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간 수요일;(2024.2.7.) : 1열왕 10,1-10; 마르 7,14-23
솔로몬은 하느님께 청해 받은 지혜가 충만했기 때문에 그 덕분으로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 명성을 듣고 먼 나라에서 스바 여왕이 찾아와서 확인합니다. 이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도 과연 그 명성에 걸맞게 대단했으려니와 그에 따른 부귀영화를 보고 넋을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금 백이십 탈렌트와 아주 많은 향료와 보석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말년의 솔로몬은 하느님의 지혜가 가져다 준 부귀영화에 취해 우상숭배로 빠져들었습니다. 여러 나라들과 평화를 도모한답시고 정략적인 국제결혼을 한 결과 그 이방 왕비들이 들여온 우상숭배 풍습을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초래된 벌은 아들들의 분열이었고, 이는 왕국의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지혜로 말미암은 부귀영화가 거꾸로 그 지혜의 눈을 가려버린 것입니다.
그 후, 다윗과 솔로몬 치세에 정점에 달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국운은 급전직하(急轉直下)로 떨어져서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나라가 분열되어 쇠약해지는 바람에 멸망당하고 이민족들에게 끌려가 유배까지 당해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유배에서 돌아온 후 다시는 하느님의 길을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율법을 재정비했고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려는 운동까지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의 주역이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러한 이스라엘은 율법의 규정을 세분화해서 백성의 삶을 옭죄인다고 해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백성의 의식을 공정과 정의라는 선의 가치로 새롭게 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율법 규정은 죄와 죄 아닌 것을 지나치게 따지게 만들어서 오히려 백성들의 삶을 죄라는 기준에 얽매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목표가 되어 버리면 하느님은 뒷전에 놓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를 행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 생각에 오히려 지배당하게 되는 나쁜 생각들이 사람들의 삶을 어지럽히고 더럽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백성들의 삶을 어지럽히고 더럽히고 있던 죄의 목록을 이렇게 열거하셨습니다(마르 7,20-23).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그리고 어리석음 등의 죄의 목록은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이 목록에 들어있는 죄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흔히 저질러지는 악의 열매입니다. 이 죄들이 사람들을 더럽히고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진리에서 나오는 참된 지혜가 필요한데, 그 지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그 지혜가 올바르게 실천되는지 여부는 과연 그 사회가 공정한지 또 정의로운지에 달려 있습니다. 공정의 가치는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과정에서 실현되고, 정의의 가치는 각자에게 그 몫이 노력한 만큼 고르게 주어지는 결과에서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하느님보다는 악에 더 기울어지고 있었던 참담한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에 대하여 이미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지혜를 청하고 그 결과로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진리를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메시지가 바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는 복음 선포였습니다.
이미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주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영적인 현실을 깨닫고 이에 순응하기만 하면 인간은 지혜로워질 수 있고 세상은 공정과 정의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는 생각과 삶의 방향을 전적으로 하느님께로 향해야 한다는 대전환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시대에 한민족은 물론 아시아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증인이 있으니, 그가 바로 안중근입니다.
안중근 토마스는 조선왕조가 부패와 타락으로 국운을 일제에 빼앗기게 되었던 구한말에 한민족과 천주교인들에게 시대적 소명과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한국교회 초창기 선각자들의 뜻과 치명자들의 순교정신을 물려받은 그는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서 일제의 아시아 지배를 미화한 ‘극동평화론’을 펼치던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하얼빈 의거를 결행하고 나서, 여순 감옥에서 미완의 동양평화론을 남겼습니다. 안중근 연구자 신운용은 안중근이 이 거사를 결행하기까지 보여준 종교적 태도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안중근은 삶의 의미를 “천명이 무엇인가 하는” 종교적 문제에서 찾았다. 그는 한국독립과 동양평화 실현이라는 천명론에 따라 이토를 처단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이토 히로부미 처단의 정당성을 ‘동양평화’와 ‘한국독립’ 실현이라는 천명론에서 찾았고 그 구현 방법론으로 동양평화론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안중근은 천명을 실천할 주체를 사람으로 상정하였다. 그는 천명이 저절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천명을 자각한 의인만이 천명을 실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면모를 간파한 박은식은 그를 ‘평화의 대표자로 나선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던 것이다. 안중근은 천명이란 현세를 한국이 독립되고 동양의 평화가 구현된 ‘도덕세계’를 만들라는 신의 명령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그는 천명을 구현하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으므로 천당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는 그의 주검을 하얼빈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죽어서도 한국독립과 동양평화 구현의 밑거름이 되고자 하였다.(‘삶과 죽음에 대한 안중근의 종교적 해석과 그 평가’ 초록, 신운용).
그러니까 안중근은 하늘의 명령에 따라 살았고 죽었다는 것인데, 이 천명(天命)의식의 바탕이 되는 천명사상은 예수님의 복음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회개 그리고 믿음의 실천에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하늘의 뜻에 따라 살고 죽는다는 사생관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대한 독립만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을 이어받은 조선 남아의 기개와 진리를 위한 순교자들의 정신을 물려받아서, 박해시대를 마무리 짓고 복음화시대를 열어젖히는 깃발을 드높이 쳐든 것이었습니다.
그가 염원했던 동양 평화는 이제 아시아의 복음화라는 시대적 징표로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복음화 제3천년기를 맞이하는 보편교회 수장과 아시아 주교들의 결의에 담긴 해석이 그러합니다. 하여,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는 이렇게 당부한 바 있습니다(‘아시아 교회’, 42항: 증언하는 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온 교회가 선교적이며, 복음화 활동이 하느님 백성 전체의 의무라고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하느님 백성 전체는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되었기 때문에 복음화는 결코 개인적인 것이거나 고립된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신앙 공동체 전체와 함께하는 친교 안에 이루어져야 하는 교회의 과업입니다. 선교는 하나의 기원과 하나의 최종 목적을 갖고 있는 유일하고도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에는 서로 다른 책임들과 다양한 형태의 활동들이 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와 일치된 삶의 증거를 보여 주지 않는다면 복음의 진정한 선포가 있을 수 없음은 명백한 일입니다.
'첫째가는 증거의 모양은 새로운 생활 모습을 나타내는 선교사와 그리스도교 가정과 교회 공동체의 생활 자체입니다. …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은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으면서 증언할 수 있고 또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증거는 많은 경우에 신자가 선교사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특히 우리 시대에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스승보다 증거를, 주장보다 경험을, 이론보다 실천을 더 믿기' 때문입니다(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42항). 이것은 아시아의 상황에서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시아 사람들은 지적 논쟁보다는 생활의 거룩함에 더욱더 감동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체험과 성령의 선물들은 도시, 시골, 학교, 병원들, 장애인들과 이주자들 또는 부족민들 사이에, 또는 정의와 인권을 추구하는 노력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선교 사업의 기초가 됩니다. 모든 조건이 그리스도의 진리가 그들의 삶 안에서 힘으로 변화되었음을 드러내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시아 교회는 이제 과거에 이 대륙의 민족들 가운데서 하느님의 사랑을 영웅적으로 증언한 수많은 선교사들에게 고무되어, 그 어느 것에 못지않은 열정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대하여 증언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교의 선교적 요청입니다.”
교우 여러분!
나라의 운명이 거짓 평화론을 앞세운 일제의 총칼에 의해 경각에 달려 있던 시절에, 불의에 맞서 귀한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안중근의 천명의식은 잠자던 겨레의 의식을 일깨워 그 후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우리 민족처럼 일제에 의해 억압받던 중국인들의 독립의식까지도 일깨웠던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천명의식은 본래 그가 염원하던 바대로, 민족의 독립만을 염원한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 즉 아시아의 평화를 실현하려는 데에로 나아갔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백년 전 우리 민족을 일깨워주었던 이 분명한 역사의 징표는 이제 아시아 복음화라는 더 보편적인 징표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를 당신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요한 17,17. 복음 환호송)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