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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문명을 민들레 홀씨처럼 퍼뜨리는 길
  • 이기우
  • 등록 2023-05-09 16: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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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5주간 화요일(2023.5.9.) : 사도 14,19-28; 요한 14,27-3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당신의 평화를 제자들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내려주신 선물이자 마지막 강복이었습니다. 또한 독서에서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첫 복음선포를 행하여 커다란 성과와 호응을 얻은 바오로 일행을 시기한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리스트라까지 쫓아와서 돌을 던지는 바람에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일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과 독서의 상황이 모두 그리스도 신앙이 유다교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는 형편을 보도한 것입니다. 생명과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가 듣게 된 하느님 말씀이 이러합니다. 이 말씀에 하느님의 영이 서려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영에 관한 일반적인 이치를 하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인간 생명은 몸과 마음과 혼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영을 받아야만 온전한 영혼으로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영혼이 살아있어야 마음도 몸도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에게 해당되는 현실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집단, 더 나아가서는 민족에게도 어김없이 해당되는 현실입니다. 


생명의 차원에서 보자면, 영과 소통되어야 할 사람들의 혼이 세속화된 문화에 의해서 방해를 받기도 하고 심지어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물질만능 문화도 그렇지만, 생명과 성과 가정의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반생명적 문화가 모두 하느님의 선물인 생명에 대한 소극적이거나 적극적인 박해입니다. 


또한 평화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안중근 토마스가 동양평화론이라는 화두를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온 겨레에게 제시한 이래 우리 겨레는 이 평화를 단 한 치도 실현하지 못한 채 해묵은 냉전구도 속에 휘말려 왔습니다. 


그제나 지금이나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친중이냐 친미냐 혹은 친일이냐 종북이냐, 또는 한미일 연합체제 노선이냐 민족화해 노선이냐 하는 고질적 갈등에 휘말린 채 평화의 꿈을 상실해 왔고 복음화 과업에 대해서는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권이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교체될 때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이, 우리 민족혼이 생명과 함께 역시 하느님의 선물인 평화에 관한 하느님의 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처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시대의 징표입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한반도와 그 주변에 자리잡은 지난 반만년 세월 동안 대륙을 호령했고 바다를 주름잡아 왔었습니다. 국력이 약화될 때에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에 휘둘린 것이지 국력이 강성할 때에는 대륙과 해양에 우리의 높은 선진문물을 전해 주었습니다.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연결해 주는 길목인 동시에 대륙과 바다를 아우를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 붙어서 생존을 도모할 처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대륙과 바다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류 평화에 대해서 한민족이 홍익인간적 가치와 사랑의 문명이라는 목표를 간직할 수 있는 이유이며 또 간직해야 하는 명분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장면도 하느님의 영이 사람들에 의해서 차단당하는 위험한 모습입니다. 바오로는 이스라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준으로 재해석하여 피시디아 안티오키아 회당에 예배하러온 유다인들에게 전해 주었는데, 다행히 이 강론을 들은 유다인들이 잘 알아 들었고 그 결과로 더 많은 유다인들까지 호응하게 되자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군중을 막고 바오로 일행을 탄압하였습니다. 


특히 바오로는 돌에 맞아 거의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했다고 하여 신으로 떠받들여질 뻔했던 그가(사도 14,10-11) 돌을 맞고 죽을 지경이 되어 버린(사도 14,19) 이 극적인 위기 체험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마치 잘 아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회상했습니다. 그의 겸손입니다. 


그는 셋째 하늘까지 들려 올라가서 하느님의 환시를 보았다는 것입니다(2코린 12,1-10). 그 환시에서 들려온 메시지에 의하면, 그 일로 말미암아 바오로는 몸에 가시가 찌르는 듯한 증상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자만심을 다스리라는 뜻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알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약해질 때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강해지실 수 있으므로, 그 자신은 그러한 증상이 주는 체력의 약함은 물론 반대자들이 가하는 모욕도, 심지어 다른 모든 재난이나 박해나 역경까지도 모두 달갑게 여기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식별 태도와 겸손의 영성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평화의 실체입니다. 겉으로는 옳은 일을 하다가 겪는 어려움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느님께 더 나아가는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입니다. 여기서 창조주 하느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인간의 위대함과 하느님을 닮아가는 과정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악에 맞서고 그 박해로 고난을 받으면서도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원인이 되었던 옳은 일과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일을 그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음을 실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생명의 문화와 사랑의 문명을 이룩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든 민족적으로든 그렇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영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생명과 평화를 위해서 신앙인 개인들은 물론, 겨레 전체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야 합니다. 그 길은 사랑의 문명을 민들레 홀씨처럼 퍼뜨리는 길입니다. 


이를 위해서 보편교회를 대변하는 교황청의 목소리, 특히 한국을 찾아와서 전해준 두 교황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외침이란, 우리가 그토록 염원해 마지않는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 및 통일은 우리 민족이 먼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더 큰 뜻을 위해 우리 자신의 노력을 봉헌할 때에 덤으로 주어질 선물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또한 ‘더 커다란 뜻’이란 사랑의 문명이요 아시아 복음화이며, 우리가 봉헌해야 할 희생이란 생명의 문화와 이를 위한 교회 쇄신입니다. 영혼이 죽어버린 사람처럼 살지 말고 영혼이 깨어나 부활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축복으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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