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2022.11.6.) : 2마카 7,1-14; 2테살 2,16-3,5; 루카 20,27-38
위령성월에 맞이하는 첫 주일인 오늘은 평신도 주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미사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헬레니즘을 강요하면서 유다교를 박해하던 그리스계 정권에 맞서 일어선 마카베오 일가와 함께 싸우던 일곱 형제는 내세에서 이룩될 부활을 희망하며 장렬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런가 하면 구약시대에 희망하던 내세의 부활을 넘어서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대로 이미 현세에서 시작되는 부활의 삶을 살아가던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로써 이룩되는 영생의 삶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면서 단지 육신이 살아나는 현세적 소생을 넘어 영혼까지 살아나는 영생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요청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 11,25-26). 이미 살아계실 때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임을 일깨워주셨다는 것은 죽기 전에도 얼마든지 부활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삶은 육신의 죽음과 상관없이 지속되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장합니다. 그래서 살아서도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죽더라도 그 영원한 생명이 단절되지 않고 지속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니코데모에게도 말씀하셨다시피, 부활은 하느님 나라 안에서 거듭 태어난 삶입니다(요한 3,5).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지향하고 구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을 때 이 부활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에 관한 신앙이 성숙해 감에 따라서 이 은총의 실체를 차츰차츰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에 대해서 공의회 이전까지는 서양식 일변도로만 알아들었습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연원하는 사고방식으로서, 육신과 영혼으로 결합된 인간이 죽으면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고 자유로워진 영혼이 내세를 살아가는 상태를 부활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여기서 부활의 두 차원인 천국과 지옥은 생애 동안에 행한 선과 악의 정도에 따라서 결정됩니다(賞善罰惡). 의인은 부활하여 천국으로 올라가고 악인은 부활하여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요한 5,29). 이러한 설명은 합리적이고 명쾌해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런데 서양식으로 사유한 전통적 부활 교리의 단점은 부활을 죽은 후의 일로만 미루어놓았기 때문에, 이미 살아계실 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더욱 치명적인 결함은 살아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면서도 부활의 영성으로 살아가신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는 목표를 아예 포기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는 논리-분석적인 사고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직관-종합적인 사고방식도 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동양 사상 가운데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입니다. 서기전 5세기경에 활약한 중국 사상가 노자는 도덕경에 자신의 사색을 5천 개의 한자에 담아 놓았는데 이를 압축한 표현이 ‘무위자연’ 사상입니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도식(無爲徒食)’과는 반대입니다. 자연의 뜻이 아니고서는 또는 자연의 뜻을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자연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 참뜻입니다. 자연의 순리대로 살고자 하고 인위적인 노력을 매우 삼가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무위자연 사상에 따라 사는 삶은 하느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으로 통하며 현세의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아가는 삶으로도 연결됩니다. 이에 대한 교훈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무 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이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제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갔다.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신호승,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일부를 인용, ‘무위당사람들’, 2022.10. 80호).
무위자연의 삶이 왜 필요할까요?: 그것은 생명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 현실이 도전과 극복의 대상으로 다가오고 있고, 또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인간 본성의 현실 또한 선하지만은 않으며 선악이 서로 다투고 갈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생명의 환경인 세상 현실이나 사람들의 본성이 보여주는 인간 현실에 대해서 이를 주어진 자연으로 삼고 때로 도전하고 때로 극복하며 또 때로 맞서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자 하는 지향이 무위자연의 삶에 담겨 있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세상 현실: 병원의 무균실이나 농촌의 비닐하우스 온실 같은 환경 속에서는 결코 우리의 내공이 깊어질 수 없고, 산속에서 홀로 도를 닦는다고 한들 영성이 성숙되기는 어렵습니다. 성화는 우리가 태어날 때 받은 인간성이 세상 현실에서나 인간 현실에서 단련되는 과정을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이 과정에서 부대끼며 겪는 십자가가 사실은 생명 성장과 성숙의 에너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변화도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싹이 트고 꽃도 피며 열매도 맺히는 생명의 섭리인 까닭에 무위자연의 사상과 통합니다.
인간 현실: 이 세상에 착한 사람들만 살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 의인들끼리 서로 다른 견해를 경청해 가면서 선의의 경쟁으로 공동선을 증진시켜가면, 억울할 일도 없을 것 같고, 누가 앞서가도 뭐 하나 걱정되지 않을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세상은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이래로 아직 오지 않았고,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지난한 역사를 지켜본 성경의 통찰입니다.
그래서 이 험한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숱한 갈등과 불화를 거쳐야 하는 과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인들끼리 모이는 조직이나 모임에서도 이견은 생겨나기 마련이고 무관심과 비협조에다가 간혹 의심이나 몰이해도 겪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치 어린 아기들이 선악에 대한 관념이 없이도 이기적인 본성을 보이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이런 과정이 생략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이게 현실이고 인간 사회의 자연입니다. 그런 세파에 닦여 가면서 내공도 깊어지고 영성도 성숙해 가는 가운데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무위자연의 삶이면서 동시에 부활의 삶입니다.
다시 맞이한 평신도 주일에 공의회가 일깨운 평신도 사도직의 역할과 사명을 이 무위자연의 사상에 비추어 생각해 봅니다. 예언자직과 왕직과 사제직으로 이루어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성직자만이 아니라 교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이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입니다.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서 매우 영성적이면서도 자연의 현상을 예로 드는 감수성으로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논리를 세움으로써, 논리-분석적인 사유방식과 함께 직관-종합적인 사유방식을 아우르는 종합을 보여주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시면서 조화와 균형의 원리를 인간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이고, 이 원리에 대한 살아있는 비유가 자연현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질서와 조화, 그리고 인간 세상의 무질서와 부조화가 왜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무질서를 질서로, 부조화를 조화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요한 23세는 회칙 「지상의 평화」에서 차분한 논리로 설파하였습니다. 자유와 이에 바탕한 모든 권리는 책임과 의무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책임과 자유, 의무와 권리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무질서 안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예언자직과 왕직과 사제직의 세 직분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계승함과 동시에 책임으로 자유를 누리고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살아가야 합니다. 이 진리를 반대로 거스르기 때문에 세상이 그토록 무질서하고 어지러우며 힘이 약한 이들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 나라를 향한 목표와 부활 신앙이라는 중심을 잃어버리지 마시고, 가정과 사회에서 무위자연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서두르지 않는 은총과 인내의 덕행을 기르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그 모든 어려움들이 사실은 우리의 부활 역량을 키워주는 자연의 섭리라는 이치도 깨닫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화의 은총 역시 크고 작은 십자가를 안팎으로 짊어지고 겪어야만 비로소 자연스럽게 익어가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