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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들이 잔치처럼 함께 살아가는 세상 이룩하길
  • 이기우
  • 등록 2023-12-05 19: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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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간 수요일(2023.12.6.) : 이사 25,6-10ㄱ; 마태 15,29-37

  

가톨릭 4대 교리 가운데에서 신앙 진리의 제1공리인 ‘천주 존재’에 관해 묵상한 내용을 전해 드리는, 두 번째 꼭지입니다. 첫 번째 꼭지에서 이사야 예언서 11장의 말씀이 예수님의 공생활로 실현된 삶을 소개해 드리면서, 사랑으로 정의와 평화를 꽃피우시는 하느님의 역할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두 번째 꼭지에서는 독서의 주제어인 ‘잔치’와 복음의  주제어인 ‘음식’을 열쇠말로 삼아, 생명을 먹여 살리시는 하느님의 역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꼭지에서 ‘가치’라는 관점에서 하느님의 역할을 바라보았다면, 이 두 번째 꼭지에서는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만물과 생명을 지어 내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생명들을 기르십니다. 태양을 통해서는  물리적인 에너지를 주시고, 예수님을 통해서는 영적인 기운도 주십니다. 온 우주 안에서 오직 지구에만 생명이 지탱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셨고, 또 지구상에 출현한 그 많은 생명체들 가운데에서 오직 사람에게만 하느님을 닮을 수 있는 가능성을 은총으로 선사하셨습니다. 이 가능성의 바탕이 인간의 의식 활동인데, 또 이로써 가능해진 사고력과 생각을 표현하는 말과 글 그리고 문화가 사람이 하느님을 닮을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생명 현상의 꽃은 믿음이며,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믿음입니다.


생명 현상을 지탱하는 물리적인 조건이 땅과 물과 공기와 빛, 이렇게 네 가지 있는데 이 조건들은 하느님께서 생명을 위한 축복으로서 무상으로 베푸신 은총이자 우주 안에서 지구에서만 일어난 기적 현상입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저 광대무변한 우주 안에 있는 수많은 별들 중에서 오직 우리가 살아가는 땅인 지구에만 생명체를 품을 수 있는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그 축복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태양 에너지입니다. 태양과 가까운 수성과 금성에서는 더워서 생명체가 살기 어렵고 태양에서 멀리 떨어진 화성과 목성과 토성 등에는 추워서 생명체가 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가 대략 1억 5천만 km 정도인데,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거리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모두 암석 덩어리인데 비해 지구라는 땅은 풍요로운 생명체들을 길러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축복받은 땅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고자 하셨으니, 이를 상징하는 것이  창세기가 소개하는 ‘에덴동산’입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숨을 불어 넣어 주신 사람을 데려다 살게 하시고, 당신께서도 함께 살기를 원하셨습니다(창세 2,8). 묵시록에서는 사람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대해서 이렇게 증언해 놓았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묵시 21,3).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와 마지막 권인 묵시록이 공통으로 증언하는 바 하느님 현존의 이 진리를 당신 생애를 통해 실제로 몸소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둘째, 소우주(小宇宙)라 부르는 인체 즉 사람의 몸에는 수소와 질소와 탄소 등 우주가 탄생할 때의 성분이 우주 전체에 존재하는 같은 비율로 농축되어 있는데 이를 생명의 기운으로 돌게 해 주는 물질이 물입니다. 물은 우주 안에서 오직 지구에만 존재하는 물질입니다. 지구의 표면 70%가 바다로 이루어져 있고 인체의 70%도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류의 문명도 큰 강 유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렇듯 생명 활동에 필수적인 물에 비유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생명의 물’로 자처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8).


셋째, 땅과 물에 이어 하느님께서 내리신 생명의 축복이 공기입니다. 공기란 질소와 산소 그리고 이산화탄소 성분을 함유하고 지구의 생태계를 둘러싸고 있는 기체를 말합니다. 공기는 호흡 작용을 통해 생명체의 생명 활동을 돕습니다. 산소가 없으면 동물과 사람이 생존할 수 없고, 이산화탄소가 없으면 식물이 생존할 수 없습니다. 질소는 생명체의 부패를 방지합니다. 그래서 공기 중에는 질소가 78%로 가장 많고, 산소가 21%로 그 다음이며, 나머지는 이산화탄소 등의 성분들이 소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요한 20,22-2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영적인 숨으로서 불어 넣어 주신 이 성령은 마치 사람의 몸이 공기로 호흡하여 생리적인 생명력을 유지하듯이 사람의 혼이 하느님의 영으로 호흡하게 하여 영적인 생명력을 유지하게 합니다.


넷째, 땅과 물과 공기에 이어 하느님께서 지구의 생명체들을 위해 내리신 축복이 빛입니다.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의 근원은 태양이 자신을 태워 방출하는 에너지, 즉 매초 400만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빛 에너지입니다. 이 빛 에너지를 흡수하는 광합성 작용을 함으로써 식물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이렇듯 물리적인 에너지 공급 체계와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인한 영적 호흡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하느님께서 빛으로서 내려 주신 진리, 즉 사랑입니다. 마치 식물이 광합성 작용을 하여 자신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에너지를 얻고 외부에는 산소를 배출하여 동물과 사람에게 주듯이,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의 성사는 영적인 광합성 작용으로서 그분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의 몸과 피’라는 생명을 얻게 하고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생명의 기운을 발산하게 합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일컬어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요한 9,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베푸실 잔치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들으러 모인 군중이 사흘 동안 굶게 되자 빵 일곱 개와 물고기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공통 열쇠말은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음식을 함께 먹는 일, 즉 잔치입니다. 이는 생명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네 가지 축복을 완성하는 종합적인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의 잔치는 “모든 민족을 음식과 술로 배불리 먹이는 잔치”(이사 25,6)이며, 심지어 더 나아가서는 “죽음이나 슬픔이나 수치도 없애 버린 잔치”(이사 25,8)입니다. 고대인의 소박한 언어로 묘사된 이 메시아 잔치상은 인류 문명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이 ‘메시아 잔치상’은,  풍요로우면서도 그 풍요로움을 고르게 누릴 수 있을 만큼 분배정의가 실현된 경제 현실이며, 슬픔이나 수치가 사라질 정도로 삶의 질이 향상된 사회 현실인가 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사라진 영적 현실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든가 ‘삶에서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라든가 적어도 ‘공포의 대상’이라고 여겨온 세속적 죽음관을 십자가 죽음으로써 극복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써, 또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써 당신 죽음을 받아들이셨고, 또 이로써 죽음을 넘으셨습니다. 인생의 끝, 죄의 벌,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죽음을 그분은 사랑과 믿음으로 쳐부수셨습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예수님의 부활인 것이고, 우리는 그 부활을 전적으로 믿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해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라야 우리는 그분의 삶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분은 공생활을 하시던 평소에도 부활한 삶을 사셨다는 깨달음이 그제서야 옵니다. 그래서 그분은 살아생전에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리라.”(요한 11,25-2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으면,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은 또 그분의 삶을 죽어 부활한 삶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을 때는 물론이요 죽기 전에도 이미 죽어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까지 설명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오늘 복음이 오늘 독서와 맺고 있는 관련성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분이 군중을 먹인 것은 배를 채우는 빵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고, 인간다운 삶이었으며, 믿음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기 직전에도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 말 못하는 이들 등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도와 주시려고 안간힘을 다하셨고, 다른 상황에서도 아들이 일찍 죽어 슬퍼하는 과부라든가 아들이 죽을 병에 걸려 발을 동동 구르는 왕실 관리라든가 간음의 혐의를 받고 사람들 앞에 끌려 나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여인이라든가 한 마디로 정신적 고통으로 아파하는 이들을 위로하시느라 노심초사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삶, 이러한 믿음의 삶이 살아서도 그에 필요한 노고와 희생 덕분에 죽어야 했던 삶이요, 사실은 바로 그 덕분에 그 의로운 희생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부활한 삶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오늘 복음에서 일어난 빵의 기적 사건을 바탕으로 세워진 성체성사의 목표가 이런 삶에 있습니다. 세속적인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킨 삶,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희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삶이 성체성사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영성체를 할 때 ‘아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온갖 생명체들을 먹여 살리십니다. 그리고 생명체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축복을 받은 사람-생명체는 이렇듯 생명체들을 기르시는 하느님을 본받아야 하며 닮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굶주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 고르게 누구나 배고프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래서 분배정의가 세워진 경제질서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가 내다본 세상은 바람직하고 또 절실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인 삶은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 인간다움이란, 나의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노력에 그치지 않고 배고픈 사람이 없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려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그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이 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수반되기 마련이 나의 손해라든가 희생을 아까워하지 말고 기꺼이 하느님께 바쳐드리려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가 희망을 걸었던 메시아 시대는 오늘 여기서 이룩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을 기르시고자 하시는 그 역할을 본받으려는 바로 우리 자신에 의해서 그 희망이 실현되어 갈 때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육신의 배고픔이나 질병과 장애로 고통받는 이들이 하느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될 수 있다면, 그것이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일곱 바구니’(마태 15,37)가 아니겠습니까? 


특히 이 일곱 바구니들이 상징하는 칠성사는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죽음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그분과 함께 죽음을 쳐 없애고 부활하게 됨으로써 죽음 없는 세상에 참여하게 해 주는 기회요, 소외되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해 주는 기회입니다. 이 대림시기에 죽음을 영원히 없애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지향하는 믿음으로 성사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이, 성사에 참여한 그 은총으로 지금 굶주리거나 노동의 고통으로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연대할 수 있으며, 이 모든 이들이 잔치처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이룩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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