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간 목요일(2024.3.7) : 예레 7,23-28; 루카 11,14-23
오늘의 말씀은 어제의 말씀과 좋은 짝이 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법을 전해준 데 이어서, 예수님께서 이 법을 완성하는 사랑의 길을 가르치셨는데, 이야말로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이는 개별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지는 길이 아니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 앞에서 선포했다시피, 참 이스라엘로 불리운 그리스도인들 전체를 겨냥하신 가르침이었고 특히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부르심이었습니다. 또한 한민족을 하늘 나라에서 큰 민족이 되게 하는 부르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21세기를 여는 대희년에 복음화 제3년기를 내다보았던 가톨릭 교도권에 따르면 아시아의 복음화를 통하여 인류 전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하는 복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선포가 지난 2천 년 동안 온갖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이제사 본격적인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회칙 ‘교회의 선교사명’에서 선언한 바 있습니다. 바로 위대한 종교들과 영적인 문화가 발상되었으며 또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고 그리스도교가 출현한 땅, 아시아 대륙에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복음선포를 가로막고 있는 마귀와 이에 따른 죄악과 맞서는 지혜가 오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예레 7,23)는 시나이 계약 정신을 모세를 통해 장엄하게 상기시키신 후에, 당신의 말씀을 전할 소명을 받은 예언자들을 그야말로 왕정시대 내내 ‘끊임없이’(예레 7,25)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그 종들이 전해주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습니다(예레 7,24).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탈출하여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 위대한 하느님의 법으로 살기만 하면 생명과 축복의 길을 걷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터에 어쩌다가 하느님께 대적하게 되었을까요? 그 까닭은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궁정을 장악하고서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기 때문이고, 그 결과 하느님과의 소통이 가로막혔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막힌 현실에 대해서 예레미야도 이렇게 한탄한 바가 있습니다: “나는 사마리아 예언자들에게서 고약한 일을 보았다. 그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잘못 이끌었다. 그리하여 아무도 제 악에서 돌아서지 않는다”(예레 23,13-14).
예레미야 이후 하느님께서 구세주로 보내신 예수님 당시까지도, 백성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거짓 예언자들이 계속해서 나타났으므로 이런 영적 단절 상태는 꾸준히 지속되었습니다. 이 상태가 심각하게 도지게 되면 백성 안에서 유난히 혼이 취약한 사람들에게서 말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증상과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 증상이 나타납니다. 귀먹으면 말도 못하기 때문에 청각 장애는 언어 장애를 수반합니다.
이런 이중의 신체장애증상을 가진 사람에게서 예수님께서는 근본 원인을 마귀의 활약으로 진단하시고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셔서 간단히 고쳐 주셨지만, 백성의 부마(付魔) 상태를 단번에 치유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악의에 찬 선동(煽動)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한 일부 군중은 감히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두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모함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마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하느님과 영적 소통의 장애를 지니고 있었던 당시 이스라엘의 부마 상태는 점점 더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이 부마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 현상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닮아가려는 창조질서에 대해 악령이 도전하고 방해하는 간섭현상입니다. 사람은 피조물 중 유일하게 하느님을 대신해서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육체와 영혼으로 결합되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육이 온전하게 결합된 상태에서라야 건강한 신체와 원만한 인격과 건전한 지성과 활달한 감성으로 하느님을 닮을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영혼이 건강하려면 사람의 혼(魂)이 하느님의 영(靈)과 온전히 소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통공 과정이 없이는 육체와 영혼이 결합될 수 없고, 세상을 하느님의 뜻대로 다스릴 수 없으며, 따라서 하느님을 닮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육체와 영혼의 결합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자연상태가 아니라 반드시 하느님의 영이 인간의 혼과 소통할 때라야 비로소 성취가능한 목표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부르신 제자들부터 혼으로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는 이들로 양성하시고 이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셨으며 세상 곳곳으로 파견하셨습니다. 각 시대, 각 민족에게 파견된 교회는 시대의 징표에 따라서 자기 민족을 복음화시킬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민족을 복음화시켜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랑의 문명을 선도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실패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확인된 이래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역대 교황들의 가르침과 교황청 그리고 아시아 주교들의 뜨거운 열망으로 확인되고 있는 역사적인 징표이자 운명입니다. 서구 사회의 백인 그리스도인들이 봉착한 인류 복음화의 한계를 돌파할 역량을 지닌 민족으로 역대 교황들과 교황청, 그리고 아시아의 주교들이 이구동성으로 한민족을 지목하고 한국교회에 대하여 그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기를 기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최근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한류 문화 현상은 이러한 기대를 확인시켜주는 충분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대 교황들이 한국교회에 기대를 거는 더욱 결정적인 근거는,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구도정신으로 교회를 세우게 하신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세계 선교역사상 유일하게 나타났던 이 섭리가 백 년 박해를 이겨내게 했고, 오늘날까지 그 활력이 순교정신으로 이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비록 불행하고 억울하게도 남북한의 분단 상태가 지속되고 있지만, 교황청이 대변하는 보편교회의 여망은 한반도의 평화 문제 역시 아시아 복음화에 기여할 한국교회의 봉헌에 의해 선물처럼 주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한민족과 우리 교회 안에서 귀를 먹게 하고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를 예수님께서 쫓아내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식별할 줄 알고 그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또 이 말씀을 전하려는 통공을 실현하게 되어서 말씀의 교우촌을 세우는 가톨릭 아나빔들이 모이면, 머지않아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시는 하느님 섭리가 나타날 것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