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일(자선주일)(2022.12.11.) : 이사 35,1-10; 야고 5,7-10; 마태 11,2-11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일찍이 예언한 대로, 주님의 영이 이끄시는 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질병으로 고통받고 마귀들려 고생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이 덕분에 이들은 마음이 가난한 이들로 변화되어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 중에 대표적인 이들은 제자로 뽑혀서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예수님께서 본보기를 보여주신 대로 사도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파견되었습니다. 이들이 택한 자발적 가난이 사도로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였지만 이들의 투신 덕분에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이 사도적 가난이 경제적 가난을 선택하여 정신적 가난으로 변화시키는 가난함의 순환이 바로 복음화의 구도로서, 이 구도가 지닌 선교적 효율성과 진리성은 박해를 가하던 로마제국마저도 신앙을 공인하게 만든 초대교회의 공동생활로 입증된 바 있습니다.
오늘날 가난한 이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학계에 보고된 ‘빈부격차의 실태와 과제’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997년 말 심각한 국가적 경제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하고 사회보험체계를 완성하여 각종 소득상실 위험에 대비한 사회안전망을 마련함으로써 절대빈곤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감소시켰다고 평가되고 있지만, 빈부격차는 오히려 더욱 악화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경제구조가 취약한데다 내수부진이 겹치고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 고용을 허용함으로써 임금격차가 확대되고 소득분배 구조도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펜데믹 사태가 3년째 장기화되면서 이러한 빈부격차와 경제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된 결과, 세계적으로도 상위 소득 10%는 전체 소득의 52%를 차지하게 된 반면에 하위 50%는 8%에 불과합니다. 이는 1995년부터 지속된 추세로서, 세계 상위 1%는 이후 축적된 부의 1/3 이상을 가져간 반면 하위 50%에게는 2%만 주어졌습니다. 부자 쪽으로 이동하는 인구는 소수이고, 다수는 저소득층으로 이동했으니 ‘양극화’라기보다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라고 해야 정확합니다.
한국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심각합니다. 1990년~2010년 사이에 고소득층은 2% 남짓한 소수가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증가한 반면에 중산층, 지식인층, 고학력자 등 중간 소득계층에 속하는 다수는 더욱 가난해졌습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를 누려오던 중산층, 고학력자, 전문직과 지식인 계층, 숙련기능직 노동자들이 과거 생활수준보다 더 열악한 환경으로 떨어지면서 그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해져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리면 정부로서는 소수의 부자들만으로 국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절대다수가 이전보다 가난해져서 구매력을 잃어버리면 시장의 소비가 위축될 수밖에 없고, 이는 기업운영에도 압박요인이 되어서 부자들의 소득도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고, 정부가 거두어들이는 세수도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의 양극화 추세는 치열한 경쟁과 사회 내부 갈등을 초래하며 결국 국가의 잠재성장률을 약화시킵니다. 빈곤층과 저소득층의 교육기회가 줄어들고 이는 정치적 갈등으로 번지게 되어서 국가운영의 시스템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 있는 문제입니다. 나라 전체의 경제력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이렇듯 심각합니다.
우리나라 중산층 비율은 외환위기 사태 이후에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1990년에는 75%를 차지했었는데, 2005년에 69%로 떨어지더니 2019년에는 60% 이하로 줄어들었습니다. 2020년 이후에는 펜데믹 위기가 이 중산층 감소 추세를 더욱 부추겨서 저소득층, 자영업자, 소상공인 등 사회적 약자 계층을 빈민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노동능력이 없는 기초생활보장대상자에게 물가상승으로 인한 화폐가치의 하락을 감안하여 최저생계비의 실질가치를 보장해 주어야 하고, 노동능력과 의지가 있는 이들에게는 직업훈련과 취업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노동을 하는데도 빈곤층에 머무르는 이들에게는 최저임금을 보장해 주어야 할 뿐 아니라 세액공제를 해 주어서 최저생활을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일용직 및 임시직 등 비정규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 자영업자와 단순노무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유망분야로 전직할 수 있는 직종교육을 실시하여 안정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안정된 중산층 시민들의 의식과 행동도 개선되어야 정부의 정책도 실효성을 거둘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관여하고 있는 직업적 결정이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선택에 있어서 상류 부유층을 따라 하기보다는 빈곤층 시민들을 배려해야만 빈부양극화를 개선하도록 촉구하는 방향으로 여론이 조성되어 정부의 정책도 탄력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상위 소득 10%에 해당되는 부유층이 전체 소득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는 현실을 감안하면, 저소득 빈곤층뿐만 아니라 최근에 빈곤층으로 전락한 중산층은 물론이고 아직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중산층도 전체적으로는 가난한 이들에 해당됩니다. 사회를 경제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부유층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의 사정을 고려한 공동선이 채택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이나 특히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 대해 하신 말씀 모두가 부유층과는 확연하게 대비되는 나머지 중산층과 빈곤층을 포함한 이들에게 적중합니다. 그런데도 중산층 시민들이 부유층을 따라가려는 나머지 빈곤층으로 전락한 과거의 중산층과 저소득층과 거리를 두려고 하면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허위의식이 생겨납니다. 사회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정부의 정책마저도 전체적인 균형을 잃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신론적 성향을 지닌 중산층 시민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재물을 섬기려고 하는 까닭에 가진 것에 만족하기보다 더 큰 부를 얻고자 하는 탐욕에 사로잡혀 무의식중에 부유층을 흉내 내며 따라 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자기자신과 가족에게 필요한 재산을 겨우 가지고 있는 중산층이 부유층이라고 불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득 수준으로 상위 10%에 해당되는 부유층은 중산층에 비해서는 엄청난 격차로 부동산과 현금 자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든가,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리라”는 말씀에 비추어보아도 상위 10%에 해당되는 부유층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중산층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가난한 이들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바늘구멍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낙타와도 같은 구제불능의 처지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나빔, 즉 ‘야훼의 가난한 이들’ 역시, 극빈층으로 분류되어 바빌론 유배 당시 포로로 끌려갈 가치도 인정받지 못해 예루살렘에 남겨졌던 까닭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라고 불렸던 ‘암하레츠’와는 구별될 만큼,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중산층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야말로 대표적인 아나빔이셨고, 그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도 아나빔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가정과 직업을 영위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도 아나빔이었고,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토박이 지지자로 남아 있다가 제자가 된 예순 명의 제자도 아나빔이었으며, 이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맞이하고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교 초대교회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아나빔’이라는 히브리식 호칭보다 ‘가난한 이들’이라는 보편적인 호칭으로 부르셨으며 이들을 당당하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 받을 주체로 내세우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재물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이들은 ‘가난’을 수치스럽게 여기지만, 예수님께는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초대받을 수 있는 자격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의 메시아’로 자처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해 계시된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가톨릭교회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입니다. 이들이 겪는 가난을 빈곤이라 합니다.
둘째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입니다. 이들이 겪는 가난은 청빈이라 합니다.
셋째는 스스로 가난해진 이들입니다. 이들은 본시 청빈을 살던 중산층이었으나 예수님을 따라서 빈곤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사도들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서 지난 2014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천주교 주교단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라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기를 신신당부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이래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가톨릭교회가 입증한 복음화의 정통 노선입니다. 그러므로 가톨릭 중산층이 나아갈 길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 사회의 유사 부유층 의식에 젖어 있는 중산층이 지닌 허위의식의 이데올로기를 복음화하는 일입니다. 믿는 이들은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마음이 가난한 이들로서 청빈을 지향하며 사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가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셋째, 사도적 가난을 택한 이들을 통해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입니다. 이렇게 가톨릭 중산층이 선택하고 실천하면 교회도 복음적으로 쇄신되고 사회도 하느님 나라를 향해 진보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는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 하신다는 섭리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