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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는 세속적인 방식 아닌 복음적인 선택으로만 다가올 것
  • 이기우
  • 등록 2023-04-08 18: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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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금요일(2023.4.7.) : 이사 52,13-53,12; 히브 4,14-5,9; 요한 18,1-19,42


말씀의 초점


성금요일인 오늘, 요한에 의한 수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형 판결할 로마인 총독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 세상의 권력자 앞에서 이 말씀을 하셨으나, 평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마르 1,15)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다가왔으나, 속하지는 않는 이 하느님 나라와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먼저 분명하고 단순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이 세상은 예수님의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에게 기준은 하느님 나라이며 또한 그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룩할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기회가 우리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주님 수난 예절은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으로 알려주시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선포합니다. 


메시아 수난의 배경과 이유


하느님께서 한처음에 말씀으로 이 세상과 우리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우리의 육신 생명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전부가 아닙니다. 이 세상이 아름답게 창조되었고 우리 생명이 오묘하지만,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과 훨씬 더 오묘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이 나라와 이 생명을 기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자유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닮은 나라를 세우는 자유였고, 그 기회는 이 자유를 주도적으로 활용할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처음부터 최초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넘보려하거나 거역하였습니다. 마귀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끼어들었고 아담과 하와가 그 꼬임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 벌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며 저지른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다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기를 염원했으나, 큰 아들 카인이 작은 아들 아벨을 죽이는 죄가 또다시 저질러졌고, 카인의 후손들은 마구 죄악을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이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보시기에 의로웠던 노아(창세 6,8-9)만을 남기시고 대홍수로 카인의 후손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심판하신 후에 노아에게 다시 한번 자유와 기회를 주셨습니다. 대홍수 심판에서 살아남은 노아는 아담이 했던 것처럼 하느님께 제사를 바침으로써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렸습니다(창세 8,20). 


그리고 제2의 아담이 되어 새롭게 인류의 삶과 문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노아의 후손들 역시 대다수가 다시 죄악에 물들어버리는 것을 보시고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악으로 이끌고 당신의 창조 사업을 방해하는 마귀와 정면 대결을 하기로 하느님께서 결심하시고 구세주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한처음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함께 계시던 그 나라를 이 세상에 전면적으로 세우시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마귀와의 대결은 불가피했습니다. 


마귀는 늘 해 오던 대로 악인들을 총동원해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마귀의 하수인들이 총동원되었습니다. 대사제 카야파를 비롯한 산헤드린 의회 의원들은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했고, 평소에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기 일쑤였던 율법 학자들을 비롯한 바리사이들이 의회에서 대사제에게 동조했으며, 신임 받던 제자 이스카리옷 유다가 밀고를 하여 끄나풀이 되어 주었는가 하면, 로마인 총독 빌라도는 정당한 재판을 해야 할 직무를 유기하고 군중의 위압적인 선동에 눌려 예수님께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이런 악인들에 의해서 당신 운명이 판가름나야 했던 현실은 대단히 괴롭고 혐오스러운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악인들을 통해서도 당신 나라를 드러내시려는 성부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순명하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바로 성목요일 늦은 밤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 흘려가며 공포와 번민 속에서 바치신 처절한 기도에서였습니다. 


그리고 한밤중 산헤드린 의회에서 조작되고 협잡 투성이로 증인이나 증거도 없이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고, 이른 새벽 빌라도 관저 앞뜰에서 졸속으로 밀어부쳐진 재판에서 사형이 최종 확정되고 오전 중에 집행되었습니다. 


이사야의 메시아 수난 예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숭고해지기까지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수치를 당하셔야 했습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메시아의 수난을 미리 내다보고 우리에게 전해 주었으니, 이것이 수난기약(受難旣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난은 죄악에 물든 인류를 당신 나라에로 이끄시기 위해 바쳐진 희생이시기에 우리도 메시아의 백성이고자 한다면 그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함을 강하게 암시하였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 또한 예수님의 고난과 순종을 증언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이 고난과 순종을 본받아야 함을 피력하였습니다. 


메시아 백성의 수난


한국의 초대교회도 백 년 동안이나 박해를 받는 동안 온갖 수난을 겪었습니다. 조정과 유림 그리고 백성들로부터 ‘나라가 금(禁)한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다스려졌으며, ‘조상을 공경해온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수(禽獸)만도 못한 무리라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이리하여 관변기록상으로만 2천 명, 신자들의 구전상으로는 2만여 명이 죽임을 당했으니, 메시아의 수난을 이어 받은 메시아 백성의 수난이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간신히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나자 국운이 급격히 기울어져서 국권을 일제 군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기는 또 다른 수난이 닥쳐왔습니다. 이 당시 경성교구장이었던 프랑스 선교사 뮈텔 주교는 또다시 교회와 신자들이 박해를 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조선총독부와 유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종교의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는 대신, 일제의 식민통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정교분리(政敎分離)노선’을 걸었습니다. 


박해를 피해 교회가 살아남자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결과이겠으나, 조선 조정과 유림의 박해를 받던 때와는 정반대의 선택이었습니다. 민족의 수난에 동참하고자 했던 신자들에게는 이 같이 외국인 선교사 출신 교구장의 이런 방침과 노선조차 또 달리 어려운 수난으로 다가왔습니다.


어쨌든 그 결과 순교자를 현양하는 사업을 벌일 수 있었고, 방인 성직자를 양성하여 전국에 파견할 수 있었으며, 전국에 본당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주교좌 성당이 있던 명례방 터에는 서양 고딕양식으로 세운 대성당이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뮈텔 주교는 침략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을 살인자로 단죄함은 물론 삼일만세운동을 비롯한 민족의 독립운동에 신자들이 일체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이러한 친일노선으로 말미암아 독립운동에 참여한 개신교나 불교 그리고 민족주의 진영의 독립운동가들로부터는 ‘반민족적인 서양 종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으니, 이도 역시 신자들에게는 참기 어려운 수난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방인 주교가 교구장이 되어 대한민국의 건국과 부흥에 적극 협조하였고 특히 국제연합의 승인을 받는 과정에서 교황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작용했으나, 해방 직후에 교회와 신자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던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여 공산화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전쟁의 고통을 뼈저리게 겪은 결과 교회는 철저하게 친미반공노선을 걸었습니다. 교회와 함께 나라가 살아남자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 말기에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위해 기도했듯이, 이번에는 ‘반공의 보루’로 자처하면서 우리 교회는 북한에 있던 신자들을 ‘침묵의 교회’로 규정했고 멸공통일을 위해 기도바쳤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남북한의 국력 차이가 역전되기 시작할 무렵부터 비로소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규정한 정책에 따라서, 1990년대부터는 북한선교 대신 민족 화해를 조심스레 내세우기 시작했고 민족 복음화를 위해 기도바치기 시작했습니다. 


1984년에 103위 순교복자가 시성되었고, 2014년에 124위 순교자가 시복되면서, 교황청에서는 그동안 신장시킨 교세를 바탕으로 아시아 복음화와 이를 위한 교회 쇄신을 주문했지만 아직 한국의 천주교회와 신자들은 보편교회의 여망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있는 중입니다. 복음적 선택이 초래할 수난을 피하는 데에 이골이 나버린 탓이었을까요? 


하지만 하느님께서 한민족을 복음화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일꾼으로 삼고자 하시고, 한국교회가 한민족을 일깨우라는 소명을 받고 있음을 요한 바오로 2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은 보편교회 수장으로서 하느님의 섭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백성이 나아갈 길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이 세상을 죄악으로 물들이고 있는 마귀와 악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기 심판이며,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로 하여금 메시아 백성이요 그리스도인들로서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 나서라는 대사제의 진군(進軍) 나팔입니다(히브 4,14 참조).


하느님 나라는 죄 많은 이 세상을 혁파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타날 것이며, 멸시와 수치 등 메시아께서 받으신 수난은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부활의 필수적인 길로서, 메시아 백성도 따라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이 악인들의 죄악을 방조하면서 하느님의 섭리에 엇박자를 내고 말았던 역사적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대사제로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과 하느님 섭리에 대한 순종을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받아들이도록 오늘, 주님 수난의 전례가 웅변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 나라는 세속적인 방식이나 인간적인 경로가 아니라 오직 복음적인 선택으로만 다가올 것입니다. 


그 선택으로 다가올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멋진 세상, ‘사랑의 문명’입니다. 이를 위한 신앙과 교회의 쇄신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복음화는 그 과정에서 덤으로 얻어질 하느님의 부활 선물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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