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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교수 인터뷰 : 유일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11-23 11:02:55
  • 수정 2015-11-23 12:4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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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수 편집장) 안녕하세요. 선생님께서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라고 하셨는데요. 유일신론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 (이찬수 교수)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하느님은 ‘한 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에 대한 오해가 큰 것 같습니다. 사실상 이 ‘하나’는 무소부재, 즉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는 신적 보편성을 수학적 원형이 되는 숫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는 사실상 ‘근원’ 혹은 ‘전체’를 뜻하는 말인데, 이것이 마치 여러 것들 중 하나로 이해되거나 다신교적 최고신처럼 이해되면서 하느님이 우주 공간 어딘가에 특정 공간을 차지하고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듯한 이미지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념이 신에 대한 왜곡을 부른다고 생각합니다. 


우주가 신의 창조물이고 공간조차 신의 창조물이라면서 창조자가 자신이 만든 특정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것은 신을 유한자로 만들어버리는 행위 아닙니까? 그런 신론은 신의 본래 모습에 어울리지 않아요. 


일신론에서 ‘하나’의 의미를 제대로 되살려야 하는데, 하나에 대한 오해가 너무 커서, 차라리 새로운 용어를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새 범재신론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 유일신론을 범재신론이란 새로운 용어로 바꾸고 싶으신 거죠?


▶ 네. 제대로 보면 같은 의미지만, 새로운 용어가 주는 신선함이 있으니까, 새로운 언어로 하느님을 더 잘 이해하자는 운동을 하는 거죠.


- 유일신론의 약점은 설명이 됐으니 이제 범재신론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범신론과 범재신론을 헷갈리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 범재신론(Panentheism)은 ‘모든 것(pan)은 하느님(theos) 안에(en)’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모든 것(汎)은 하느님(神) 안에 있다(在)는 한자식 표현으로 나타낸 겁니다. 모든 것은 신 안에 존재의 뿌리를 두기에, 모든 곳은 신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죠. 


예를 들어 인터뷰 하는 이 공간이 신이라면 우리는 이 공간 안에 있고 그 안에서 숨 쉬고 생명을 얻지 않습니까? 그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 존재하는 것들을 포괄하는 전체가 하느님이라는 뜻이 됩니다.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는 주장이 범재신론입니다.


반면에 범신론(Pantheism)은 ‘모든 것(pan)이 신(theos)이다’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과 신과 동일시하는 입장이고, 신의 내재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신이 만물의 창조자, 만물의 근원이면서 만물을 넘어서는 분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물이 그대로 신이라면 만물의 존재 이유와 만물이 어떻게 변화되어갈지 그 목적을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은 언제나 만물에 내재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분이기도 하다는, 신의 초월성까지 살려야 하고, 그런 의미를 담은 말이 범재신론입니다. 범신론은 신의 내재성에만 익숙한 말이 됩니다. 


- 최근 일부 가톨릭에서 ‘모든 것이 신 안에 있다’를 범신론으로 오해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쓴 <찬미받으소서>를 보면 인간과 자연이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셨어요. 단어는 쓰지 않았지만 범재신론의 뜻을 말한 것 같습니다. 


▶ 저도 교황님의 언행을 보면서 범재신론적 사유를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범재신론이란 용어와 그동안 그리스도교 신론이 설명해온 것은 내용적으로 화해가 가능하다고 해야 할까요? 사실 일치하는 거 아닙니까?


▶ 근본적으로 확대해서 보면 일치한다고 봅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언어의 근본 뜻을 모른 채 자기중심적으로 좁게 해석하면서 자꾸 그리스도교 중심적 사유를 하고, 다른 것과 갈등을 일으킨다고 봅니다. 


- 선생님 작품에서 종교의 새로운 개혁을 신론에서 시작하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 개혁을 교회론 또는 그리스도론에서 시작하려는 분이 계시는데 선생님은 왜 신론에서 시작하려고 하는지 궁금합니다. 


▶ ‘모든 것이 신 안에 있다’는 말은 모든 것이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축하는 말이죠. 범재신론적인 신은 다양한 종교적 세계관은 물론이거니와, 일체의 생명을 살리는 근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에 동의하더라도, 그렇게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조직과 제도가 형성되게 마련이고, 조직과 제도는 필연적으로 어떤 테두리나 경계를 세우게 되는데요, 경계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자신과 타자를 구분 짓고 타자를 배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타자를 배제하는 경계 수립적인 자세는 범재신론적 신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범재신론적인 신은 경계를 세우지 않거나 가능한 최소화할 수 있는 근원적인 이론적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조직이라면 조직은 필연적으로 안과 밖을 나누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그리스도론도 그리스도란 말의 의미가 주는 역사적이고 분명한 자기 정체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타자를 배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신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분이라고 볼 때 그 신을 근간으로 하는 세계관이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용납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이론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러한 신론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소화될 때 그리스도교 안의 종파적 차이를 넘어서게 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종교와의 차이를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소화할 수 있게 된다고 봅니다. 


- 그리스도교에서 범재신론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이웃종교와의 대화를 여는 데도 유연성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군요. 선생님이 주로 애쓰시는 분야가 평화학인데 이 분야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부탁드립니다. 


▶ 개신교인이지만 천주교 학교에서 공부했고 30여 년 동안 불교학을 비롯해서 동서양 종교 전통들을 두루 공부하면서 내린 결론이, 종교의 핵심은 ‘생명과 평화’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의 원리를 사회적으로 구체화한 것이 평화이고, 생명의 원리 위에서 평화를 구체화하는 운동과 자세가 종교의 핵심이라고 이해했죠.


그런데 공부해보니까 평화학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나라 연구와 비슷해요. 전쟁과 같은 물리적 폭력,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폭력이 극복된 상태가 ‘적극적 평화’인데요, 적극적 평화를 구현하려는 평화학은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려는 것과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화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것은 종교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고, 요즘 ‘종교평화학’이란 용어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평화로서의 종교연구’란 뜻인데요, 제가 앞으로 계속 해야 될 연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 작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다’라고 연설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선생님 의견이 여쭙고 싶습니다.


▶ 앞에서 말씀드리기도 했고, 평화학자 요한 갈퉁의 말이기도 합니다만, 전쟁과 같은 물리적 폭력, 구조적 폭력은 물론 종교차별, 성차별, 자연차별 같은 문화적 폭력마저 극복된 상태가 적극적 평화인데요. 단순히 전쟁이나 물리적 폭력이 없는 소극적 평화와는 달리, 문화적 폭력마저 없는 적극적 평화는 하느님 나라와 다름없고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정의가 실현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물론 교회에서도 진작에 그렇게 설명해왔지요.


- 신학자로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에 많은 역할을 하시고 앞서나가고 계신 분으로서, 가톨릭 신자들이 불교에서 배울 수 있는 좋은 점이 무엇이 있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불교, 좁혀서 말하면 대승불교는 범재신론적 사유를 진지하게 확립한 대표적인 종교 전통입니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그러니까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는 불성이 있다’는 대승불교의 세계관은 인간은 물론 산천초목까지 차별을 두지 않음으로써 미물 하나도 해치지 않으려는 겸손함, 생명에 대한 존중감을 강하게 견지해왔어요. 실제로 모든 불교인이 그런 자세를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니 다른 종교에 비해 차별적 경계를 세우려는 경향이 적어요. 다양성을 포섭할 수 있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큽니다.


- 그럼 반대로 불자들이 그리스도교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요?


▶ 제가 최근에 ‘다르지만 조화한다’라는 제목으로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한 내용들을 묶어 책으로 냈어요. 이 책 마지막에 종교적 완성 상태가 100이라 할 때 그리스도교는 70이고 불교는 90이라고 썼습니다. 


불교는 교리와 사상체계 차원에서 그리스도교를 포함하고도 남을 정도 넓어요. 그런데 현실에서 보면 스님을 비롯해서 많은 불자들이 불교가 뛰어난 가르침이라는 자긍심은 앞세우지만, 자긍심에 안주해서 다른 것을 보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적게 하는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리스도교는 100을 채우기 위해 30만큼 노력을 하죠. 불자는 10만큼 노력한달까요. 그리스도교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갈등과 긴장, 괴리가 있어서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을 상대적으로 열심히 하는 편입니다. 그런 열심의 정도에 있어서 불교는 그리스도교에 못 미치는 것 같다는 내용을 글로 쓴 바 있습니다. 불교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입니다. 불교에 대한 자긍심에 그리스도교의 치열한 정신을 보태서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상생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를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 제 생각으로는 그리스도교는 고통 받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연구한다면 불교는 고통이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하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원래 불교 가르침은 그렇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 부처님이 말씀하신 독화살 비유를 보자면, 독화살 맞은 사람이 있을 때 이 화살이 어디서 왔냐, 누가 쐈냐 따질 것이 아니라 바로 뽑아서 치료해줘야 된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에요. 


또 뗏목으로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그 다음에 산으로 갈 수 있다고도 하셨죠. 현실을 분석하는 데 안주할 것이 아니라, 고통을 극복해 세상을 불국토로 만들어가는 것이 불자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아(無我), 공(空),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같은,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장치가 워낙 깊다 보니, 거기에 골몰하는 경향이 생긴 것 같습니다.


- 교수님 개인적으로 어떤 신앙을 갖고 있고, 현재 어떤 입장인지 궁금합니다. 



▶ 말씀드린대로 저는 범재신론자입니다. 다양성을 용납하면서 상위의 더 큰 우산과 같은 광활한 세계를 전제한다는 차원에서 종교다원주의자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신교인이지만 천주교학교(서강대학교)에서 가톨릭 신학과 불교를 공부하면서 특히 불교에서 사상적 전환을 경험한 이래로 두 종교 전통의 관계에 대해 비교적 오래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불교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보이고 그리스도교 안에서 불교가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평화학을 위해 정치나 경제, 사회학적 언어를 좀 더 많이 들여다보면서, 종교언어도 일반 학문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학적 언어로 종교적 영성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제한이 없으시고 무소부재하고, 근원적 생명의 힘이라고 믿으면서, 글 쓰고 강의하고 때로는 설교도 하면서 작은 평화운동을 하는 중이랄까요.


- 선생님에게 예수는 어떤 분으로 다가왔습니까?


▶ 어렸을 때는 하느님과 같은 분이었고 제대로 따르지는 못하지만 그 다음에는 삶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를 온전하게 보여주신 분입니다. 


- 선생님은 가톨릭계 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신 개신교 학자인데 가톨릭에서 느낀 점은 무엇이 있으신지요?


▶ 개신교는 신론이나 그리스도론적 차원에서 상대적으로 답답함과 배타성이 강하지요. 그런데 서강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 가톨릭의 자연신학적 전통, 신학적 유연성을 많이 느꼈어요. 


개신교는 신과 인간의 이원론이 강한 반면에 가톨릭은 상대적으로 그런 부분이 덜하다고 느꼈고, 사분오열 되어 있는 개신교는 비교불능일 정도로 세계적인 조직이나 제도를 이천여년 안정적으로 확보해오고 있는 가톨릭교회가 늘 놀랍게 여겨지구요. 


- 가톨릭에서 좋은 점을 봤다면 그 건너편에 있는 단점도 보셨을 것 같습니다.  


▶ 가톨릭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장점이 곧 단점인 것 같습니다. 가령 갈라티아서(3,28)를 보면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선언이 있어요. 굉장히 혁명적인 선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전제조건도 있지요. 혈연, 신분, 성 등에서 사람 간 차별이 없다면 그 사람이든 종교든 평등한 원천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다면서 다시 자기중심적 집단을 만들잖아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자기중심적으로 제도화하면서, 보편적이고 무차별적 진리를 교도권이랄까 교회조직과 제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생겼는데, 이러한 모습을 가톨릭에서 강하게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톨릭이 신론적으로는 그렇게 이원론적이지 않고 유연하기도 하지만, 조직과 제도는 너무 이원론적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마틴 루터 킹처럼 훌륭한 목사도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영성체를 모시기 힘들어요. 여성 사제가 불가능한 것도 비슷한 논리지요. 제도적으로 차별화되어 있는 부분이 많이 아쉽습니다. 


‘가톨릭’이 ‘보편적’이란 뜻이잖아요. 보편성 확보를 위해 범재신론적 시각을 확장시키는 새로운 공의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시대에 이렇게 덩치가 큰 가톨릭이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톨릭 제도는 급속히 변한 요즘 종교적 경향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반인에게는 무언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가톨릭의 제도적 이원론이나 배타성이 알려지면서 당대 지성인들에게 외면 받게 될까봐 염려되기도 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으로 인해 가톨릭의 문제에 대한 치유가 미뤄지고 있는 측면이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했던 요한 23세 같은 분을 보고 ‘저런 분이 있어서 세상이 바뀌는 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면서 20세기 이후 가장 혁명적인 종교 지도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분의 언행에서 다양성을 포섭하는 범재신론적 분위기는 물론 미래를 선도할 수 있는 신학적‧신앙적 소양을 갖추신 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기왕이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교회 조직도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싶지만, 그분 혼자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요. 가톨릭의 이미지는 좋아지지만 그 속까지 바뀌는 것은 아닌 것 같구요.


그래도 교황으로 인해 가톨릭의 이미지가 쇄신되고 종교평화학적 감성이 좀 더 확산되는 점에 있어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국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가 큰 주제이지만, 전 세계로 보자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대화가 세계 평화의 큰 주제 아닙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은 유일신론적 사유체계를 기반으로 한 형제자매 종교잖습니까. 그런데 문화적 차이를 교리와 세계관 전체의 차이로 부각시키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권력자들이 권력 유지와 확장의 수단으로 상대방을 이용하면서 분쟁과 갈등을 부추기는 게 큰 문제이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간 문제는 종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문제이기도 하기에, 생각있는 시민사회에서 정치 권력자들을 향해서, 배타적인 종단을 향해서 서로를 포용할 수 있도록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은 대화를 통해서 정치와 종교, 영성과 사회가 만나는 장을 형성할 수 있는 좋은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 신학자 한스 큉이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고, 종교 간의 대화 없이 종교 간의 평화 없고, 종교 간의 연구 없이 종교 간의 대화는 없다’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깊게 동감합니다. 평화라는 것도 말은 쉽지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투쟁해야 하고 공부해야 하지요. 공부해서 평화와 평화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고, 평화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공감적 연대를 해야 하고, 무엇보다 대화를 해야 됩니다. 대화를 통해서 평화를 이룰 수 있기도 하고, 대화 자체가 평화이기도 하지요. 한스 큉의 명제는 저도 진작부터 동의해오고 있습니다. 


-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인해서 국민들 간에 분열이 생기고 평화를 해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역사라는 것은 복잡다단한 인간적 삶의 총체이지 않습니까. 역사는 벌어진 어떤 사실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으로 구성되고 형성됩니다. 역사에 다양한 해석이 있는 것은 필연적이고, 설령 불편하더라도 합의가능한 차원에서 다양성을 용납하는 관용의 정신을 키우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이죠. 그런데 그러한 것을 역행하고 획일화된 하나의 교과서를 만들려 하다니, 얼마나 후진적 발상입니까. 게다가 역사 해석을 하나로만 규정해놓으면, 나중에 일본이든 중국이든 미국이든 너희 정부가 국정교과서에 그렇게 기술해놓지 않았느냐 따질 때가 오면 어쩌려구요. 여러 해석이 있어야, 하다못해 우리 국민은 이런 생각도 하고 저런 생각도 한다며 해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학문의 기본에서는 물론 국제정치 및 외교적으로도 어설픈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 시대 신학자들의 역할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이론과 실천은 반드시 만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책상에서의 연구도 의미가 크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장치도 언제나 고민해야 됩니다. 소통하려면 언어의 전문성은 물론 대중성과 일반성도 확보하고, 신학자가 사회의 난제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신학이 우리 사회에 살아있는 학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 범재신론적 차원에서 평화학,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에 앞장서는 이찬수 교수님께 좋은 말씀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필진정보]
서강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위를,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강남대 교수, 대화문화아카데미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암호』,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종교로 세계 읽기』,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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