ‘전두환 류의 사람들’은 용서를 빌기는커녕 한마디 사과도 없이 죗값을 치렀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비록 사과 한마디 없이 저세상으로 갔을지라도…! 자비의 하느님의 시선으로는 결국 그도 사람이었므로 일단은 우리의 이웃이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전두환’이라는 이름은 이제 우리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되었고, 그의 이름은 ‘전두환스럽다’라는 형용사의 완결로 국어사전에 등록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전두환스러운 사람’이 이 땅에서 또 활개 칠 때 그 형용사를 다시 꺼내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 묵시록에 언급된 ‘최후의 심판’은 ‘수사권’, ‘기소권’과 ‘재판권’을 다 가지신,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행하면 자신의 만행에 ‘사과 한마디 없었던’ 전두환도 결국 ‘우리의 이웃’이 된다! 그런데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에 대해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행하기가 심정적으로 결코 쉽지 않다는데에 난감함이 교차한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